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현대무용단 ‘자유’의 춤언어는 잔잔하고 나직하다. 간혹 강렬한 선동으로 시대의 고통을 무대에 옮겨놓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영합이나 타협도 없이, 그래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이 시대의 삶과 고통을 춤의 언어로 옮긴다는 것. 이들의 춤을 보는 이유다.
‘자유’의 정기공연(9월 13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무대. 깊숙하게 똬리를 틀고 있던 오래된 슬픔을 장례의식을 빌려 춤으로 풀어놓는가 하면(박근태의 〈장례식의 첫째 날〉, 삶의 무게가 주는 고통, 그것에 대한 무뎌짐을 경계하는(이언주의 〈무너진 걸까, 무뎌진 걸까〉) 춤. 그리고 죽음과 삶을 가르는 경계(안선희의 〈시선〉)의 공간에서 과거 몸으로 존재했던 이들의 시간을 들여다보기. 그 시선을 통해 자신의 몸(춤)이 하는 말을 알아차리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춤언어의 지혜로움까지. 40대 초중반, 그리고 이제 막 30이 된 이들의 춤을 이들의 현실 인식과 결부시키는 일이 새삼스럽지만 그만큼 정당하다. 춤을 본다.
먼저 박근태의 〈장례식의 첫째 날〉. 그림도 글귀도 없는 스틸 소재의 회색빛 병풍이 펼쳐져 있는 무대. 한가운데 놓인 제상, 그 위 촛대. 모노톤의 간결한 장치에서 오래된, 건조한 슬픔이 읽힌다. 왼쪽 병풍 앞에 서 있는 검정색 양복의 두 남자. 한 남자(박근태), 삼베두루마기를 접어들고 서 있다.
검정색의상을 입은 세 명의 여자무용수. 영혼이 이승을 떠나는 춤인 듯, 슬픔을 추는 듯도 한, 멈춤과 흐름으로 연결되는 춤이 이어진다. 춤의 어법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감수성과 심미감이 넓어졌다. 박근태(상주)가 두루마기를 펼쳐 들고 혼을 부른다(招魂). 그리고 독백. “툭” “툭, 하고 숨이 쉬어졌다.” “툭, 하고 아버지가 숨을 쉬지 않았다.“ 가 ‘숨이...진다.’ ‘숨이...졌다.’ 로 변이되면서 슬픔이 번진다. 오래된 슬픔. 다시 “툭,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로 이어지는 독백은 유교와 기독교의 장례절차를 두고 빚어지는 갈등, 슬픔과 소란스러움이 교차되는 장례식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툭’으로 시작되는 독백의 정서적 논증은 춤의 여부를 따지는 논쟁을 가로막는다. 아버지의 죽음, 그 장례식 첫째 날 목도한 슬픔의 무게는 어떤 주관적 정서의 개입으로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하여 박근태의 작품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피상적인 죽음이 아니다. 남자가(아버지) 웅크린 채 무대바닥을 천천히 구르는 데서 전해져오는, 몸을 펼 수조차 없는 비통한 슬픔이며, 제 울음을 어디에 보여주려는 이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미처 몰랐던, 울고만 있는 어머니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아둔하고 무력했던 자신에 대한 고통과 슬픔에 우는 사람이다. 박근태에게 있어 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몽상이나 죽음과 유사한 것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절대적인 죽음인 것이다.
화자(안무가 박근태)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작은 움직임. 웅크린 채 바닥을 구르고 머리를 자신의 손으로 반복해 쓸어내리면서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는 춤에서 고통이 드러난다. ‘툭’ ‘툭’ 무대바닥으로 스며들 듯 가라앉던 남자가 느닷없이 제상 위에 앉자 화자(박근태)가 삼베두루마기를 그의 몸에 둘러준다. 아버지의 영혼이라 짐작한다. 처음 박근태(상주)와 같이 서 있던 위치, 화자(박근태) 곁에 서 있던 남자가 망자(아버지의 영혼)가 되는 배역의 배치, 조야하고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마음과 깊고 감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춤이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되기도 한다.
다음, 안선희의 〈시선(視線)〉. 작품이 깊어졌다. 직사각형의 테두리에 잔디, 대리석 판이 덮여있다. 무덤인 듯. 그 위에 한 쪽 무릎을 구부리고 상체를 기울인 채 무대바닥을 들여다보고 서 있는 안선희. 무대 위의 여자들, 삐꺽거리고 덜컹대는 오래되어 낡은 소리, 무용수 네 명의(이승윤, 이혜리, 정다래, 김민경) 느린 춤. 그들의 움직임을 들여다본다. 과거의 시간,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이른바 봉인된 시간 속 인물들의 움직임이다. 여자들의 춤과 안선희의 손짓. 홀로그램을 보는 듯, 안선희의 손짓 안에 무용수들이 모였다가 튕기듯 흩어진다. 시간이 공간을 획득, 보이지 않는 공간 안에서 이리저리 밀렸다가 튕기며 툭툭 떨어지고 번지고 시간을 달린다.
초록, 자주, 남색과 꽃무늬의 과거의 시간을 입은 무용수들. 두 명이 지나가면서 다른 시간을 건드리자 파문이 일 듯 세 명이 되고, 또 다른 시간은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채 허공에서 다리를 젓는다. 거꾸로 서서라도 그 시간을 헤집고 그녀가 보고 있는 것. 남색 시간은 대리석 판위로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더 집중하여 들여다본다. 낯설게 보기. 낯설게 보기란 다시 한 번 들여다보기라는 말과 같다. 자주색 시간이 무덤위에 앉아있다. 바닥에는 요가 자세, 이 모든 움직임 뒤 정지. 이들이 낯선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춤을 멈췄기 때문이고, 잠시 생각을 끊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시간을 춤추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무정한 현실의 외관에 모험의 길을 내듯 추는 춤이 이어진다. 길 없는 춤들이 균형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될 더 큰 세계를 춤(몸)의 감각 속에 펼쳐놓는다. 결국 안선희가 보고 있는(시선) 것은 춤의 미래를 전망하는 지점. 퍼즐을 맞추어 가듯, 춤이 이야기를 얻는다. 시간을 들여다보는 명상. 그녀와 무리가 모여서서 커졌다가 모아지는 호흡(숨)에다 천천히 돌아보다 엉거주춤 앉고, 그리고 일어선다.
시간들이 돌고 있는 경계. 안선희의 춤. 한국춤사위처럼 덩실덩실 추다가 고개를 젖히고 다시 아래로 훅 떨어지는 춤. 자신의 춤(몸)에 주의를 모으고 흩뜨리면서 자신의 춤이 가치를 띠는 계기에 정신과 감각을 집중할 줄 아는, 춤을 잘 추는 작가다.
파동이 이는 작은 쇠판. 작은 종을 들고 서로 부딪는다. 소리가 번지면서 모든 시간이 정지.
안선희의 〈시선〉은 은유를 염두에 두지 않고도 현실에 은유적 힘을 부여하면서 알레고리를 만들어냈다.
걱정하나. 춤추는 이들은 마음이 자아에 집중되어 있기에 마음을 비우고 하나의 심경을 만들어내면서 해방감을 얻는다. 혹여 관객들이 그 춤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을 때 자칫 지루한 춤이 되고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점. 춤의 실재(보는 재미)와 상상계(의미)가 일치하는 춤언어의 어떤 지점을 찾아내는 것 필요하다.
마지막 이언주의 〈무너진 걸까, 무뎌진 걸까〉.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견디는 것이 아닐까, 안무자는 ‘삶을 버틴다’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을 집(공장)을 상징하는 구조물과 그 줄에 매달려 온힘을 다해 당겨 올렸다가 내려지기를 거듭하는 남자(조현배)를 통해 보여준다. 온몸을 던져 잡고 있는 줄, 그 끝에 매달린 구조물. 거기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 삶을 흔들어대는 고난의 막강한 힘. 그 무게를 견디는 삶을 살아내는 이는 누구여도 상관없는 개체다. 6명의 남녀가 6개의 흰색 플라스틱 의자와 긴 탁자 두 개를 이어 붙였다가 다시 해체하는 반복된 동작(노동)을 놀이처럼 가볍게 그려낸다. 노동, 무겁지 않다. 힘겨운 일상에 경쾌한 기운을 얻어주려는 시도이기도 한 다소 가벼운 음악이 오히려 모더니즘과 사실주의를 연결시키는 힘이 되었으나 깊이를 얻지는 못한다. 군무진이 동시에 반복하는 동작(노동)과 적절한 음악으로 현실에서 춤을 추출하고 현실을 춤이라는 예술로 끌어올리는 힘의 깊이 말이다.
기계부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에 문제의식을 가진, 이제 막 30줄에 들어선 안무자의 건강하게 살아있는 춤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에 안도한다.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