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상한 조합이었다. 〈ADF-중견작가전〉(8월8~9일, 대구수성아트피아)을 말함이다. 으레 춤 중견작가라 함은 춤 단체나 춤 사회에서 중심이 되어 활동을 하는 이들을 말한다. 춤 기량은 물론 작품의 질 또한 ‘중견작가’ 정도에 이를 것이란 암묵적 인정을 포함하여. 그런데 이제 막 작품활동을 시작한 천소연의 발레와 몇 차례 개인 공연이력을 가진 현대춤을 추는 이준욱과 한국창작춤을 추는 김정미, 그리고 전통춤을 추는 주연희의 〈태평무〉의 조합. 이해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작품의 질. 안타깝게도 이날 무대에 오른 작품이란 것이 ‘중견작가’들의 무대라고 하기에 민망한 수준이었다. 이들을 중견 안무가로 선정, ‘중견작가전’을 기획한 의도가 궁금했다(선정기준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지).
작품을 본다. 이준욱의 〈시기적 시기〉. 난해한 제목이다. 굳이 해석해보자면 ‘(어떤 상황)시기에 비추어 (자신)이 따라야 할 때’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 같은데. 춤은 제목보다 더 난해하다. 이준욱과 도효연은 같이 그저 공간을 이동하면서 할 수 있는 현대춤 동작을 나열하기만 한다. 안무자가 자신의 내밀한 사유를 춤 언어로 잘 연결할 수 있을 때 관객은 그것을 겨우 읽을 수 있다. 자신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는지 돌아봐야 할 듯.
주연희의 〈태평무〉.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바라는 왕비의 춤이 아니라 백성(보는 관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왕비(나) 혼자 무대에서 태평(연)하게 추는 춤이었다. 오래 춘 전통춤에서 더 잘 읽히는 것이 춤추는 이의 춤(예술)정신이다. 주연희는 40대 후반의 무용가다. 왜 ‘태평무’를 배우고 추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이 춤에서 읽혀야 하는 ‘중견’이다.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천소연의 발레창작 〈보통의 존재〉는 발레전공자들이 처음 창작 작업을 할 때 흔히 하는 오류를 고스란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중앙에 설치한 검은색의 거울. 분명하게 드러내기 싫은 내면, 하지만 자신(얼굴)을 비춰볼 수 있는 은밀한 공간. 천소연이 거울을 따라 천천히 걷거나 거울 앞에서 간혹 보여주는 아다지오 동작에서 읽히는 나르시시즘. 온몸을 감싼 흰색과 검정색의 긴 원피스를 입은 네 명의 무용수. 무용수에게 길고 무거운 원피스를 입힐 생각이었다면 그 의상을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와 동작으로 춤을 구성했어야. 춤으로 의상이 아름답게 표현되고 아름다운 의상으로 인해 무용수의 춤이 더 돋보이게 하는 안무 말이다. 토슈즈를 신고 부레 동작으로 무대를 오가다가 간혹 그랑 제떼를 뛰는 것만이 발레창작이 아니다. 독창성 없는 작품이었다. 특이점은 무용수들의 프로필이 훌륭하다. 아무 소용없었지만. 안무자의 분명한 작품의도와 안무를 만나야 춤출 때 좋은 협업이라 하고, 무용수들의 프로필이 빛이 난다.
마지막, 한국창작 김정미의 〈아무것도 아닌〉. 안무자가 ‘아무것도 아닌’ 춤을 보여줄 의도였다면 성공한 작품이다. 김정미는 자신의 춤에 침잠하여 고요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춤에 집중할 때 빛이 나는 무용수다. 올해 1월 혼자서 50분여 동안 무대에서 보여준 그 집중력과 춤으로 뿜어내던 에너지는 어디다두고 빈껍데기로 무대에 올랐는지, 안타까웠다. 어둑한 상태에서 무대 중앙에서 장대를 설치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무대 안쪽 깊은 곳에서 김정미가 홀로 추는 춤. 이어 무대에 불이 들어오고 빨강색 봉으로 이어진 사각형 공간으로 걸어 나오는 과정까지의 7분여 동안의 긴장미. 딱 그 뿐이었다. 봉을 공중으로 끌어올리는 이동과 이어지는 군무는 자신이 참여했던 작업의 그림자들을 이어붙인 ‘아무것도 아닌’ 작품이었다.
창작하는 일, 특히 자신만의 춤 언어로 춤을 짓고 춤을 추는 일은,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춤의 깊이란 의식적인 춤이건 무의식적인 춤이건 결국 생각의 깊이다. 춤추는 이가 가장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그 존재의 가장 내밀한 자리와 연결된 말에서만 그 깊이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춤으로 자신이 자유로우며 풍요롭고 자신의 춤을 보는 이들을 위로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춤(예술)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춤으로 표현된 생각은 그 생각이 어떤 것이건 그 춤 언어의 질을 바꾸게 된다. 춤판에서 춤을 추는 이가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역사를 잘 못쓴다는 말과도 같다.
〈ADF-수성아트피아 무용축제〉는 대구 수성아트피아 극장과 한국무용협회 대구시지회(회장 강정선)의 공동 기획으로 지역의 젊은 신진예술가들에게 무대를 제공, 지역 무용인들의 창작작업 활성화를 꽤한다는 취지로 2012년에 시작됐다. 이 무대가 지난해 극장 ‘10주년 개관’ 기념으로 첫 ‘중견작가전’을 기획. 발레의 우혜영(영남대교수), 현대춤의 장현희(장댄스프로젝트), 한국창작춤의 김현태(정길무용단) 그리고 전통무용가 손혜영(아정무용단)을 무대에 올렸다.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무대에서 무용가와 안무가로 성장해온 지역의 중견무용가들이라 할 만한 조합이었다,
반면 올해의 ‘중견작가전’. 예로 천소연의 경우에는 2018년 ‘대구문화재단’에서 신진에게 주는 ‘청년예술가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이제 막 작품활동을 시작하려는 신진이다. 신진이 같은 해 중견으로 무대에 선 것이다. 신진들의 무대를 만들어주고 그에 맞는 평가를 받게 하면서 성장하도록 격려하면 될 일을,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무대가 왜 필요했을까. 대구무용계의 권력을 사유화한 이들과 극장 관계자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일이라 짐작한다. 하여 대구 〈ADF〉가 선정하면 믿어야 한다? 무용협회측에서 선정한 무용가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대구무용협회 스스로 기준과 원칙이 없는 단체가 되는 것이다. 거듭되면 결국엔 창작활동의 터전과 목표가 심하게 왜곡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구 춤의 수준이 아무리 형편없기로 이렇게 기준도 원칙도 없이 기획된 무대에 그럴싸한 부제목을 달아 관객을 불러 모을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기획자와 연출자의 의도가 거듭 궁금하다.
이렇게 항변할 수도 있겠다. 무용인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고 좋은 작품으로 관객들을 만나면 되지 ‘신진’이나 ‘중견’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맞다. 반드시 ‘중견’이어서 좋은 작품을 하고 ‘신진’이라 미숙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실제 중견보다 나은 신진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조차도 기록에는 ‘신진’이어야 한다. 앞으로 〈ADF-수성아트피아 무용축제〉무대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불행한 일이다. 올해의 기준을 믿으라 우기면 지난 해 ‘중견작가전’ 무대에 선 이들의 위치(원로가 되나)와 춤이력 또한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다. 전통춤을 추는 무용가들이 〈명인명무전〉 무대에 오르고 나면 ‘명무’로 둔갑하게 된다. 기획자가 〈명인명무전〉 무대로 무용가들을 불러 모으고, 무용가들은 ‘명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앞 다퉈 무대에 선 뒤 스스로 ‘명무’가 된양하는, 한심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정작 무용가들이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모두 다는 아니겠지만 그것이 ‘돈’에서 비롯되고 ‘돈’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건만. 무용가들은 자신이 ‘명무’임을 증명하는 팸플릿, 무대에 선 이력 한 줄이 더 중요하여 부끄러움을 깊숙이 묻는다.
같은 맥락이다. 돌연 ‘중견작가’가 되어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문을 표하거나 적어도 ‘중견작가’라는 단어를 빼달라거나 아니면 무대를 사양하겠다는 이 하나 없이 스스로 중견작가가 되어 다들 무대에 섰다. 이들 또한 자신을 돌아보기 전에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박힌 ‘중견작가전’ 팸플릿을 증빙서류로 어디엔가 제출하고, 이력서에 한 줄 더 써넣을 경력을 먼저 염두에 두었을 것인가. 눈과 마음이 밝은 무용가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슬프고 걱정된다.
이들이 설 무대를 쥐고 있는 지도자들이 젊은 예술가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야 하겠는가.
오래된 질문하나 더. ‘SADF-수성아트피아 춤 페스티벌’라 해도 될 것을, 굳이 유명한 〈ADF-아메리칸 댄스 페스티벌〉과 헛갈리게 작명한 의도가 늘 궁금했다. 대구 ‘ADF’라고 말하려고 하면 늘 두세 번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정직하지 않은 작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신진들로 선정된 무용인들의 춤 기량과 작품 수준이 들쭉날쭉, 이 무대를 통해 눈에 띄게 성장한 안무가 또한 아직 볼 수 없지만 신진 무용가들에게 무대를 제공하여 육성하겠다는 좋은 취지와 의도에 무게를 더 두고 무대를 죽 지켜보고 있다. 좋은 인재가 등장하여 성장하기를 기다리며.
올해 무대의 문제점을 짚는 이유. 그 문제라는 것이 이번 일회성에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형태로 대구무용계 곳곳에서 불거져 나올 전조현상이라는 데 걱정이 있다. 계속되면 눈 밝은 관객과 무용인들이 알아차릴 것이고 거듭 말하면 종내는 바뀔(?) 것이라 기대한다.
이러한 문제제기에도 변화가 없다면, 이 모든 말이 무슨 소용일까 싶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