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7 ACC 아시아 무용커뮤니티 특별 프로그램 〈Here There〉
조금은 느슨해도 좋았을 과도한 증류
이지현_춤비평가
 오랜만에 ‘아시아의 춤’이라는 주제로 작품이 탄생했다(12월 3~4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 2). 2011년 만들어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아시아무용위원회(커뮤니티)를 통해 아시아무용단이 창단되었고, 올해로 3회째 공연인데 작년에 임지애 안무 〈Golden Age〉 이후 해를 거르지 않고 1년 만에 새 작품이 공연된 것을 보면 그간 조금은 불안정해 보였던 지속성이 조금씩 갖춰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애순 예술감독/안무(드라마투르그 김재리, 리허설 디렉터 황수현)의 이 작품은 사실 2016년 11월 국립국악원 무용수들과 함께 ‘강강술래’를 가지고 만들었던 〈강가앙수울래애〉의 연작 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기본 제작팀은 대동소이하고, 출연자가 국립국악원 무용수에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10개국의 무용수 17명으로 바뀐 것으로, 안애순 안무의 강강술래 ACC(국립아시아문화전당) 버전으로 볼 수 있다.


 

 

 흰색으로 통일된 상의, 하의로 나뉜 다양한 모양의 편안한 복장을 한 여성무용수 17명이 흰색 무대에 하나씩 매우 조용히 등장하면서 춤을 풀어내자 무대에는 그녀들의 검은 머리 색과 흑갈색으로 보이는 피부 톤이 도드라져 보인다.
 마치 아시아라는 현실의 대지가 아닌 가상의 ‘아시아성’(asianess)이라는 영토에 도착한 것처럼 혹은 그들의 배려 받지 못한 갈색 피부와 흰색 톤은 마치 아시아를 배려하지 않고 진행된 서구중심의 근대화 파도 속의 아시아처럼, 섬처럼 고독하다.
 어쨌든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이 흰색인 이 작품의 톤은 끝날 때까지 환경 변화를 허락하지 않고 지속되는데 이 흰색은 때론 그들의 춤을 돋보이게 하는 백지이기도 하면서 때론 매우 차갑게 몸―그것도 몸의 대부분을 가린 얼굴과 팔다리만의― 밖의 고정된 환경이다.
 춤이 진행되면서 몸들은 조금씩 자기 전통춤의 움직임으로 흰색의 무대를 비집고 나온다. 그러나 결코 그것은 본론으로는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아시아 각국의 협업작품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각국 고유의 냄새는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한국 8명, 말레이지아 2명을 제외하고는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인도, 대만, 홍콩, 일본의 각 1명씩인 17의 몸들은 전통춤으로 훈련된 무용수와 현대춤 무용수가 섞여 있으며 모두 무대에 잘 훈련된 몸을 갖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만의 전통춤을 드러내는 장면의 힘은 약하다. 말하자면 아시아 각국이지만 1명씩 들어와 있는 경우가 많고, 흰색의 현대적 의상으로 각국의 색을 없앴으며, 전통과는 굳이 관계없는 현대춤 무용수들이 많이 포진해있는 상태에서 전통의 느낌이 도드라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이들은 다른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어느 순간 바닥에 앉기 시작한 여성들은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서구식의 무대에 쭉 둘러 않아 몸을 다른 방향으로 놓고 다른 자세로 동시에 함께 박자를 만들어 가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렇게 리듬을 만들고 잠시 틀에서 벗어난 듯 자유롭게 카오스를 만들지만 그것 역시 어떤 ‘제의의 극점’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다시 일어나 다른 어딘가를 향해 간다. 강강술래,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 됨으로는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 전통이지만 우리의 현재에조차 낯설게 되어버린 강강술래를 소환해 와서 이질적인 것들을 담아보려는 것이 단숨에 될 수 있다고 우긴다면 그것도 억지일 것이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을 허락받고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전통을 현재로 가져오되 그 “원형이 변형되면서 지속될 것”이라는 창작진의 원형보다는 변형에 초점을 둔 입장과 “여기(here)에 서서 거기(there)와 교신하는” 그 “작동하는 힘을 발견하기 위한 제안”의 명확한 입장으로 단단한 버팀목을 마련한 것은 분명하다.
 거기에 전작인 〈강가앙수울래애〉가 있어서 전통을 담고 있는 몸들을 현재와 교신하게 하는 실험을 마친 후라 〈Here There〉는 아시아의 몸들과 강강술래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시간과 공간의 다름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창작진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흔적”의 한발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강강술래를 알고 있으며, 여성이며, 춤을 알고 있는 나는 이 춤의 현장이 매우 감동스러웠다. 그 감동은 강강술래라는 춤을 알고 있기에 가장 큰 의미의 맥락을 잡고 있어서였을 텐데, 이 공연을 보는 외국인 관객에게 강강술래라는 춤에 대한 소개와 맥락과 의미를 설명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과연 이 작품이 온전히 작동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관객뿐 아니라 초청된 해외 프리젠터들이나 비평가들에게도 그런 설명을 충족시킬 어떤 장치도 없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연습과정에서 무용수들과도 강강술래에 대해 공유하고 토론하고 생성해나간 과정이 있었다면 그것을 관객과 공유 가능하도록 내비치는 일―기록하고 전시하는 일―은 이런 프로젝트의 작품이 완성되는 존재 특성이라고 생각된다. 아직은 춤 작품이 작품으로만 파편화되어 존재하는 좋지 않은 습성에 머물러 있다.
 이 작품의 완성은 적어도 무용수가 포함된 각 나라를 돌며 공연될 때 한 호흡이 맺어질 것이다. 강강술래를 모르는 그들에게 강강술래를 통해 새롭게 우리가 놀 수 있는 땅인 ‘아시아성’과 ‘아시아 여성성’을 아시아에서 먼저 ‘공유’하고 ‘경험’하게 하는 과정에서 작품은 성장할 것이다.
 아직은 매우 관념적이고 선언적인 창작진의 호흡이 아시아 현실로 내려와 그것들과 작용할 때에야 “흔적”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강강술래가 가진, 아시아가 가진, 아시아 여성이 가진, 그들의 몸이 가진 그 현재적 의미와 존재방식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선언적이라 지루하고 단조로운 문제, 진정한 작용이 아니라 관념 속에 있는 작용이기에 흘러가면서 질적인 변화를 스스로 낳지 못하는 문제, 무용수들의 몸이 만나고 관계하고는 있지만 그것의 자연스러운 여러 단층을 역동적이고 유기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결핍지점들은 이 작품이 앞으로 어떻게 존재의 시공간 속에서 어떤 ‘작용의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창작진만으로는 갈 수 없는 이 프로젝트의 비어있는 기획력―제작부터 관객 앞에 전시되는 다층적 환경까지―은 앞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더욱 보완하고 함께 하는 관계 속에서 발전되길 기대한다. 
이지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2011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최근 비평집 『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 왕성한 비평 작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서울무용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 02.
사진제공_국립아시아문화전당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