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장현희·김현태의 신작
고통, 희망의 역설 그리고 달 속의 계수나무
권옥희_춤비평가
 한 이는 ‘닥치라’ 하고, 또 한 이는 ‘개판’이라고 말한다. 6월에 연이어 공연한, 대구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두 중견들의 무대, 장현희의 〈닭:쳐-소음〉과 김현태의 〈개(開)판〉. 제목이 세다.
 사회인식에서 비롯된 고통은 안무가 장현희의 춤의 토대이다. 〈닭:쳐-소음〉에서 본 그녀의 세계는 더 깊어졌고 춤은 유려했다. 그녀에 비해 사회적 의제에 비교적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정직하게 한국춤을 추던 김현태의 작품세계는 은유와 상징의 (누군가의) 치열한 현실을 그려낸 작품이었다.

 

 
 장현희의 〈닭_쳐, 소음〉(6월 17일, 웃는얼굴아트센터). 춤은 고통으로 저리고 반짝였다.
 관객들이 자리를 찾아 앉기도 전에 무대에 쓰러져(엎어져) 있는 남자. 무용수들이 등장, 쓰러진 남자를(처리를) 궁리한다. 소통, 당연히 없다. 이들 또한 곧 넘어지고 깨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다 종내는 남자처럼 죽거나 쓰러질 것이란 것을 안다. 춤은, 팔을 둥글게 말아 만든 욕망의 공간. 팔을 이리저리 굴리고, 들여다보고, 올리고, 끌려간다. 크기를 가늠한 뒤 가슴 속에다 구겨 넣는다. 춤의 의도와 미감이 선명하다.
 무대 한 쪽, 계단을 오르는 이. 끝없이 속삭이고 달래는 듯한 소음(소리). 여자 둘. 오버사이즈의 각진 재킷에 (공주풍의)부풀려진 흰색치마를 입고 그저 가만히 서성이는 여자.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칠판에다 ‘누구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쓴다. 들여다보는 무용수들, 절망을 배운다. 스탠딩 마이크가 서자 앞에 번갈아 서보는 무용수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스스로 닥친 입. 연극적인 요소가 길게 개입, 다소 늘어졌다.
 ‘닭-쳐‘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여자, 그리고 또 한 여자가 드리워놓은 암울한 그림자. 채 사라지지 않는 저 흔적들, 무섭다.

 

 
 겹쳐 서있는 남자, 앞에 선 이의 얼굴에 빨강색 립스틱을 칠한다. 짓이겨진 입술. 각진 움직임. 흰색 재킷을 입은 여자, 아무리 꿈틀거려도 갇힌 몸, 빠져나오지 못한다. 작은 사각 칠판, 그 위에 겹쳐지는 푸른색의 헛된 희망의 또 다른 틀, 바닥에 깔린 큰 사각무대. 가두고 강제하고 규정하는 크고 작은 틀에 갇힌 남자, 여자들. 무대 옆, 안쪽 깊은 곳에서 비추는 조명에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난다. 요란하지 않은 감각적인 조명.
 굽 슈즈 없이 추는 두 남자의 탭댄스. 맨발이다. 남자의 구부린 무릎, 펼쳐든 손, 접힌 팔꿈치 위에 접시를 얹는 여자. 받아들이는 남자. 접시는 사라졌으나 두 팔, 한 다리를 접어 든 채, 정지. 길들이면서 갇히는 관계. 이들을 훔쳐보고, 들여다보는 시선. 한 줄로 늘어선 무용수들의 배치. 서열화 된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춤에 섞여드는 소리, 싹둑싹둑, 쓱, 싹. 사용이 다한 사람을 자르는 섬뜩한 사회를 그려낸 춤.

 

 
 무용수들이 모여 칠판에 글을 쓴다. 다른 이들의 내면을 읽는다. 닥치고. 삶의 고통을 바깥으로 실어 나르는 권준철과 박경아의 춤. 몸으로 서로를 밀어내는 두 커플, 4명의 춤. 무용수가 입은 의상의 색의 농담 차이 뿐, 갈등의 내용은 같다. 마이크 앞에 나와 서 있다가 말없이 그냥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말하고픈 욕망과 입을 닫아야하는 초조감의 사이, 닥친다.
 오버사이즈의 재킷을 입은 이지윤, 온몸이 근육덩어리다. 욕망의 꿈틀거림. 껍데기를 언제 찢고 나올지 모르는 자유의지. 징그러운 욕망 덩어리. 인상적인 춤(몸)이었다.
 남자무용수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헤집는가 하면 여자무용수는 가슴께에 손을 얹고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는다. 두 팔을 허공을 향해 던지고, 또 다른 이(이범근)는 한 다리로 서서 애써 중심을 잡는다.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거듭하며 허공을 향해 온 몸을 던진다. 팔을 뻗어 무언가를 잡아보려 하지만 곧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몸. 눈에 띄는 춤(몸)이다. 독립무용수라 일컫는 이범근의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통증은 눈에 보이고 또 보이지 않기도 하는 내면의 고통이다. 그 고통은 인식이기 이전에 견뎌내야 할 현실이다. 다르게 생각하라고 일러줄만한 사고방식 같은 것, 없다. 설혹 있다 하더라도 고통이 사라지거나 그 원인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하여 춤은 더 아프다.

 

 
 이들이 높은 이상과 꿈을 실현할 날을 희망하고 춤추지만, 어쩌면 춤을 출수록 꿈의 밑바닥, 희망의 본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 설혹 그날이 오지 않더라도 그 본모습에 관해서, 고통과 절망에 관해서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하나?).
 안무가 장현희. 그녀가 세상을 보는 눈은 탭댄스 슈즈 없이 미친 듯 발을 굴려대는 무용수의 맨발에 있으며, 립스틱으로 짓이겨진 얼굴로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는,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는 팔다리의 꺾임에 있다.
 그녀가 춤의 서정으로 표현해내는 고통. 희망을 가지라는 약속을 믿을 수 없기에 절망한다는 것은 곧 약속을 믿고 싶어 하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역설적 결론에 이르는 〈닭_쳐, 소음〉. 구체적이고 이유가 있는 작품이었다.

 

 
 김현태의 〈개(開)판〉(문화예술회관 팔공홀, 6월23일). 춤의 어법이 달라졌다. 주먹을 쥐고 추는 춤. 그가 포기한 한국 춤사위의 섬세한 깊이 밖에서의 새로운 시도는 그 깊이를 채 확보하지 못한 듯하다. 하지만 틀에서 벗어나는 솔직하고 과격한 표현들에 대한 두려움은 벗어버린 춤이었다.
 두 개의 원. 한 원에는 한 명, 또 다른 원에 바라를 머리에 인 세 명이 들어앉아 있다. 군무진이 하나 둘 합류하면서 큰 판이 벌어진다. 30여명의 무용수들, 그들이 서있는 발치에 바라 외짝이 이름표처럼 놓여 있다. 그저 흔들흔들 서툰 막춤으로 여는 ‘개(開)’판이다.
 원이 하나 더 생기고 그 안의 남자들, 7명의 춤. 힘이 느껴지는 춤. 7부 길이와 넓은 바지와 상의를 허리춤에서 매듭을 진 의상. 높이 6미터와 2미터 넓이의, 창살에 한지를 바른 듯한 5대의 큰 문이 무대배경으로 서 있다. 천천히 돌아가는 먹빛,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 앞에서 꿈을 단련하듯, 주먹을 쥔 채 춤을 추는 남자무용수들의 군무. 에너지가 상당하다.
 비스듬히 선 6명과 1명의 춤. 한 사람의 사유에서 여섯 명의 군무로 번지는 춤의 배치. 춤을 풀어내는 구도와 형식이 변했다. 내달리기만 하던 군무가 아니다. 붉은 색 족두리를 들고 추는 여자무용수의 솔로. 족두리를 머리에 얹었다 떨어지면 양손으로 받아 들여다보고, 다시 머리에 얹고 추는 춤, 아름답다.

 

 
 한 무리의 무용수들이 노란색과 빨강색 한지를 들고 들어와 겹치고 접고 겹쳐서 만든 노랑치마, 붉은색 장삼에 흰 한삼. 의상을 여자(편봉화)에게 입힌다. 족두리를 가지고 놀던 여자무용수가 그녀의 머리에 족두리를 얹자 한껏 부풀어 오른 신부.
 둘러싸고 있던 무용수들이 꽃잎이 피듯, 뒤로 일제히 눕더니 신부의 움직임에 따라 밀리듯 앞으로 나와 오케스트라 박스 안으로 떨어져 내린다. 휘휘 팔을 몇 번 감아올리며 춤을 추던 신부를 맞이하러 나온 남자(김현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신부, 그녀의 어깨위에 번갈아 얼굴을 얹어보는 남자.
 바람을 맞은 듯,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치마폭에다 몸을 던지며 파고드는 남자. 뒤로 물러나는 여자. 뒤로 물러나는 여자의 치맛폭을 따라 몸을 던지고, 기어들어보지만 그럴수록 여자는 끝없이 뒤로 물러난다. 달타령의 노래가사가 이어진다. ‘달 속의 계수나무’를 베어 ‘초가삼간 지어 부모 형제 모시고 살아’보자는 언약을 했건, 혹은 하고 싶었건, 이미 깨어진 사랑이거나 깨질 것을 염두에 둔 사랑이야기로 보인다. 치맛자락을 들치고 파고들수록 겹겹이(치마) 그를 해일처럼 덮쳐드는 치맛자락. 문이 열리기를 희구하는 춤. 애틋한 갈망을 안고, 아무런 도리 없이 안타까워할 따름이다. 처절하다.
 김현태, 닫힌 문 앞에서 생각한다. 자연스런 균형이 깨어지는 자리에서 춤추고 있는 자신을 만난다. 이제껏 기운 춤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 작품에서 읽히는 김현태의 위기는 당연히 그 깊이의 위기로 연결된다. 일상이 따라잡을 수 없는 높이로 올려놓았던 ‘은도끼 금도끼’로 다듬어 만든 집에서 ‘천년만년 살고’자 했던 영원한 것을 상념하고 경험할 배경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김현태는 단단함으로, 주먹을 쥐고, 바라를 머리에 이고, 두 손을 버리고, 한 손에 감아쥔 바라로 새로운 춤추기를 시도한다. 벌써 가 있는 자리와 결코 갈 수 없는 자리를 이상하게 겹쳐 놓은 춤추기가 바로 그것이다.

 

 
 안무가의 마음속 저 깊은 밑바닥을 드러내는 이야기구조에 우리가 매혹되기는 쉽지만 그것을 새로운 춤으로 만들기는 또 그만큼 어렵다. 달에 토끼가 살고, 계수나무가 있다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야기,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일들이 또 다른 세계의 비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이미 믿지 않는다(믿는다?).
 달 속의 계수나무를 은도끼, 금도끼로 찍어낸 뒤 초가삼간을 지어 부모형제 모시고 오래도록 살겠노라는 순진한 욕망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는 속임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
 다르게 이야기해보자. 안무자 김현태는 자신의 춤을 향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삶의 진정한 보람과 이상을 육체나 물질에 주지 않고 그것을 초월한 예술가가 걷는, 무섭고 어려운 길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든 종류의 비유는 세상사의 잡다한 이치와 삶의 이념을 빗대는 일밖에 다른 일을 말할 수는 없다. 하여 완전하게 벗어버리지 못한, 아는 대로 추는 춤의 함정에도 불구하고 춤은 다소 불분명하지만 서정적이고 솔직하게 추어졌다. 반면 재즈 색소폰의 끈적함과 판소리가 섞여드는 어이없는 음악. 정형화된 춤의 옷을 한 꺼풀 벗을 수 있는 파격적이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싹둑 잘라먹은 음악선정, 아쉬웠다.

 

 
 ‘달이 진다’는 가사. 혼례복을 벗어버리고 물러나 앉는 여자. 옷을 싸안는다. 마주 선 김현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싶었다는 가사. 산처럼 부피가 큰 혼례복(껍데기)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여자(편봉화)가 종이옷을 남자(김현태)에게 안기고 돌아서자 곧 남자가 다시 여자에게 안기고, 다시 반복하는 춤. 여자가 사라진다.
 김현태가 바닥을 기듯 납작하게 엎드려 추는 춤, 고통이 읽히는 춤(몸)의 흐름이 좋다.
 남녀의 춤이 이어지고 자신의 그림자를 보듯, 그들의 춤의 동선을 따라 다니며 보는 김현태. 바로 보는 충격은 전면적이고 절대적이다. 남자의 등 뒤에 서 있는 여자. 김현태와 힘겨루기 끝에 남자(서상재)가 쓰러지자, 남자를 일으켜 세워 얼굴을 들여다본다. 누구의(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것일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자신을 뒤돌아보고 그것에 대해 성찰할 엄두를 내기는커녕, 그것을 의식할 여유조차 얻을 수 없다. 마치 전염병처럼 번지는 춤.

 

 
 바라를 머리에 얹은 무리들. 남녀를 둘러싼 채 쪼그리고 앉아 무심히 관망한다. 그러다가 제로섬 게임을 하듯, 무용수들이 일어서고 앉기를 반복하는가 하면, 머리에 얹었던 바라를 한손에 감아 들고 춤을 춘다. 군무진의 바라춤사위가 선량한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이든(선자선좌) 머리 뒤에서 다시 소리를 내며 돌아온다는 뜻(성두상환제)을 담았든, 모든 사물의 정체를 논의하는 법의 춤사위든, 혹은 잡념을 버리라는 뜻의 성잡시배의 춤이든 이미 그것은 의미 없는 외짝 바라로 추는 춤이다.
 마지막, 30여명이 한손에만 들고 추는 바라춤. 길다. 허망함을 보여줄 의도였다면 짧고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어야 했다. 춤이어야 했다. 허전한 것을 치열하게 춘 춤, 빛을 뒤에 두고 홀로 걸어 나오는 김현태, 외로워 보인다. 욕망의 실현을 미루고 치열함을 드러내지 않는 일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외로운 자리를 지켜내야만 하는 스스로에게 하는 격려, 춤에서 다시 찾을 일이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
2017. 0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