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내에서 ‘댄스씨어터’를 표방하는 단체는 여럿 있지만 ‘작가주의’를 거론할 수 있는 작품세계를 전개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김남진의 댄스씨어터 창은 그런 가운데서도 뚝심 있게 자기 색깔을 견지해 온 흔치 않은 단체다. 꾸준한 소극장 규모의 공연을 통해 현실을 직접 파고드는 시의성 높은 소재, 거친 질감의 저돌적인 표현, 집중력 높은 연출을 보여주면서 한국에서 댄스씨어터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하는 귀한 존재이다.
2016년에 창단 10주년을 맞았던 행보를 압축하듯, 〈길, 걷다〉(3월 25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라 표제를 붙인 이번 공연은 작년에 만든 신작 두 편으로 꾸몄다. 1부의 〈무게〉는 취포(취업포기) 세대의 고민과 고통을 다룬, 김남진이라면 의당 다루리라 기대되는 사회비판적인 작품이고, 2부의 〈씻김〉은 간만에 김남진 자신이 솔로로 직접 출연한 사부곡(思父曲)으로 어떤 전환점과도 같은 서정적인 작품이었다.
총 7명의 청년이 동원된 〈무게〉는 연극배우 황현아가 그들의 면접을 보는 장면으로 가볍게 시작한다. 유명대학을 나왔어도, 그렇지 않았어도 어차피 취업이 되지 않아 원치 않게 잉여인간으로 머물러야 하는 현실을 단발성 문답 속에 꼬집는다. 희대의 대통령 스캔들과 관련한 유머도 슬쩍 끼워 넣는다.
김남진이 그의 작품에 대사를 처리할 때는 거의 늘 현실을 직접 연결시켜 풍자하고 저항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날 것의 짤막하고 거친 대사가 주류를 이룬다. 서양식 극장무대에서 툭 튀어나오는, 예전 광대들이 장터에서 일갈하는 것 같은 그런 장면들이 어떨 때는 좀 어색하여 더 여과되어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창(倡)’이라는 단체명처럼 가식 없는 개성과 통하기도 하고 또 무용극에서 대사 구성은 분위기만 적당히 돋우면 되기에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한편, 주류무대에서는 자주 보기 힘든 비교적 작은 키의 무용수들이 한 자리에 집합된 모습도 눈여겨 볼 의미가 있다. 사회 전반에서 외모가 운을 가름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심해졌다고는 하지만 사실 무용계에서는 진작부터 있어왔던 일 아니겠는가. 김남진은 이 ‘건실한 못난이’들을 보듬어 그들이 살아 퍼덕이도록 만든다. 맨 어깨로 바닥에 부딪히고 몸 전체를 튕겨 오르는 거리춤의 어법으로 젊은이들은 작고 단단한 몸집에 꽉 찬 에너지를 분출한다.
이상하다 싶을 만큼 단순한, 흰 패널만 세운 무대장치는 이내 변신한다. 갖은 경쟁 끝 그 매트리스 꼭대기에 등정하고도 곧 추락하는 모습 그리고 6조각으로 분할된 패널은 결국 의자 차지하기 게임처럼 경쟁에서 밀려난 누군가를 만들어낸다. 그 좁은 한 뼘 패널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송곳으로 밀어내는 스산한 풍경, 그것은 우리 젊은이들의 산산이 조각나버린 마음과 같다. 게임에 몰두하느라 파편화된 청소년들의 모습을 그린 2014년의 〈바늘〉에서도 이렇게 분할된 패널과 송곳을 이용한 연출이었기 때문에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이번의 〈무게〉는 〈바늘〉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처럼 보였다.
〈씻김〉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하지만 결국 그의 전철을 밟아나가는 나 자신에 대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막간 후 무대에 먼저 나와 앉은 김남진이 종이에 그리는 것은 아버지의 모습이겠으나 이내 그것을 밟고 서는 데서부터 그것이 그 자신의 모습이 되기도 하리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그리고 바닥에 놓은 반사판과 무대 뒤 스크린을 통해 김남진의 행위를 비추는 효과, 그가 종종 들여다보는 거울은 이것이 결국 자화상임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아버지의 기일에 술 한 잔 올리는 의례를 큰 틀로 하여 진행되는 이 퍼포먼스는 고인을 기억하는 데서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과거 회상에서부터 그를 닮아가는 현재 나의 발견,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다가올 죽음이라는 그림자의 예감까지 시간을 무차별적으로 가로지른다(여기에 반사판이 꽤 큰 몫의 효과를 낸다). 식사만 챙기는 무뚝뚝한 경상도식 안부 전화로 미처 속 깊은 정을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듯 아버지의 형상 옆에 같이 누워보고 그의 옷을 뒤집어 쓴 채 아이처럼 웃어보아도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침묵은 무겁기만 하다.
그 무게를 떨쳐 내거나 혹은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몸짓들은 투박하고 격렬하면서 진솔한 그리움을 담아내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검은 양복 재킷을 양손에 쥐고 신칼대신무를 추듯 재해석한 장면, 망자를 염할 때 칠성판 구멍을 메우는 행위를 재현한 연기 장면 등은 양일동의 소리와 어우러져 이 작품의 연극성에 독특한 한국적 질감을 더했다.
이번 〈씻김〉공연에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표현해내기에 여전히 녹슬지 않은 김남진의 춤과 연기를 보면서 한 광대의 자화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안무가가 관객의 마음을 건드리는 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 치열한 두뇌싸움과 계산도 필요하겠지만 그 전에 내면에 도사린 끼와 본능이 우선이지 않겠는가 하는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런 의외의 서정성이 댄스씨어터 창의 행보를 든든하게 뒷받침해 줄 자산이 될 것 같다.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