리뷰
극장 공간을 벗어난, 여러 다양한 형식의 춤들이 등장하고 있다. 진영아(Random Art Project 작은방, 대표)의 〈섬〉(해운대백사장,10월20일~21일). 춤을 돋보이게 하는 조명도, 매끈한 무대바닥도, 막도 없는 그 빈자리에 모래밭에 놓인 스피커와 바다에 떠 있는 낡은 바지선 상판 바닥만 있을 뿐. 더할 수 없이 개방적인 환경의 무대는 모든 의도를 배제한 정직한 형식으로, 아무것도 가둬둘 수 없는 빈 공간을 춤(안무)이 바다와 섞이는 것을 보여주는 형태의 작업, 흥미로웠다.
여성 보컬(다카브라카DakhaBrakha-〈Nad dunaem〉)의 목소리가 흐르자 조금 전까지 삶을 몰아대던 온갖 압박과 재촉이 일순간 느슨해지며 발 앞의 바다 또한 얕아진다. 여자보컬의 목소리가 공연장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면서 관객과 모래와 바지선과 춤을 하나의 투명체로 통합하게 만든다. 적절한 음악선택이다. 바지선 상판. 흰색원피스를 입은 네 명의 여자무용수가 누워 있는 벤치의자. 수평선에 걸려있는 의자. 마치 바다 위에 누워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검정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황정은)가 길고 넓은 치마폭으로 얼굴과 몸을 감싼 채 추는 춤, 아름답고 강렬하다. 춤이 사라지기 전에 웨딩드레스에 긴 베일을 끌며 들어오는 여자(이소라), 그녀의 베일 끝자락을 잡고 따라 들어오는 검정 원피스의 안희주. 결혼과 함께 동행하는 결혼의 다른 얼굴(죽음)이다. 삶(결혼)과 죽음(장례)을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등장시킨다. 안무자(진영아)는 결혼이란 고립된 ‘섬’에서 꿈(삶)과 죽음(자아)을 동시에 껴안고 꾸는 꿈이라 말하고 있다.
검정색 가방을 든 남자와 여자. 그들이 들고 있는 가방은 어디론가 떠날 때 드는 여행 가방이다가, 다른 곳에 오르기 위해 밟아서는 계단이 되는가 하면, 죽음(삶)을 가두는 관이 된다. 검정색 원피스의 정혜원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그 위에 쪼그리고 앉는다. ‘섬’을 떠날 것인가, 바다에 몸을 던질 것인가. 죽음을 곁에 두고 추는 여자의 춤. 죽음(가방) 위를 걷다가 어느 사이엔가 줄이 달린 인형(마리오네트)을 들고 걷다가 벤치의자에 앉혀놓는다. 그리고 여자(정다래)가 추는 춤. 마치 자신의 어깨에 줄이 달려있는 듯, 춤이 불편하다. 바지선 뒤로 흰색 돛을 올린 요트가 지나간다. 줄이 달려있지 않았다면. 저 요트로 건너갈 수 있었을까. 의외의 상황을 배제한 무대에서 일어나는 춤적 상상이다. 가방을 들고 들어온 남자들의 춤이 펼쳐지지만 내용이 없고, 춤(삶을 이해하는) 또한 서툴다.
가방과 검정색 의상이 가리키는 꿈과 죽음은 하나의 상징. 삶과 죽음의 선택에 그 결연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붉은 색 브라에 검정색 재킷을 입은 김현정의 춤은 맨살에 꿈을 배치하여 춤의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낸, 꿈과 삶의 만남을 전후하여 완전하게 달라질 존재의 매혹과 불안을 시사하는 춤이었다.
〈섬〉은 여성의 삶(들)이 무의식적인, 정신적인 것에 대한 상징들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대상적으로 파악된다. 작품의 이미지들은 개념적 사유를 정지시킨다기보다 바지선이라는 특이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춤의 아름다운 움직임으로 충격을 주고 그로써 사유를 움직이게 한다. 이러한 다른 사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다른 각도에서 비춘다. 말하자면 무대를 바다 위에 떠있는 낡은 바지선으로 설정,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춤을 능동적인 각도에서 비추는 것이다. 사유에 충격을 주는 이러한 형식에는 이미지와 춤의 언어가 결합되는 어떤 곳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한데 진영아의 〈섬〉이 바로 그와 같은 곳(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일상(빨래)이 내걸린 바지선은 마치 구조를 기다리는 난파선 같다. 꿈을 찾아 심연의 밑바닥에, 죽음 속에 잠기고 싶다고 외치는 춤이 이어진다.
이렇게 풀어보자. 〈섬〉에서 말하고자 하는 여자들의 꿈. 그 꿈은 일탈도, 방황도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여자가 아닌) 사물에 바치는 진정을 통해 그것의 또 다른 모습을 감지하여, 그것을 일상의 삶 속으로 끌어와 다시 살아내고자 하는 일이다. 그 꿈에서 중요한 것은 꿈의 분명한 내용들인 것이지 잠재적인 꿈의 사유들이 아닌 것이다. 여자들이 꾸는 이 꿈이 인식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그 꿈들이 이제껏 묻혀있던 진리의 어떤 측면을 서술형식을 통해 포착하여 춤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꿈들이 갖는 심리적 근원을 찾아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꿈들이 깨어남에 가져다주는, 이성적이지는 않으나 지극히 현실적인 그 어떤 눈짓들을 포착하는 일이 목표다. 하여 진영아가 춤으로 꾸는 꿈은 규율 받지 않은 경험의 매개체가 되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유에 맞서는(춤 공간의 전복 같은) 인식의 원천이 된다.
옷(일상)을 줄에 달아 바다로 던져 빨래를 한다거나 건져 올린 천(꿈)을 다시 빨랫줄에 내걸고, 어떤 여자는 입고 있던 옷을 힘겹게 벗었으나 선뜻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다가 결국 바닥에 던진다. 자신의 존재 속에서, 또는 제 존재들 속에서 또 하나의 존재에 각성하였음을 말하는 동시에, 그 존재로 살기위해 마땅히 겪어야 할 시련들이 곧 그 삶의 매혹이자 기적임을 춤추고 있는 것이리라.
가볍게 날리는 천을 들고 추는 군무가 마치 바지선의 무사안녕을 비는 굿춤 같다. 배 굴뚝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배의 선미에서 색이 바랜 낡은 모자를 쓴 늙은 선원이 뭍과 연결된 밧줄을 정리하면서 느닷없이 춤의 현장으로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바지선 무대는 일상과 예술이 혼재한 공간이 된다. 성찰은 작용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멀리 떨어뜨려놓고 춤과 바지선 위의 기름때 묻은 사물들은 해가 비치는 그 아래, 보이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둔다. 마지막, 흰색 베일로 온 몸에 쓰고 걸어 나오는 여자(안선희), 혼자다.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켜 ‘섬’이 되기도 하는 사람이 예술가이기도 하다. 2001년에 무용단을 창단, 바지선 공연을 비롯하여 수차례 공연을 해오면서 안무자가 자신의 존재를 ‘섬’처럼 소외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번 작품 〈섬〉은 각성될 수도, 발견될 수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덧붙여, 더 할 수 없이 개방된 공연환경에서 바지선을 물리적으로 철저하게 ‘섬’처럼 고립시켜 더 크게 활용하지 못한 점, 아쉬웠다. 진영아의 〈섬〉은 바다에 띄운 바지선 무대라는 새로운 형식이 실험되는 장으로, 부산의 지역적 특성에 맞춘, 춤의 실천적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었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