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24회 신인춤제전 젊고 푸른 춤꾼 한마당
지역의 춤 작가 등용문
송성아_춤 이론, 부산대 강사
젊고 푸른 그들은 무엇을 전달하는가
액자식의 프로시니엄 무대, 삼면의 돌출무대, 광장과 거리의 열린 무대 등에서 펼쳐지는 춤은 일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발신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에서부터 사회적, 존재론적 물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형상화에 있어서도 재현에 주안점을 둔 것도 있고, 추상에 강조점을 둔 것도 있으며, 관객은 수동적 수신자이기도 하고,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기도 한다. 이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작가는 자신의 언표를 명료화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작품의 소재, 제재(subject-matter), 주제(subject) 등에 대한 사려 깊은 고민과 내용을 구체화 할 표현력 확보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지난 4월 6일에서 8일까지 삼일 간 제24회 신인춤제전 젊고 푸른 춤꾼 한마당(예술감독: 채희완)이 부산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진행되었다. 1995년 무용학과 졸업작품 6편으로 시작된 춤판은 해마다 작품 선정위원회가 졸업작품 중 우수작품을 1차로 선정하고, 두 달간 세 차례의 오디션을 거쳐 마련된다. 24년 동안 지속적 · 연례적으로 기획된 이것은 지역의 춤 작가 등용문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의 지속적인 활동의 장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공연은 대학을 막 졸업한 새내기그룹(젊은 팀)과 20, 30대의 선배그룹(푸른 팀)으로 구성된다.
올해 춤판은 젊은 7팀과 푸른 8개 팀으로 꾸러졌다. 소재를 중심으로 분류하면, 개인의 일상과 심리적 정황에 주목하는 작품, 개인을 넘어 집단과 사회에 주목하는 작품, 구도(求道)의 과정을 그리는 작품 등이 있었다. 춤 사회에 새롭게 진입하는 젊고 푸른 그들이 전달하는 것은 무엇인가?
올해 춤판은 젊은 7팀과 푸른 8개 팀으로 꾸러졌다. 소재를 중심으로 분류하면, 개인의 일상과 심리적 정황에 주목하는 작품, 개인을 넘어 집단과 사회에 주목하는 작품, 구도(求道)의 과정을 그리는 작품 등이 있었다. 춤 사회에 새롭게 진입하는 젊고 푸른 그들이 전달하는 것은 무엇인가?
집단 또는 사회적 이슈에 주목한 작품들
집단 또는 사회적 이슈에 주목하는 작품은 이혜리의 〈同樂〉, 박연정의 〈왜?〉, 김유진과 정예주의 〈접촉〉, 김소정의 〈찌질이들의 세상〉, 최재호의 〈다들 그렇게 살아요〉, 송민지와 이효은의 〈ma'am〉, 변예진의 〈너희 마을은 안녕하니?〉 등 7편이다. 이 중 전체 공연의 첫 포문을 연 이혜리의 〈동락〉은 현대인의 공존(共存)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일반 언어에서 공존은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이 함께 존재함’ 또는 ‘서로 도와 함께 존재함’으로 정의된다.
작품은 크게 3개의 장면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장면1)에서 4명의 춤꾼은 함께 하지만 각기 다른 경로(path)를 그리며 이동하고, 빠르고 분절된 움직임을 지속한다. 이를 통해 개별화된 개인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각각은 기계의 부품과 같고, 관계 짓기는 없다.
장면2)에서 넷은 느린 템포로 둘씩 무리를 짓고, 큰 원형 경로를 그리며 하나의 틀 속에서 양립한다. 둘은 만나지 못한 채 부류하고, 무대 하수 뒤편에 위치한 아크릴 박스에 그림을 그린다. 각기 다른 얼굴들이 하나의 얼굴로 재조합된 그림은 큐비즘(Cubism)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공존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2)는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존재하지만, 정서적 교감이나 믿음이 부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3)에서 춤꾼들은 파랑색 겉옷을 벗는다. 이어 적극적으로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하나로 뒤엉키고, 대열을 지어 함께 이동한다. 이를 통해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이혜리는 성실한 장면 구성을 통해 공존의 3가지 단면을 명확히 제시한다. 특히, 댄서들의 진지한 몰입 속에 전개된 춤은 신진다운 활력으로 가득했고, 관절을 접고 펴며 다채롭게 진행되는 움직임은 신선하다. 그러나 각기 다른 공존에서 개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섬세하게 표출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박연정의 〈왜?〉는 집단과 개인의 관계를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전체적 통일성을 강요하는 집단과 차이를 갖는 개인이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함께 진화(進化)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2명의 남성춤꾼과 1명의 여성춤꾼을 등장시켜 격렬한 움직임을 전개하고, 오락이나 격투기를 연상시키는 마임을 삽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재료, 즉 주제적 소재라 할 수 있는 제재(題材)가 모호하므로 작가의 의도나 주제를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소정의 〈찌질이들의 세상〉은 경쟁사회에서 실패한 루저(loser)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이들의 축제를 그린다. 솔로에서 시작된 춤은 4명의 춤꾼들과 함께 다양한 대형으로 이어지고, 일상적 몸짓을 리듬화한 움직임이 유쾌하게 펼쳐진다.
아웃사이더들의 축제라는 발상이 신선하였고, 재기발랄한 제스처(gesture)는 관객의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삼면이 객석으로 둘러 싸여진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한 면만을 의식한 장면구성이었다. 동작구성에 있어서도 다양한 신체부위를 활용하지 못한 채, 주로 팔다리만을 사용함으로써 다채롭고 입체적인 움직임을 구축해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김유진과 정예주의 〈접촉〉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주목하며, 2개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전반부는 두 댄서가 제각각 움직이는 것이고, 후반부는 서로를 터치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안무자의 의도는 접촉을 통해 각각의 차이가 보다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다소간 생경하고 모호한 이것을 각각의 움직임과 경로, 무미건조한 컨택(contact) 등에서 확인해보기 어려웠다.
최재호의 〈다들 그렇게 살아요〉는 솔로 춤이다. 청년실업을 소재로 하고, 3개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장면1)은 긴 넥타이를 맨 청년이 등장하면서 시작되고, 여러 영화의 조합된 대사가 쉼 없이 쏟아진다. 낮고 차분하게 또는 높고 격앙된 목소리로 꿈이란 사치이고, 성공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개발을 해야 하며, 인생이란 각자도생(各自圖生)일 뿐이라고 말한다.
장면2)는 침묵하던 청년의 슬픔과 분노가 표출되는 부분이다. 장면3)은 다시 전쟁 같은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청년은 개줄에 묶여 끌려가는 듯하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참여한 최재호는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고, 군더더기 없는 작품 구성으로 청년실업의 문제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슬픔과 분노 표현이 오래된 동작구성법에 의존함으로써 작품은 진부해졌고, 관객의 몰입은 반감되었다.
송민지와 이효은의 〈ma'am〉은 듀엣 춤이다. 여성억압의 가부장제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3개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장면1)은 한 여자가 널브러지듯 의자에 앉은 또 다른 여자를 끌고 나와서, 무대 중앙에 정좌(正坐)시킨 다음 퇴장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2)에서 남겨진 여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남성적이고 거친 춤을 춘다. 그리고 퇴장했던 여자가 재등장하여 거친 춤을 춘 여자의 내력을 이야기하며 춤을 춘다. 대사는 여자가 가족을 위해 헌신하였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하였으나, 세상은 그녀를 독한 여자로 비하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마지막 장면3)은 두 여자가 함께 춤을 추는 것이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송민지와 이효은은 3개의 장면을 통해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를 고발한다. 그런데 의욕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구조에 의해 억압된 여성성이 무엇인지 불투명하다. 즉, 희생 속에서 억압된 것 또는 독한 여자로 비하되면서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 이로써 작품 마지막에 두 여자가 함께 추는 춤은 모호하게 다가서며, 주제는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한다.
변예진의 〈너희 마을은 안녕하니?〉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소재로 삼는다. 솔로 춤이고, 2개의 장면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전반부에서 춤꾼은 양은냄비를 머리에 쓰고, 우산을 들고 있다. 소품은 철모와 총을 연상시키고, 낮은 포복을 하듯 이리저리 기어 다닌다. 가볍고 유쾌한 팝음악에 맞춘 마임풍의 움직임이 한동안 이어가다가, 상수 앞에서 멈춰 선다. 그녀는 객석을 향해 총구를 겨누지만, 총은 자꾸만 돌아와 자신을 겨냥한다.
후반부에서 춤꾼은 실제 군대에서 실시되는 ‘새천년 생명체조’를 중심으로 움직임을 엮어간다. 지난 정부에서 만들어진 이것은 핵폭발에 대처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각종 사이트에서 동영상과 함께 유통된다. 〈너희 마을은 안녕하니?〉는 동영상의 내레이션을 그대로 사용하는데, “핵폭발 시 군인들이 하는 동작입니다. 폭발지점을 등지고 원을 크게 그리며 숨을 고릅니다. 엄지손가락으로 양귀를 막습니다”와 같은 동작 설명이다.
작가는 두 장면을 통해 전쟁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음을 경고하고자 한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고 핵폭발이 일어났다고 가정할 때, 폭발지점을 등지고 숨을 고르라고 하는 ‘새천년 생명체조’는 난센스(nonsense)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를 넘어 세계사적 문제이기도 한 전쟁에 대한 언표를 명시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무게에 걸맞은 고민과 성찰이 전제되어야 하며, 적확한 소재와 제재가 선택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작품은 크게 3개의 장면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장면1)에서 4명의 춤꾼은 함께 하지만 각기 다른 경로(path)를 그리며 이동하고, 빠르고 분절된 움직임을 지속한다. 이를 통해 개별화된 개인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각각은 기계의 부품과 같고, 관계 짓기는 없다.
장면2)에서 넷은 느린 템포로 둘씩 무리를 짓고, 큰 원형 경로를 그리며 하나의 틀 속에서 양립한다. 둘은 만나지 못한 채 부류하고, 무대 하수 뒤편에 위치한 아크릴 박스에 그림을 그린다. 각기 다른 얼굴들이 하나의 얼굴로 재조합된 그림은 큐비즘(Cubism)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공존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2)는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존재하지만, 정서적 교감이나 믿음이 부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3)에서 춤꾼들은 파랑색 겉옷을 벗는다. 이어 적극적으로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하나로 뒤엉키고, 대열을 지어 함께 이동한다. 이를 통해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이혜리는 성실한 장면 구성을 통해 공존의 3가지 단면을 명확히 제시한다. 특히, 댄서들의 진지한 몰입 속에 전개된 춤은 신진다운 활력으로 가득했고, 관절을 접고 펴며 다채롭게 진행되는 움직임은 신선하다. 그러나 각기 다른 공존에서 개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섬세하게 표출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박연정의 〈왜?〉는 집단과 개인의 관계를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전체적 통일성을 강요하는 집단과 차이를 갖는 개인이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함께 진화(進化)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2명의 남성춤꾼과 1명의 여성춤꾼을 등장시켜 격렬한 움직임을 전개하고, 오락이나 격투기를 연상시키는 마임을 삽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재료, 즉 주제적 소재라 할 수 있는 제재(題材)가 모호하므로 작가의 의도나 주제를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소정의 〈찌질이들의 세상〉은 경쟁사회에서 실패한 루저(loser)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이들의 축제를 그린다. 솔로에서 시작된 춤은 4명의 춤꾼들과 함께 다양한 대형으로 이어지고, 일상적 몸짓을 리듬화한 움직임이 유쾌하게 펼쳐진다.
아웃사이더들의 축제라는 발상이 신선하였고, 재기발랄한 제스처(gesture)는 관객의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삼면이 객석으로 둘러 싸여진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한 면만을 의식한 장면구성이었다. 동작구성에 있어서도 다양한 신체부위를 활용하지 못한 채, 주로 팔다리만을 사용함으로써 다채롭고 입체적인 움직임을 구축해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김유진과 정예주의 〈접촉〉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주목하며, 2개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전반부는 두 댄서가 제각각 움직이는 것이고, 후반부는 서로를 터치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안무자의 의도는 접촉을 통해 각각의 차이가 보다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다소간 생경하고 모호한 이것을 각각의 움직임과 경로, 무미건조한 컨택(contact) 등에서 확인해보기 어려웠다.
최재호의 〈다들 그렇게 살아요〉는 솔로 춤이다. 청년실업을 소재로 하고, 3개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장면1)은 긴 넥타이를 맨 청년이 등장하면서 시작되고, 여러 영화의 조합된 대사가 쉼 없이 쏟아진다. 낮고 차분하게 또는 높고 격앙된 목소리로 꿈이란 사치이고, 성공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개발을 해야 하며, 인생이란 각자도생(各自圖生)일 뿐이라고 말한다.
장면2)는 침묵하던 청년의 슬픔과 분노가 표출되는 부분이다. 장면3)은 다시 전쟁 같은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청년은 개줄에 묶여 끌려가는 듯하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참여한 최재호는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고, 군더더기 없는 작품 구성으로 청년실업의 문제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슬픔과 분노 표현이 오래된 동작구성법에 의존함으로써 작품은 진부해졌고, 관객의 몰입은 반감되었다.
송민지와 이효은의 〈ma'am〉은 듀엣 춤이다. 여성억압의 가부장제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3개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장면1)은 한 여자가 널브러지듯 의자에 앉은 또 다른 여자를 끌고 나와서, 무대 중앙에 정좌(正坐)시킨 다음 퇴장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2)에서 남겨진 여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남성적이고 거친 춤을 춘다. 그리고 퇴장했던 여자가 재등장하여 거친 춤을 춘 여자의 내력을 이야기하며 춤을 춘다. 대사는 여자가 가족을 위해 헌신하였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하였으나, 세상은 그녀를 독한 여자로 비하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마지막 장면3)은 두 여자가 함께 춤을 추는 것이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송민지와 이효은은 3개의 장면을 통해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를 고발한다. 그런데 의욕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구조에 의해 억압된 여성성이 무엇인지 불투명하다. 즉, 희생 속에서 억압된 것 또는 독한 여자로 비하되면서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 이로써 작품 마지막에 두 여자가 함께 추는 춤은 모호하게 다가서며, 주제는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한다.
변예진의 〈너희 마을은 안녕하니?〉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소재로 삼는다. 솔로 춤이고, 2개의 장면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전반부에서 춤꾼은 양은냄비를 머리에 쓰고, 우산을 들고 있다. 소품은 철모와 총을 연상시키고, 낮은 포복을 하듯 이리저리 기어 다닌다. 가볍고 유쾌한 팝음악에 맞춘 마임풍의 움직임이 한동안 이어가다가, 상수 앞에서 멈춰 선다. 그녀는 객석을 향해 총구를 겨누지만, 총은 자꾸만 돌아와 자신을 겨냥한다.
후반부에서 춤꾼은 실제 군대에서 실시되는 ‘새천년 생명체조’를 중심으로 움직임을 엮어간다. 지난 정부에서 만들어진 이것은 핵폭발에 대처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각종 사이트에서 동영상과 함께 유통된다. 〈너희 마을은 안녕하니?〉는 동영상의 내레이션을 그대로 사용하는데, “핵폭발 시 군인들이 하는 동작입니다. 폭발지점을 등지고 원을 크게 그리며 숨을 고릅니다. 엄지손가락으로 양귀를 막습니다”와 같은 동작 설명이다.
작가는 두 장면을 통해 전쟁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음을 경고하고자 한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고 핵폭발이 일어났다고 가정할 때, 폭발지점을 등지고 숨을 고르라고 하는 ‘새천년 생명체조’는 난센스(nonsense)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를 넘어 세계사적 문제이기도 한 전쟁에 대한 언표를 명시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무게에 걸맞은 고민과 성찰이 전제되어야 하며, 적확한 소재와 제재가 선택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개인의 일상과 심리적 정황을 묘사한 작품들
개인의 일상과 심리적 정황을 묘사하는 작품은 김평수의 〈칠전팔기〉, 김승환의 〈덮어두다〉, 김유성의 〈오늘 하루도 맑음〉, 김동윤의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 정혜원의 〈혜, 바라기〉, 강건의 〈하루의 잔상〉, 장승연의 〈걱정이 없으면 걱정이 없겠네〉 등 7편이다.
김평수의 〈칠전팔기〉는 문둥북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솔로 춤이다. 고성 · 통영 · 진주 · 가산 오광대와 동래야류의 레퍼토리 중 하나인 이것은 사회적 죽임에 의해 불구가 된 사람이 참된 살림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그리는 인간해방의 춤이다. 여기서 문둥이는 노름도 하고, 판돈을 훔쳐간 병자를 용서하기도 한다. 또는 추수 후 떨어진 보리 낟알을 주워 먹으며 신세 한탄을 하다가도 이내 훌훌 털고 일어서는 인물로 비극과 희극이 공존한다. 김평수는 문둥북춤의 몇몇 동작을 원용하고 있으며, 3개의 장면을 중심으로 얼개를 마련한다.
장면1)은 문둥이북춤의 구부러진 팔 동작과 절뚝거리는 다리 동작을 이용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의 지극한 슬픔과 눈물을 보여준다. 장면2)는 눈물을 딛고 일어섰다가 이내 넘어지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현대인의 도전과 실패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면3)은 칠전팔기 끝에 마침내 일어선 기쁨을 드라마틱한 음악에 맞춰 춤추는 대목이다.
서른 초입의 김평수는 좋은 재료를 가진 댄서가 아니다. 그러나 움직임 표현력이 풍부하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는 힘이 있다. 또한 작년의 출품작이었던 〈반성문〉에서 〈칠전팔기〉에 이르기까지 오늘을 사는 개인의 모습을 명확한 작품구성을 통해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경우, 슬픔의 원인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그의 도전과 성공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다소간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김승환의 〈덮어두다〉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불 뺏기를 소재로 삼는다. 두 남녀는 이불을 덮고, 빼앗기고, 다시 뺏기를 반복한다. 행위들 사이사이에서 다양하게 형태로 변주되는 움직임은 젊고 싱그러우며 활기차다. 엔딩에서 둘은 싸움을 멈추고 함께 이불을 덮는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큰 천이 무대 전면을 덮어준다.
작가는 싸움의 끝에서 시시비비를 따져 승패를 결론짓지 않는다. 대신 문제를 잠시 덮어두고, 잠을 청한다. 비단 이 경우뿐만 아니라, 문제를 파헤치고 까발리기보다는 덮어두고 가는 것이 보다 현명할 때가 있다. 일상을 옮겨온 〈덮어두다〉는 또 다른 일상을 반추(反芻)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다만, 작품의 주요소품인 이불의 활용이 아쉽다. 작품에서 소품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성격이 입체적일 때 작품의 깊이가 더해지듯, 소품의 변용 또한 필요하다. 〈덮어두다〉에서 이불은 싸움을 매개하는 하나의 역할만을 하였고, 덮고, 뺏고, 내팽개쳐질 뿐이다. 무대 전면을 덮는 큰 천을 마지막에 추가하는 것보다, 재기발랄한 변용이 보다 작품을 재미있고, 풍성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 터이다.
김유성의 〈오늘 하루도 맑음〉은 친구인지 연인인지 관계가 모호한 두 남녀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음악에 따라 두 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매우 빠른 인도음악이 나오는 것이 전반부이고, 속도가 조금 느려진 일본음악이 나오는 것이 후반부이다. 남녀 춤꾼은 인도풍의 옷을 입고, 시종일관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여기서 둘의 관계나 심리적 정황은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매체인 움직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키네스피어(kinesphere)는 보다 다채롭게 조직화되어야 했고, 에너지는 다양하게 변주되어야 했다. 재현도 추상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 설정으로 인해 작품의 내용과 주제는 매몰되었다.
김동윤의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소재로 삼고 있다. 2개의 장면으로 구성되는데, 전반부는 한 남자가 운전을 해서 어딘가에 도착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후반부는 남녀 이인무로 ‘가족사진’이란 노래에 맞춰 진행된다. 가수 김진호가 부른 이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홀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한 것으로 노랫말과 멜로디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전반부는 상황설정이고, 핵심적 내용은 남녀 듀엣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인무는 음악의 감성에 기댄 의미 없는 움직임의 나열일 뿐, 일정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다. 이로써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은 춤이 아니라 노랫말에 의해 전달되고, 춤은 음악을 보조하는 시각적 장식물로 남게 된다.
정혜원의 〈혜, 바라기〉는 솔로 춤으로 집착(執着)을 소재로 한다.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춤꾼은 무대 하수 앞을 향해 특정 프레이즈(phrase)를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이를 통해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음을 쉬이 알려준다. 그런데 아래를 향해 툭 떨어졌다가 천천히 온몸을 펴고, 다시 오열하듯 얼굴을 감싸는 프레이즈를 통해 집착의 대상이 옛 사랑인지, 친구인지, 혹은 물건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또한 이것이 정서적인 변화 없이 하나의 톤으로 반복됨으로써 집착하는 여자의 심리적 정황이 세밀하게 표현되지 못하였다. 그녀의 집착은 막연하고, 무색무취(無色無臭)이다.
강건의 〈하루의 잔상〉는 의식과 무의식 또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장승연의 〈걱정이 없으면 걱정이 없겠네〉는 걱정과 안도감이란 정서를 소재로 삼는다. 두 작가는 지극히 심리적인 내용을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의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적 이미지나 정서를 창출해 내지 못함으로써 관객에게 자신의 발언을 전달하는데 실패한다.
김평수의 〈칠전팔기〉는 문둥북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솔로 춤이다. 고성 · 통영 · 진주 · 가산 오광대와 동래야류의 레퍼토리 중 하나인 이것은 사회적 죽임에 의해 불구가 된 사람이 참된 살림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그리는 인간해방의 춤이다. 여기서 문둥이는 노름도 하고, 판돈을 훔쳐간 병자를 용서하기도 한다. 또는 추수 후 떨어진 보리 낟알을 주워 먹으며 신세 한탄을 하다가도 이내 훌훌 털고 일어서는 인물로 비극과 희극이 공존한다. 김평수는 문둥북춤의 몇몇 동작을 원용하고 있으며, 3개의 장면을 중심으로 얼개를 마련한다.
장면1)은 문둥이북춤의 구부러진 팔 동작과 절뚝거리는 다리 동작을 이용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의 지극한 슬픔과 눈물을 보여준다. 장면2)는 눈물을 딛고 일어섰다가 이내 넘어지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현대인의 도전과 실패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면3)은 칠전팔기 끝에 마침내 일어선 기쁨을 드라마틱한 음악에 맞춰 춤추는 대목이다.
서른 초입의 김평수는 좋은 재료를 가진 댄서가 아니다. 그러나 움직임 표현력이 풍부하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는 힘이 있다. 또한 작년의 출품작이었던 〈반성문〉에서 〈칠전팔기〉에 이르기까지 오늘을 사는 개인의 모습을 명확한 작품구성을 통해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경우, 슬픔의 원인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그의 도전과 성공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다소간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김승환의 〈덮어두다〉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불 뺏기를 소재로 삼는다. 두 남녀는 이불을 덮고, 빼앗기고, 다시 뺏기를 반복한다. 행위들 사이사이에서 다양하게 형태로 변주되는 움직임은 젊고 싱그러우며 활기차다. 엔딩에서 둘은 싸움을 멈추고 함께 이불을 덮는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큰 천이 무대 전면을 덮어준다.
작가는 싸움의 끝에서 시시비비를 따져 승패를 결론짓지 않는다. 대신 문제를 잠시 덮어두고, 잠을 청한다. 비단 이 경우뿐만 아니라, 문제를 파헤치고 까발리기보다는 덮어두고 가는 것이 보다 현명할 때가 있다. 일상을 옮겨온 〈덮어두다〉는 또 다른 일상을 반추(反芻)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다만, 작품의 주요소품인 이불의 활용이 아쉽다. 작품에서 소품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성격이 입체적일 때 작품의 깊이가 더해지듯, 소품의 변용 또한 필요하다. 〈덮어두다〉에서 이불은 싸움을 매개하는 하나의 역할만을 하였고, 덮고, 뺏고, 내팽개쳐질 뿐이다. 무대 전면을 덮는 큰 천을 마지막에 추가하는 것보다, 재기발랄한 변용이 보다 작품을 재미있고, 풍성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 터이다.
김유성의 〈오늘 하루도 맑음〉은 친구인지 연인인지 관계가 모호한 두 남녀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음악에 따라 두 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매우 빠른 인도음악이 나오는 것이 전반부이고, 속도가 조금 느려진 일본음악이 나오는 것이 후반부이다. 남녀 춤꾼은 인도풍의 옷을 입고, 시종일관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여기서 둘의 관계나 심리적 정황은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매체인 움직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키네스피어(kinesphere)는 보다 다채롭게 조직화되어야 했고, 에너지는 다양하게 변주되어야 했다. 재현도 추상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 설정으로 인해 작품의 내용과 주제는 매몰되었다.
김동윤의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소재로 삼고 있다. 2개의 장면으로 구성되는데, 전반부는 한 남자가 운전을 해서 어딘가에 도착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후반부는 남녀 이인무로 ‘가족사진’이란 노래에 맞춰 진행된다. 가수 김진호가 부른 이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홀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한 것으로 노랫말과 멜로디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전반부는 상황설정이고, 핵심적 내용은 남녀 듀엣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인무는 음악의 감성에 기댄 의미 없는 움직임의 나열일 뿐, 일정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다. 이로써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은 춤이 아니라 노랫말에 의해 전달되고, 춤은 음악을 보조하는 시각적 장식물로 남게 된다.
정혜원의 〈혜, 바라기〉는 솔로 춤으로 집착(執着)을 소재로 한다.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춤꾼은 무대 하수 앞을 향해 특정 프레이즈(phrase)를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이를 통해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음을 쉬이 알려준다. 그런데 아래를 향해 툭 떨어졌다가 천천히 온몸을 펴고, 다시 오열하듯 얼굴을 감싸는 프레이즈를 통해 집착의 대상이 옛 사랑인지, 친구인지, 혹은 물건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또한 이것이 정서적인 변화 없이 하나의 톤으로 반복됨으로써 집착하는 여자의 심리적 정황이 세밀하게 표현되지 못하였다. 그녀의 집착은 막연하고, 무색무취(無色無臭)이다.
강건의 〈하루의 잔상〉는 의식과 무의식 또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장승연의 〈걱정이 없으면 걱정이 없겠네〉는 걱정과 안도감이란 정서를 소재로 삼는다. 두 작가는 지극히 심리적인 내용을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의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적 이미지나 정서를 창출해 내지 못함으로써 관객에게 자신의 발언을 전달하는데 실패한다.
구도의 과정을 그린 작품
현대 뇌 과학은 뇌와 육체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있음을 증명한다. 또한 몸을 전신두뇌(全身頭腦)로 정의하며, 생존과 생활을 위해 사용된 몸짓이 인류 의식 발전의 결정적 원동력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주안점을 둘 때, 춤추는 행위는 육체적 사유인 동시에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지혜의 〈묘오〉는 이러한 춤의 본질을 소재로 삼고 있다.
작품은 솔로 춤으로 진행되며, 한손에 바라를 들고 있다. 간간히 민속춤의 동작을 삽입시키기도 하고, 바라를 쳐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를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소재가 주는 무게에 걸맞은 넓고 깊은 고민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형상화에 있어서도 참선이나 바라를 이용하는 도식화된 문법을 버리고, 새롭고 참신한 접근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구도의 과정을 그리는 작품 중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는 홍신자의 작업들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인류의 춤은 누구나 추는 만인의 것이었고, 삶의 현장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추어졌다. 이 모든 춤의 궁극적인 주제는 몰아지경(沒我之境)의 황홀경이었고, 전제조건은 환희용약(歡喜踊躍)하고 고무진신(鼓舞振身)하는 지극한 몸 바침이었다. 계급이 분화하면서 만인을 대신하는 직업댄서가 출현하였고, 보여주는 춤의 시대로 이행하였다. 그리고 20세기 초, 예술로서 춤은 비음성적 언어(nonverbal language)로 간주되었고, 정보전달의 기능이 부각되었다.
오늘날에도 댄서라면 누구나 다 몰입의 최고조에서 맛보는 충일한 희열을 갈구한다. 이 점에서 춤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전해진다고 할 수 있다. 제24회 신인춤제전에 참여한 신진작가들은 언표를 명시함에 있어 크고 작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제재가 부재하거나, 모호한 경우가 적지 않아서 작품의 형식ㆍ내용ㆍ주제 파악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댄서들의 지극한 몰입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관객들을 집중시켰고, 희열감은 공유되었다. 여기서 젊고 푸른 그들의 보다 진전된 다음을 예감해 볼 수 있었다.
지역의 춤 작가 등용문인 신인춤제전은 두 번의 오디션 과정을 통해 응모자와 심사자가 함께 작품에 대해 논의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여타의 춤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수평적 협업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이 같은 노력이 새롭게 검토되고 강화됨으로써 젊고 푸른 그들의 뜨거움이 선연하고 명확한 언표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작품은 솔로 춤으로 진행되며, 한손에 바라를 들고 있다. 간간히 민속춤의 동작을 삽입시키기도 하고, 바라를 쳐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를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소재가 주는 무게에 걸맞은 넓고 깊은 고민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형상화에 있어서도 참선이나 바라를 이용하는 도식화된 문법을 버리고, 새롭고 참신한 접근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구도의 과정을 그리는 작품 중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는 홍신자의 작업들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인류의 춤은 누구나 추는 만인의 것이었고, 삶의 현장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추어졌다. 이 모든 춤의 궁극적인 주제는 몰아지경(沒我之境)의 황홀경이었고, 전제조건은 환희용약(歡喜踊躍)하고 고무진신(鼓舞振身)하는 지극한 몸 바침이었다. 계급이 분화하면서 만인을 대신하는 직업댄서가 출현하였고, 보여주는 춤의 시대로 이행하였다. 그리고 20세기 초, 예술로서 춤은 비음성적 언어(nonverbal language)로 간주되었고, 정보전달의 기능이 부각되었다.
오늘날에도 댄서라면 누구나 다 몰입의 최고조에서 맛보는 충일한 희열을 갈구한다. 이 점에서 춤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전해진다고 할 수 있다. 제24회 신인춤제전에 참여한 신진작가들은 언표를 명시함에 있어 크고 작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제재가 부재하거나, 모호한 경우가 적지 않아서 작품의 형식ㆍ내용ㆍ주제 파악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댄서들의 지극한 몰입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관객들을 집중시켰고, 희열감은 공유되었다. 여기서 젊고 푸른 그들의 보다 진전된 다음을 예감해 볼 수 있었다.
지역의 춤 작가 등용문인 신인춤제전은 두 번의 오디션 과정을 통해 응모자와 심사자가 함께 작품에 대해 논의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여타의 춤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수평적 협업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이 같은 노력이 새롭게 검토되고 강화됨으로써 젊고 푸른 그들의 뜨거움이 선연하고 명확한 언표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송성아
춤이론가. 무용학과 미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전통춤 형식의 체계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한국전통춤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한국전통춤 구조의 체계적 범주와 그 예시』(2016)가 있다. 현재, 부산대학교와 경상대학교에서 현대문화이론과 전통춤분석론을 강의하고 있다.
춤이론가. 무용학과 미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전통춤 형식의 체계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한국전통춤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한국전통춤 구조의 체계적 범주와 그 예시』(2016)가 있다. 현재, 부산대학교와 경상대학교에서 현대문화이론과 전통춤분석론을 강의하고 있다.
2018.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