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평자의 입장에서 한국적인 소재의 창작발레 작업은, 당대의 발레작품으로서의 경쟁력과 작품 속에 담아낸 독창적인 콘텐츠의 질을 주목하게 된다.
컨템포러리발레 작품으로서의 경쟁력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예술적인 완성도이고, 독창적인 콘텐츠로서의 잣대는 소재에서부터 음악 의상 무대미술 등 제작진들에 의해 구현된 한국적인 소스(source)들의 조합이다. 그런 점에서 국립발레단의 〈허난설헌-수월경화〉(5월 5-7일 토월극장. 평자 5일 관람)는 초연작임에도 여러 부문에서 나쁘지 않았다.
안무자는 조선시대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삶을 작품화 하면서 그녀가 남긴 두 개의 시를 1막과 2막의 소재로 활용했다. 전체적으로 스토리텔링을 지향하지는 않았지만, ‘감우(感遇)’(느낀 대로 노래한다)와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광상산에서 노닐다)의 시놉시스를 통해 각기 다른 12개의 우리 음악을 배열하면서 등장인물과 이미지들을 설정했다.
허난설헌의 시를 통해 그녀의 삶과 작품을 한국적인 발레로 만들겠다는 안무가의 의도는 작품의 부제로 붙인 ‘수월경화’(水月鏡花, 물에 비친달, 거울에 비친달), 시적인 정취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함을 비유한 이 사자성어를 통해 보다 선명하게 다가온다.
특정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주인공이 남긴 두 편의 시를 바탕으로 한 50분 길이의 한국적 소재의 창작발레 작업은, 그동안 국립발레단이 보여준 임성남 단장 재임 시절 제작된 무용극적인 스타일의 전막 발레, 최태지 단장 재임 시절 시도했던 20분 정도 길이의 소품 위주의 작업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무엇보다 제작진들은 영리했다. 초연 작업에 너무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토월극장의 깊은 무대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무대를 좁게 사용했고, 무대세트는 간결했다. 의상은 디자인과 색감으로 이미지를 표출했고, 영상은 색조와의 균형을 유지했다. 안무가는 스토리텔링을 지양, 두 편의 시를 무용화하는 쪽에 집중, 시에 등장하는 잎, 새, 난초, 부용꽃 등을 솔로 2인무, 4인무, 8인무의 춤으로 조합했다.
안무가가 선곡한 한국의 전통악기를 베이스로 한 창작음악은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춤과 대부분 조화를 이루었다. 음악과 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의상과 조명 무대미술 영상은 시노그라피(scenography)적인 조화로 보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특히 창작발레 작업에서 드물게 맛본 음악과 움직임의 하모니, 중극장에서 만들어내는 조명 의상 무대미술의 조화가 빚어낸 시각적 환타지는 안무자에 의해 창안된 독창적인 움직임과 함께 향후 이 작품이 갖는 탄탄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스타일의 컨템포러리발레 작품을 공연하면서 쌓인 경험 축적(무용수)과 발레단 내부의 안무가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두 편의 소품을 안무했던 경험(안무자)이 이번 작업에 큰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곧 〈허난설헌-수월경화〉의 성공 요인은 비교적 지향점을 분명히 한 안무가의 탄탄한 시놉시스와 출연자들의 축적된 경험, 전체적인 스페이스를 줄이고 춤과 시각적인 임팩트 자체를 음미하도록 한 제작진들의 분명한 콘셉트이다.
창작발레 작업에서 가장 큰 관심은 평자에게는 안무가에 의해 창안된 새로운 움직임의 조합이다. 강효형은 예술적인 완성도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인 이 독창적인 움직임 창안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동안 국립발레단의 공연 레퍼토리에서 자주 대할 수 없었던 상이한 음악과 소재의 차별성에 기인해 만들어진 움직임은 그 자체로 새로운 면면들이 적지 않았다.
안무자가 만들어낸 움직임의 독창성은 팔의 움직임에서 가장 도드라졌다. 스타카토 식으로 분절된 동작과 그것의 연결이 주는 느낌은 확실히 달랐다. 더욱 길게, 팔을 위로 뻗치는 동작이 많았고 이는 클래식 발레에서 보이는 곡선적인 팔의 라인과는 분명 달랐다. 전체적으로 무용수들의 표정연기와 의상 밖으로 노출된 긴 팔과 다리 라인은 좁은 무대 스페이스 안에서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작품 속에서 안무자는 주인공 허난설헌을 화자로 설정했다. 허난설헌 역 신승원, 푸른 난새와 채색 난새를 춤춘 김영규A와 김하림을 비롯해 쉐도우 배민순과 바다를 춤춘 박슬기, 시인의 이상(理想)으로 분한 이재우 등 솔리스트들의 짧은 춤은 풍성함을 더했으나 남녀 2인무에서는 무용수들의 연결 동작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아 파트너십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1막에서 남녀 두 쌍의 댄서들이 보여주는 각각의 2인무와 후에 8인무로 이어진 춤이 여타의 춤과 좀 더 차별화 되지 못한 움직임 구성은 후반부의 군무가 다소 느슨하게 느껴지는 요인이 되었다.
이 작품은 스토리텔링을 지양하고 인물들과 시 속에 나오는 시어들을 춤으로 형상화한 만큼 댄서들에게는 자신의 캐릭터를 어떻게 감정적으로 담아내고 표출하느냐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무용수들은 빠른 템포로 소화해 내야 하는 프레이징 안에서 만만치 않게 변주되는 어려운 동작들을 비교적 무난하게 소화해냈으나 작품 속에서 자신만의 캐릭터로 걸러내어 표출하는 데는 다소 부족했다. 때론 그들의 춤은 감성적으로,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지는 못했고, 댄서들에 의한 독창적인 캐릭터의 부재는 그래서 가장 아쉬웠다.
안무가 강효형의 발견은 그녀가 직업발레단의 현역 단원이란 점에서 더욱 주목하게 된다. 세계 발레계에서 활동하는 유명 안무가들 중 적지 않은 주인공들 대부분이 직업발레단 무용수 출신이란 점은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안무가들과 함께 작업한 경험이 축적되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안무했던 20분 길이의 두 개 작품보다 배로 늘어난 강효형의 이번 창작 작업은 뛰어난 무용수는 많지만 유능한 안무가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다른 춤 장르에 비해 발레 안무가가 빈약한 한국 춤계의 딜레마가 어쩌면 해소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황병기의 음악은 한국의 안무가들에게는 유혹의 대상이다. 현악기로서 가야금이 갖는 음색도 음색이지만 작품 속에 담긴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의 색채가 움직임을 변주하기에는 더없이 활용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장르를 불문하고 여러 명의 안무가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이중에는 음악과 춤의 조합에서 성과를 거둔 작품도 적지 않다.
1막에서 강효형은 황병기의 ‘춘설’을 허난설헌의 솔로춤과 새의 등장 등 느리고 빠른 분위기로 중첩해 활용했고, ‘침향무’는 난초 가지의 자태, 때론 화사하고 고요하지만 때론 바람에 흔들리는 형상과 조우시켰다. 2막에서 안무가는 허난설헌의 마음의 고통을 가야금 대신 거문고 독주(김준영 곡)로 치환시켰다.
〈허난설헌-수월경화〉에서 의상과 병풍처럼 변화하는 무대미술의 기여도 빼놓을 수 없다. 주름진 그린색, 블랙톤의 망사 의상, 푸른 난새 남성 무용수에게 입힌 좌우로 요동치는 푸른 빛 치마의 색감과 허공을 가로지르는 이미지는 강렬했다. 난을 상징한 그린 빛 8인무는 무대 배경막과 무대 천장까지도 그린으로 통일한 치밀함과 연결되어 있다.
춤 창작 작업은 안무가 혼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제작 스태프들과의 협업 작업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허난설헌〉은 의상 무대미술 조명 등 참여 작가들의 성숙된 역량이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에 힘을 더했다.
이 작품은 초연인 만큼 향후의 향방도 관심사이다. 미비점을 보완해 2막 그대로 공연하는 것과 한 개의 장면(프레임)을 더 설정해 3막으로 만들어 작품을 확장시키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3막으로 할 경우는 더 다채로운 우리 음악과 다른 색깔의 한국적인 정서를 녹여낼 수 있을 것이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창작발레 〈심청〉이 1막과 3막과 다르게 2막 용궁장면을 설정해 클래식 발레의 보편성과 함께 디베르티스망적인 요소를 살려내면서 작품의 전체적인 시너지 효과를 상승시킨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토리가 생략된 작품임을 감안할 때 작품 속에 담겨질 독창성과 보편성이 춤과 한국적인 이미지로 보완될 수 있다면 작품의 경쟁력 또한 배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공연이 강수진 예술감독 부임이후 국립발레단에서 처음 시도되는 한국적인 소재의 작업이란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수진 예술감독은 안무가에게 전권을 주었다. 부임 후 새롭게 신설한 몇 개의 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순차적으로 안무가에게 창작 경험을 갖게 했고, 이어 쉽지 않은 작업에 도전할 판을 마련해 주었다. 3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이어진 이 같은 행보가 가시적인 성과를 보임으로써 국립발레단은 메이저 발레단 운영에서 예술감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강하게 인식시켰다.
1984년부터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기자, 편집장으로 20여년 활동했다. 춤비평집 『변동과 전환』 , 『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 등의 저서가 있으며, 〈춤웹진〉 편집장, 서울국제즉흥춤축제 예술감독 등을 맡아 춤 현장과 소통하고 있다. 한예종 숙명여대 겸임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