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필자가 연출가 적극과 안무가 밝넝쿨의 협업을 처음 본 것은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두산아트센터, 2015. 1.22~1.24)에서였다. 물론 그 직전인 2014년 말 홍은예술창작센터(현 서울무용센터)에서 열린 〈춤매뉴얼〉(홍댄스컴퍼니와 적극의 협업, 2014. 12. 22~27) 안에서 두 사람이 갖고 있던, ‘개인에게 맞춘 춤’이라는 화두는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협업의 시초로 연출가 적극의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를 보다 더 중요하게 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번의 〈댄스를 부탁해 5〉(성수아트홀, 6.29~7.1)가 내세우는 ‘대대(待對)’라는 주제를 놓고 보았을 때 두 작품이 그러한 관계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는 한스-티스 레만이 꼽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특징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꿈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꿈 이야기로 끝나는 몽환적 분위기에 딱히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장면들의 병렬적 구성, ‘재현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노골적으로 보여주기 등 기존 드라마 연극의 문법을 해체하는데 충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 행위들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전체공연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는데, 기존의 것을 ‘해체’하거나 ‘파괴’하겠다는 행위가 필수적으로 전제하기 마련인 어떤 공격성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배우들의 행동이 어수룩해 웃음을 자아내고, 공연 진행의 템포 역시 느슨하고 여유로웠기 때문이다. 밝넝쿨은 거기서 ‘하늘과 땅과 아프니까 사람이다 밝넝쿨춤’이라는 네 번째 장을 맡아 흐름을 갈무리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다수의 포스트드라마 공연들이 관객의 전투적 참여를 요구하지만) 관객들의 참여를 부담스럽지 않게 유도하면서 단순하고 쉬운 몸짓으로 이 공연이 추구했던 인류애의 주제와 평화지향적인 분위기를 전파하였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 공연에서 밝넝쿨의 등장으로 인해 포스트드라마 연극 이후 세대와 포스트모던댄스 이후 세대의 고민과 해결노력이 함께 보였다는 것이었다. 한스-티스 레만이 말라르메의 ‘신체로 글쓰기(écriture corporelle)’ 개념을 언급했을 만큼, 수많은 언어를 동원하지 않고도 즉각적으로 시각화시킬 수 있는 춤의 총체성이 연극의 입장에서는 신선하고 탐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각종 움직임의 메소드를 익히고 구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예술춤의 현장에서는 과연 무엇을 위해 춤을 추는가, 하는 춤꾼 자신의 의미의 결여가 보다 큰 문제로 다가왔다. 시대의 영향이겠지만 연극이든 무용이든 고민은 다르지 않았다.
이제 연극은 언어 텍스트에 함몰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춤 역시 기교 위주의 움직임, 다른 이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으로부터 춤꾼의 주권을 찾아오는 것이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환영(幻影)’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규정되었던 극장 무대를 예술가 자신이 속한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치환시키는 것이 중요해졌는데, 연출가 적극과 밝넝쿨이 의기투합하는 명분을 거기서 찾을 수 있었다.
이번 〈댄스를 부탁해 5〉 공연 2주전, 같은 공연장에서 이루어진 〈저마다의 무용- 춤 처방〉(6.16~17)은 사주명리학의 지식을 습득한 연출가와 안무가가 음양오행에 맞는 기본적인 동작들을 개발하여 개개인의 명리에 맞는- 사주에서 일간(日干)에 해당하는 기운을 북돋을 수 있는 방향으로- 춤을 처방하는 렉처 프로그램이었다. 때문에 〈댄스를 부탁해5〉에도 그 내용이 상당수 반영되지 않을까 예상했으나, ‘봄-오픈댄스’ 장에서 다섯 무용수가 각자에 맞는 색의 조명을 안고 기본동작을 선보였을 때만 드러났을 뿐 그 동작들은 두드러지게 티를 내지 않고 녹아들어가 있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를 기본으로, 계절별로 두 가지씩 가름되는 장면들이 딸린 〈댄스를 부탁해 5〉는 제목과 그 구성에 있어서도 음양오행을 꽤 의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일차원적으로 대입시키진 않았다. 음양오행은 우주가 운행하는 원리를 설명한 것이고, 인간이 이렇게나 거대하게 문명사회를 이룩하고 살고 있다 할지라도 결국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 음양오행 자체를 무대에 끌고 왔다는 자체가 특별할 수는 없다. 이론을 적용한다는 건 그런 자연의 흐름 속 작은 시간 단위(하루)에서부터 큰 시간 단위(1년, 생애, 역사)를 통과하는 우리의 변화하는 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 돌아보고자 할 때 유용한 것이다.
음양오행에 대한 지식이 공유되지 않은 불특정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저마다의 무용- 춤 처방〉에서는 일간에 해당하는 오행 중 하나를 그 사람의 특징으로 삼아 단순화시킬 수밖에 없었지만, 오행의 어떤 기운도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단 한 가지 기운으로만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성질을 가진 상대가 있을 때(그것도 많이)라야만, 나의 성질도 제대로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떤 둘의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공연을 풀어나가는 설정은 제법 타당해 보인다. 지시문처럼 기능하는 화면에 펼쳐지는 서정적인 시구와 달리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관객으로부터도 고개를 돌린 채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행위는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처럼 섞이지 않는 듯 했다. 공연은 이렇게, 서로 대립되고 이질적인 것들을 교차시켜 보이거나 바로 이어 붙여 충돌하는 효과를 노리는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오행춤이 활력 있게 무대를 채웠던 ‘오픈댄스’를 지나 무용수 각자가 거주지로부터 성수아트홀까지 출근하는 길과 방법을 긴 전선으로 수놓으며 설명하는 ‘여름-성수아트홀 가는 길’에 이르면 각자의 현실에 끼어든 작은 난국들이 대체로 설명된다. 미혼(비혼) 무용수, 가정을 책임진 무용수 할 것 없이 그들의 아지트인 성수아트홀에서 멀리 떨어져 살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출근길의 생존전략을 궁리해낸다. 애니메이션을 보든 맛집 투어를 짜든 피할 수 없는 고난의 대상을 즐거움으로 극복하려는 것이다.
제한이 많은 육체에 페트병으로 만든 인형을 매달아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킨 ‘공상 물리적 춤’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마음껏 꾸는 꿈이다. 일회용품을 재활용해 오브제를 만드는 것은 적극의 전매특허인데, 이 오브제들은 또 여러 공연에서 재활용되어 등장하곤 한다. 전문가의 솜씨임이 분명하나 매끈하지 않고 투박하게 처리된 이것들은 이질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질적이지 않게 인간의 몸에 어울린다. 말 그대로 일회용에 지나지 않은 사물들이 새 생명을 얻어 선순환 하도록 만드는 예술가들의 품은 하나의 소우주와도 같다.
개인의 서사인 ‘봄’과 ‘여름’을 통과하면서 이제 그들은 거시적인 단위로 눈을 돌린다. 개인의 생애뿐만 아니라 한 사회와 역사도 생장염장(生長斂藏)의 법칙을 따르기 마련이니, ‘가을’의 결실을 공동체가 함께 이루는 것으로 보다 큰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90년대 초반까지도 시위현장에서는 화염병을 투척하곤 했었다. 무용수들이 시위와 그 진압 과정을 유쾌하고 장난스럽게 그리긴 했지만, 그건 아주 치열했던 시절임이 분명했다. 그 뜨거운 시절의 모습이 축제의 불꽃놀이로 연결되는 데서 관객 다수는 아마도 유례없던 촛불혁명의 물결을 떠올렸을 것이고 “쭉정이는 가라”던 시인의 외침이 이제야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릇된 것, 쭉정이를 활활 태워버린 환희에 젖어서는 안 된다. 자연의 순환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밝넝쿨이 온몸의 무게를 실어 팽팽한 긴장 속에 침잠시킨 ‘느린 춤’은 시간의 굽이굽이를 겪은 뒤 성숙하여 지혜와 힘을 자기 안으로 끌어 모아야 하는 가을의 엄숙한 명령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고대로부터 수많은 문명사회가 나타났다 사라졌듯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우리의 시대도 언젠가는 저물 수 있다. 춤으로 따지자면, 복잡다단한 기교와 구성을 모조리 싹 잊고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몸짓으로 돌아갈 날이 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겨울의 깊은 침묵에 들었다 해서 새로 맞는 봄이 작년의 봄을 제자리걸음한 것은 아니다. 시간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만큼은 나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2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연작의 〈댄스를 부탁해〉라는 제목은 그래서 되짚어볼 거리가 된다.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에서 유례없이 찬란한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몽땅 휘발시켜버리고 “맥베스”와 “뱅코우” 이름만 부르며 난장을 벌였던 ‘맥베스’ 장 바로 다음 밝넝쿨이 등장했던 것처럼, 말과 소리가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그래도 몸짓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언어와 춤의 우열을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적극-밝넝쿨 콤비는 이제 연극이니 무용이니 하는 경계를 넘어 둘을 서로 뗄 수 없게 한 몸으로 융합시키는 의지와 기술을 터득한 듯하다(사소한 지적일 수 있지만, 그래서 무용적 연극 혹은 연극적 무용 등, 하나를 다른 하나를 보조하여 수식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하는 표현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한 가지 방식만으로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이기에, 둘은 상보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번 〈댄스를 부탁해 5〉가 특기할 만한 이유는 밝넝쿨이 붙잡고 있던 ‘춤과 음양오행’의 주제가 단편적 호기심만 끌고 끝나는 소스로서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 고난과 결실, 춤과 춤 아닌 것 등 다양한 대대 관계를 에두르면서 비로소 참여한 예술가들의 현재 삶을 확인시키고 녹여 표출하는 사유의 물줄기로 작용했다는 점일 것이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