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화가 몬드리안(Piet Mondrian)은 100년 전 인물이다. 그는 추상화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추상화에서 그와 쌍벽을 이뤘던 이가 칸딘스키 아닌가. 몬드리안이 추상화에 몰두하게 된 것은 그림(예술)을 우주의 은유로 인식하여 그림에서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되 자연을 재현하는 수단을 배제하는 방향을 취하였던 때문이다. 추상을 통해 영적인 안식에 이르고 개별자를 통해 보편자를 드러내자는 것이 몬드리안의 생각이다. 몬드리안의 회화는 직선과 사각형, 그리고 삼원색과 무채색만으로 구성되는 특질을 보였다. 어느 그림들에서는 원색의 점박이들만 남았다.
칸딘스키와는 전혀 달랐던 몬드리안의 화풍... 몬드리안의 생각이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은 잘 아는 대로이다. 몬드리안의 생각에 공감하겠는지 그리고 몬드리안의 생각이 그림에서 달성되었는지는 사람에 따라 의문표로 남기 마련이다. 몬드리안 그림의 매력이 그런 것은 예술의 역설이다. 몬드리안 그림에서 직선들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격자 무늬, 즉 그리드에서 정형일은 강박을 보아내고 그 강박을 발레 안무작 〈The Line of Obsession〉(강박의 선,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2. 17~18.)에서 탐색하였다. 미술이나 회화 같은 춤 이외 예술 장르의 관심사를 춤으로 물어가는 일이 흔치 않은 경향과는 퍽 대조적인 작업이고 흥미를 자아낸다.
〈강박(強迫)의 선〉에서 몬드리안의 격자가 갖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다. 무대 정면에 세로로 아니면 가로로 기다란 사각형 위에 수직선이나 수평선이 교차하는 도안이 기본으로 설정된다. 무대 바닥에도 커다란 삼각형이나 사각형이 설정되고 때로는 무대 정면의 도안이 바닥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이들 도안들 사이에 어떤 순서나 인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The Line of Obsession_Mondrian> ⓒ김채현 |
도입부에서 바닥에는 커다란 삼각형 무늬 2개가 꼭지점을 맞추어 바닥에 연두색 조명으로 비춰지고 무대 정면에는 연두색과 검정색의 수직선과 수평선이 박힌 세로로 긴 흰색의 사각형 무늬가 보인다. 여기서 먼저 세 사람이 종대로 서서 두 다리를 벌려 바닥에 굳건히 뿌리박고서는 상체와 양팔을 좌우로 흔들기를 반복하다가 퇴장한 다음 두 사람이 등장하여 마치 앞뒤로 포개진 듯한 모습을 취하고서는 똑같이 상체를 좌우로 흔들다가 서로 앞뒤 위치를 바꾸어 가벼운 밀착과 포옹을 섞어서 상체를 너울대거나 상대를 지탱하며 회전하는 양상으로 관계를 전개해 보인다. 이 부분에서 음악은 그레고리안 챈트를 연상시키는 느리며 고즈넉한 남녀 2인의 성악이 성스럽게 울려퍼졌다.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The Line of Obsession_Mondrian> ⓒ김채현 |
그 다음 부분이 진행될 동안 무대 정면과 바닥에 같은 모양으로 비춰지는 것은 세로로 긴 사각형과 그 위에 삽입된 수직선과 수평선에 더하여 정면 전체에 수직선과 수평선이 조금씩 길어지는 도안 무늬들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음악은 느리게 흐르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다.(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은 〈강박의 선〉에서 자주 등장한다.) 집단으로 등장한 무용수들은 양다리를 바닥에 굳게 딛고서는 양팔을 뻗어 상체를 좌우로 너울대는 기본으로 해서 집단 이동, 플리에처럼 하체 구부리기, 아라베스크처럼 뒷다리들어 뻗기 등의 동작을 섞는다. 그들이 퇴장하고 남녀 2인이 등장하면 바닥과 정면의 그 도안 무늬의 선들은 수직은 수직대로 수평은 수평대로 이어져서 여러 개의 크고 작은 격자를 형한다. 두 사람은 서로 밀착하여 무대를 이동하면서 주로 남성이 여성을 지탱하고 보조하고 이끄는 등으로 호흡을 맞춘 듀엣의 모습을 연출하였다.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The Line of Obsession_Mondrian> ⓒ김채현 |
〈강박의 선〉에서 출연진들은 레오타드를 착용하였으며 의상 색조는 전반부에서는 짙은 갈색조, 후반부에서는 옅은 살구색조였다. 사지가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레오타드는 타이트하게 디자인되어 그들의 움직임을 뒷받침해주었다. 공연 전반에 걸쳐 움직임들은 양팔과 양다리 모두 강인하며 매끈한 스트레치를 기반으로 에너지를 직설적으로 방출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The Line of Obsession_Mondrian> ⓒ김채현 |
이번 공연의 소재로 작용한 몬드리안의 격자는 매우 다양한 도안으로 무대 정면과 바닥에 투사되었다. 기본으로 소개된 도안에다 붉은색으로 채색되는 것을 비롯하여, 기억을 따라가자면, 중앙의 사각형 없는 푸른색 삼각형, 중앙 사각형 없이 여러 수직선과 수평선 교차하며 푸른 수직선, 빨간 수평선이 삽입된 것, 바닥의 파란색 사각형, 단 하나의 수직선 줄기, 서로 마주보는 초승달과 하승달 같은 모양들(붉은색, 흰색으로 변한다)과 그 아래 바닥에서 마주보는 커다란 붉은색 삼각형 2개, 그 붉은색 삼각형들의 틈을 채우는 얇거나 굵은 흑백의 막대 도안, 정면에는 핑크색 수직선과 파란색의 수평선이 교차하고 바닥에는 핑크색의 사각형 속에서 회색조 마름모꼴이 떠도는 도안, 정면의 세로로 긴 흰색 사각형에 수직선과 수평선이 박히고 하얀 바닥 위에 옅은 갈색이 그리드를 만드는 속에서 연두색 보라색 초록색의 사각형들이 배열된 도안 등이 그러하다. 일테면 다채롭게 변화하는 도안들이 펼쳐진다.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The Line of Obsession_Mondrian> ⓒ김채현 |
시원스런 감이 드는 도안들은 공연에 변화를 주었음은 물론이려니와 더 근원적으로는 그리드 구조와 협응하는 움직임을 촉진한 것으로 판단된다. 자연의 재현을 배제한 몬드리안의 그리드처럼 〈강박의 선〉에서 움직임들 역시 구체적인 재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끈한 스트레치로써 공간을 헤쳐나가는 움직임들은 꿋꿋한 직립과 상체 휘젖기, 잦은 비틀기, 간간이 곁들여지는 굴신 그리고 출연진들 간의 접촉을 통하여 나름의 추상적인 질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집단의 출연진들이 한 여성을 들어올려 재빠르게 이동하는 순간도 종종 펼쳐졌다.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The Line of Obsession_Mondrian> ⓒ김채현 |
〈강박의 선〉에서 안무자는 발레의 열망과 강박을 제시하였다. 그 참조점으로서 몬드리안의 격자를 취하였다. 그러나 다양하게 변하는 몬드리안 격자와 움직임 간의 연관성을 어떻게 짚어내야 할지 애매한 점이 없지 않다. 가령 A라는 격자가 등장하는 부분의 A라는 움직임이 그 격자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가시적으로 짚어내기는 어려웠다. 물론 그러한 연관성은 가설적이기, 가상적이기 때문에 필연성이 있을 리는 없다. 그럴지라도 격자가 바뀌면 움직임도 변해야 하겠는데, 격자가 바뀌자 움직임의 구성을 중심으로 변화는 있었지만, 특정한 격자와 특정한 움직임 또는 선 사이의 연관은 옅었다. 이런 점은 작품의 호소력을 잠식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작품이라는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 속에서 안무자는 자신의 가설을 맘껏 펼쳐내고 명시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The Line of Obsession_Mondrian> ⓒ김채현 |
안무자는 일상어법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감지되는 ‘강박’을 〈강박의 선〉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듯하다. 그래서 강박은 곧 몰두, 몰입의 뜻으로 이해되며 어떤 이상형을 향한 집념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강박의 선〉에서 우리는 여러 양상의 움직임들과 함께 선들을 만나며 그 모두가 강박의 선으로 이해된다. 집단무에서의 선, 남남 2인무에서의 선, 남녀 2인무에서의 선, 리프팅 순간의 선 등등은 안무자가 컨템퍼러리발레의 영토에서 선(線)과 형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발레에서 컨템퍼러리발레가 넓혀지고 있음을 알리는 공연작이다.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