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작년에 신설된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기존에 진행하던 차세대예술가육성사업(AYAF)와 창작아카데미사업이 통합된 사업이다.
기존 AYAF 사업은 문학, 시각예술, 공연예술이 각각 분리되어 있었고, 큰 틀에서 선정자에게 창작지원금을 지원하는 방식이 중심이었다.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는 문학, 시각예술, 공연예술(연극, 무용, 음악, 오페라) 뿐만 아니라 기획자, 무대예술까지 통합하여 선발한 뒤, 연구과정을 지원하고 중간발표를 거친 후 창작과정을 지원하는 4단계의 지원체계를 갖추었다.
예술가들에게 창작지원금 만을 지원하는 데서 벗어나 여러 강의를 개설하여 수강하고 연구하게끔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소위 ‘인큐베이팅’에 가까운 지원 방식이 실효가 있는 것인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할 문제겠지만 최종 발표 공연들이 그 가능성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무용분야의 최종 발표 공연은 지난 12월에 공연된 공영선의 〈도깨비가 나타났다〉 이후 1월에 집중되어 있는데, 해당 참가자는 김영찬, 허윤경, 김수진, 이세승이다.
김영찬 〈In The Beginning〉
김영찬의 〈In The Beginning〉(1월 20-21일,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평자 21일 관람)은 ‘태초’의 신명과 흥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한국춤에 서아프리카의 민속춤을 접목시킨 작품이다. 멀리 떨어진 두 지역의 춤이 한데 만난 것은 ‘터’ 곧 땅에 대해 서로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사물놀이와 농악, 마당춤 등을 먼저 거쳐 한국무용을 전공하게 된 안무가의 독특한 이력에 따른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무대예술화 되어 독립된 양식과 작품으로서만 ‘이수’되고 ‘전승’될 뿐 이제는 더 이상 판 안에서 민중과 호흡할 힘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무용을 어떻게 심폐소생 시킬 수 있을지의 문제는 거듭 지적되어 오면서도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흥’과 ‘신명’을 관객에게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문제도 크지만, 자칫하면 배우고 익힌 춤의 경직된 어법들이 춤을 추는 당사자의 주체적인 의지까지 제한해 버려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춤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더욱 크게 작용해온 문제였다.
그런 면에서 김영찬에게 2010년부터 시작된 서아프리카 민속춤과의 만남은 숨통이 트일 만한 하나의 돌파구가 되었던 듯 하고, 이번 〈In The Beginning〉은 오랜 작업 끝에 자연스럽게 토출된 결과물이다. 무대예술로서의 작품이라는 외형은 버릴 수 없는 대신에, 강한 발디딤으로 어머니 ‘땅’의 숨결과 인간의 심장박동을 연결시키는 아프리카의 사고방식으로 춤꾼의 본질을 되찾아보자는 것이다.
한국과 아프리카, 때로는 동남아시아의 풍취를 내도록 고안된 베이지색 의상을 입은 여섯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구형(求刑)의 크고 작은 오브제와 풍선 등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오브제들을 이용하여 땅과 무용수들끼리 더욱 밀착하고, 서로를 얽고 밟았다 뿌리는 동작들은 다소 거칠고 동물적인 느낌으로 뻗어나갔다. 상반신의 어깻짓이나 손놀림은 우리 전통춤인 듯하나, 단발성으로 굵게 내지르는 하체의 움직임은 다른 데서 온 것이었다. 동래학춤이나 덧배기춤에서 유래한 동작들과 아프리카 춤의 요소들이 한 몸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있던 데서 안무가가 동작 연구에 기울인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용수들의 노련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고 내내 꼿꼿한 채 강하게 고정된 허리춤의 모양이 어딘가 어색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곧게 뻗은 팔과 다리가 우주수(宇宙樹)처럼 하늘과 땅을 직렬로 연결하는 인간의 모양새를 연출하기는 했지만 부드럽고 편안하게 흘러나오는 감흥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격한 경사를 지닌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의 구조상 아래로 꺾어내려다 봐야하는 관람환경이 이 작품의 색채와 그다지 어울리지 못했던 것도 아쉬움을 더했다.
허윤경 〈스페이스-쉽(Space-ship)〉
허윤경은 서울역 284 RTO에서 〈스페이스-쉽(Space-ship)〉(1월 25-26일, 평자 25일 관람)을 발표했다. ‘관객이동형 공연’을 표방한 이 작품은 객석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서울역 284 RTO의 로비와 공연장을 모두 개방하여 통으로 사용했다. 공연시작 전 로비에 모인 관객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 순서를 기다려 진행요원의 안내를 받아 공연장으로 입장하였고, 로비에 남아있던 관객들은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내부에서 진행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의 조심스러운 이동까지 관찰할 수 있었다.
굵은 철사를 스프링처럼 구부려 만든 모빌, 사다리에 아무렇게나 걸쳐둔 천, 그 아래 부서진 형태로 놓인 토르소 조각 등 어느 미술가의 작업실을 연상케 하는 오브제들은 서울역 284 RTO의 낡은 벽과 함께 자연스러운 분위기만 살짝 띄워줄 뿐 이 공간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지는 않았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을 커다란 하나의 신체로 상상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일부로서 존재하는 몸을 인지해보는 작업으로 기획된 이 작품의 의도대로라면, 주어진 공간을 휘젓고 다니며 흐름을 만들어내는 무용수들과 그에 밀려나거나 혹은 밀착하는 관객의 움직임 자체가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야 마땅할 것이다.
프로펠러처럼 양팔을 펼친 채 회전한다든가, 누운 채 애벌레처럼 바닥을 미끄러진다던가, 한 발로 겨우 버티고 서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는 등의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자리를 거듭 이동하며 이루어졌다. 커튼을 들추며 외부의 야경을 연결시키고 가장자리 벽에 밀착하거나(낡은 벽의 시멘트 덩어리가 떨어진 것은 그에 대한 아주 작은 응답이었을 것이다) 기둥을 감싸고 기어오르려는 등, 공간 사이의 경계를 없애거나 혹은 무생물로 대해온 신체외부의 공간에 호흡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외부의 빛을 최대한 차단할 수 있게 두꺼운 벽으로 마감하고 무대와 객석을 엄격히 분리하여 설계한 일반 극장에서라면 그 무게에 짓눌려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것이고 서울역 284 RTO가 작가로서는 그나마 최선의 선택지였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의 콘셉트가 썩 잘 살아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일단 서울역 284 RTO의 천장은 주로 수평방향으로 움직인 무용수들이 정복할 수 없을 만큼 여전히 높았고, 관객의 숫자가 많지 않다보니 관람은 편했지만 그 운집된 부피가 작아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유의미하게 대응하는 흐름이 밀도 있게 만들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후반부에 두 명씩 짝지어 이룬 잠깐의 동작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무용수 각각의 개별화된 움직임만이 있어 작가가 표방한 어떤 ‘유기적인 지도’가 만들어지기엔 단조롭기도 했다.
이 공연은 입장 전 관객들이 각자 받아든 소정의 지시문(평자의 경우 ‘이 공간에서 두 번째로 어두운 곳에 서 주세요’)에 따라 이동하면서 공간과 자신의 관계를 직접 체험하도록 유도하면서 마무리되었는데, (여러 불빛이 섞여 밝기 정도를 분명하게 구별하기 힘든 공간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두루뭉술하고 느슨한 지시문 역시 허윤경 작가가 작품 전체를 설계하고 장악하는 힘에 있어 아직은 미흡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김수진 〈The Sense of Self〉 & 이세승 〈먹지도 말라〉
각 35분 정도의 길이를 가진 김수진의 〈The Sense of Self〉와 이세승의 〈먹지도 말라〉는 함께 공연되었다(1월 25~26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평자 26일 관람).
김수진의 〈The Sense of Self〉는 ‘자기 검열’의 문제를 정치적·문화적 이슈라는 측면으로부터 보다 확장된 관점에서 다루길 원한다. ‘자기 검열’은 결국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서 비롯되는 바, 이 공연에서는 무대 위 무용수들을 관찰하고 촬영하는 카메라를 삼각대와 함께 세워 노골적으로 노출시킨다.
조명이 들어오면 작은 스크린에는 발레 기본 발동작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어린 무용수들의 다리와 수용소에서 힘없이 행진하는 사람들의 다리가 오버랩 되면서 투사된다. 영상에는 애처로움을 더하려는 것처럼 마스네의 〈타이스〉 명상곡이 배경으로 흐르는데,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타이스〉 또한 성직자와 창녀 간 율법에 의한 검열과 자기 성찰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연의 일치인 듯 배치되어 흥미롭다.
외부에서 개개인을 규정하고 옭아매는 틀을 의미하는 구조물 안에서 이 작품의 페르소나(무용수 조연희)는 팔이 뒤로 묶인 채, 뒤에서 그의 두 팔이 되어 거짓 행동을 꾸며내는 타인의 움직임에 무기력하게 자신을 맡겨둔다. 숨어있던 타인은 어느새 전면에 나서 페르소나와 밀착하면서 움직임을 통제하고 조종한다. 1 제곱미터쯤 되어 보이는 좁은 공간에서 그 움직임이 아무리 답답해 보인다 할지라도 벗어날 방도를 좀처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김수진이 미셸 푸코의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것처럼) 차곡차곡 쌓아올린 책 위에 올라서서 자유의 공기를 모처럼 만끽하는 것 같은 조연희의 모습만 보아서는, 작가가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개인들의 지적인 각성만을 촉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무대 위에 설치되었던 카메라가 찍은 영상이 되어 바로 스크린에 비춰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서, 우리는 결코 그 ‘시선’들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작가는 카메라를 구조물 속에 가두고, 스크린을 쓰러뜨리며 암전시킴으로써 이 작품을 마무리하였다.
무대 장치와 영상의 활용도, 장면 구성 등에 있어 꼼꼼하게 내실을 기한 작가의 연출 실력에도 불구하고 남는 단 한 가지 아쉬움은 이를테면 연극과 영화 연기의 차이랄까. 좁은 구조물 안에서 이루어진 동작들이 작가가 모처럼 보여줄 수 있는 안무였기 때문에 좀 더 욕심낼 만 했는데,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면 모를까 객석에서 관찰하기에는 무대용 동작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폭이 작아 잔상이 지저분하게 남는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에 구속된 자아의 폭좁음, 부자연스러움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작가가 자신의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보다 명쾌하게 정돈하여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세승의 〈먹지도 말라〉는 여러 종교문화와 습속의 아이콘을 복합적, 함축적으로 담아낸 블랙 코미디였다. 20분의 인터미션 후 입장한 관객들은 객석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온갖 화려한 깃털을 꽂아 봉황처럼 꾸며 굵은 밧줄에 매달아 놓은 북어를 마주치게 되었다. 북어는 고사를 지낼 때마다 쓰는 제물이기도 하지만, 이 공연에서 단상에 두 마리를 연달아 매놓은 것은 성경 속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절에서는 ‘목어(木魚)’라 부르는 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무엇보다 〈먹지도 말라〉라는 제목에서 자린고비가 매달아두고 반찬 대신 쳐다보기만 했다는 굴비 이야기가 연동된다. 미각과 영양이라는 즉각적이고도 현물적인 가치를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몸은 피폐할 지라도 영원히 상상 안에서 눈과 정신으로만 만족하는 이상적인 가치를 선택할 것이냐 하는 아이러니가 굴비 한 몸에 담겨있다. 이세승은 이것을 빌려 생계를 걱정해야만 하는 열악한 무용인들의 현실 속에서 ‘밥’과 ‘예술’의 가치를 저울질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공연은 찬양대 혹은 목사로 분한 이세승이 주도하는 예배 형식으로 관객의 동참을 유도하며 꾸며졌다. 신앙의 대상은 ‘예수’ 대신 ‘예술’이며, ‘아멘’ 대신 ‘아-트’로 기도한다. 이세승이 설교 도중 인용한 한국고용정보원의 데이터에 초임 연출가의 연봉이 923만원으로 수녀님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사회는 예술가에게 성직자 이상의 헌신과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는 노래 가사는 자본가 앞에서 노동자들의 피땀과 울분을 항변하는 것이지만, 참으로 이상스럽게도 예술은 정식 노동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예술가는 ‘베짱이’ 취급을 당하기 일쑤이다. 물질만능의 사회에서는 예술에 ‘고부가가치 산업’, ‘창조경제’ 식의 수식어가 동원되어야 그나마 관심을 갖고, 종교와 마찬가지로 예술이 담당하는 ‘정신적 재생산’의 가치는 그다지 고려되지 않는다.
때문에 가발을 벗어던진 이세승이 북어를 두 손에 쥐고 승무와 무당춤, 막춤을 뒤섞어 몸을 흔들어대는 모습을 보며 무심코 웃게 되어도, 그 춤은 못내 아프고 서글픈 춤이기도 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다. 이 ‘춤의 사제’가 불러낸 ‘임금님-제물’(정성태)이 스스로 밧줄을 휘감고 올라가 자신을 매달아 굴비처럼 늘어지는 신성한 의식까지 지켜보면서, 예술가들이 예술의 이름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해야하는 이 무거운 사명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한탄을 읽게 된다.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걸머지고 육신을 내어 매단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총을 받고 있는 것인가! 객석에 잘게 찢은 북어포를 돌린 성찬의식은 그 점을 적시하면서, 그러한 영육의 조화를 예술가들 또한 당연하게 누려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김수진과 이세승의 공연은 쇼케이스라고 소개되었지만 작품 길이나 주제의식, 타 장르와의 적절한 결합 등의 측면에서는 지금의 형태로도 어느 정도 완결된 듯 보였다. 앞서 김영찬이나 허윤경의 작품에 비해 안무의 함량이 다소 부족한 듯 하다는 점이 지적될 수도 있겠지만, 요즘 공연들에서 춤의 러닝 타임이 절대 요소가 아니라 질적인 순도가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큰 문제는 아니다.
약 1시간 길이로 짜인 김영찬과 허윤경의 작품은 각각 소재와 형식에서 나름의 신선한 변화를 꾀했음에도 작품의 콘셉트와 딱 들어맞지 않는 공연장 매치가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다양한 공연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전문가의 멘토링이 결합되었던 만큼 이번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사업에서 좀 더 나은 해답이 나왔더라면 그 성과 또한 더욱 풍성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