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융복합 시대가 춤의 다양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 현상은 2천년대 중반 이래 다원예술적 춤 활동의 증가로 나타났다. 이와 아울러 주목해볼 점으로서, 융복합이 춤 공연장의 다변화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춤 공연장 다변화는 한편으로는 춤 창작자들의 적극성에, 다른 한편으로는 공연장 운영 주체의 의식 변화에 좌우되는 정도가 높다.
실제 현장에서 춤 공연장 다변화를 피부로 느끼기란 아직 시기상조이다. 그렇더라도 몇몇 사례에서 춤 공연장 다변화의 조짐이 엿보인다. 지난 늦여름부터 10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국립현대무용단이 다원예술 프로그램을 공동 진행한 것이나 지난 11월 춤 공연이 열린 강남 논현동 소재 플랫폼-엘, 영등포구 양평동 소재 인디아트홀 공이 그런 사례에 속하며, 심지어 2014년 10월 온앤오프무용단이 하이서울페스티벌에서 국내 최초로 공중 비행을 감행하여 하늘로까지 춤 공간을 넓힌 바 있다.
노경애는 〈더하기 놓기 +,〉를 다원적 퍼포먼스 방식으로 플랫폼-엘(컨템포러리아트센터, 11. 10-11.)에서 진행하였다. 플랫폼-엘은 이른바 화이트 큐브 공간에 머물지 않고 전시와 퍼포먼스, 영상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 작업을 지향하는 신생 공간(2016년 봄 개관)이다. 앞서 언급한 융복합의 개념이 분명한 공간으로서 향후 춤과의 커넥션도 기대해볼 만한 공간이다.
〈더하기 놓기 +,〉에서 컨셉과 안무를 노경애가 진행하되 창작과 공연을 강진안 등 네 무용수가 맡고, 드라마트루기, 시각예술, 사운드를 다른 작가들이 전담하는 퍼포먼스여서 다원적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퍼포먼스가 통상적으로 다원성을 띠겠지만, 여기서 특별히 다원적이라 강조되는 데 있어 춤의 역할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다.
〈더하기 놓기 +,〉의 의미는 움직임뿐만 아니라 글자, 이미지, 소도구, 소리 등 다양한 장치들을 A + B 또는 A, B 식으로 결합하되 이질적으로, 비논리적으로 배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서로 다른 요소들의 그러한 결합은 공동의 의미를 강화하거나 어느 한 쪽을 지지하거나 제3의 의미를 생성하거나 무의미에 그치거나 등등 다종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배치되어 각 요소 본래의 고유성이 흔들린다면, 이번 공연 컨셉이 의도하듯이 이를 대하는 우리의 지각 또한 변화 즉 낯설게 하기를 경유하기 마련이다. 낯설게 하기를 면밀하게 유도하려는 의도에서 더하거나 나란히 놓는 데 쓰일 움직임, 글자, 이미지, 사물, 소리를 이번 공연에서 작가들이 분담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퍼포먼스는 네 무용수가 주도하였고, 글자, 이미지, 소도구 등은 소품으로서 기능을 하였다. 혼자서 혹은 집단적으로 몸 비틀기, 비틀대기, 구부리기, 정지 등의 움직임을 유연하게 전개할 동안 때때로 글자와 이미지가 벽면에 투사되었다. 그들의 아주 정교한 춤은 철저히 분리되어 서로 간에 무심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통상적 춤 공연 패턴을 완전히 벗어난 때문에 퍼포먼스라 불러 무방하다. 다양한 장치들을 이처럼 맥락 없이 춤과 함께 전개하는 현장은 지각의 변화에 시동을 걸었으며, 지각의 궁극적 변화는 물론 관객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올해로 개관 6년째인 인디아트홀 공은 양평동 공장 지대의 공장 2층에 위치한다. 아래층에서 철공장 소음이 들리고 공장 정문과 마당을 거쳐 홀 입구로 가야한다. 공장과 한 형제나 다름없어 보여 특이하다. 여기서 영화, 사운드, 연극 등 독립예술 활동이 활발한 반면 춤계에선 비교적 생소한 공간이다.
“심장에 뇌와 동일한 신경세포가 있다.” 인디아트홀 공(11. 25-27.)에서 이소영이 신경과학을 응용해서 공연한 〈14 feet〉는 이 명제를 대전제로 하였다. 부연 설명에 따르면, 심장과 뇌가 태아 시기에 하나였다가 기관으로 분화했으므로, 심장에 뇌 성분이 남아 있고, 때문에 생각과 정서를 몸으로, 마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몸의 춤이 생각과 정서를 전달할 수 있는 명쾌하되 과학적 근거가 재확인된다. 인공 지능의 로봇이 심장을 달면 과연 그런 춤을 출 수 있을까. 14피트는 열 네 발자국 정도의 거리로, 심장의 파장이 타인에게 가 닿을 수 있을 거리를 말한다. 인간 서로 간에 심장 즉 공감의 파장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한계치가 14피트 정도라는 건 수긍이 가는 지적이다.
〈14 feet〉는 관객들이 둘러선 상태에서 (공장의) 맨바닥에 깔은 스케치 종이에 이소영이 앉아서 자신의 이런저런 몸과 자세의 흔적들을 목탄으로 구불구불 묘파하는 오프닝 퍼포먼스로 시작된다. 묘사한 종이를 가위로 잘라 인체 해체를 암시하듯이 헤쳐 놓은 후 이소영이 옆방으로 옮겨가고 관객도 이동한다. 옮겨간 곳이 공연의 주공간이며, 앉은 관객에게는 테이블 구실을 하는 하얀 바닥의 다도실(茶道室)로 변형되었다. 다도실 3면을 에워싸서 앉은 관객 앞에는 조그만 찻잔들이 관객마다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소영이 다도를 쫓아 차를 준비하는 동안, 배우 장재키는 다도에서 정성을 다하는 이유가 몸과 마음으로 뇌의 공감을 유도하는 뜻이 있다는 것, 그리고 차를 사례로 후각, 미각, 시각의 정서와 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자기가 인체 해부 실습에서 직접 경험한 몸에 대한 존중감도 환기되며, 이어서 이들 설명을 주제로 해서 이소영의 춤과 배우 장재키의 연기가 호흡을 맞춰 어우러진다. 후반부에 다도 의례가 끝난 후 혼자 남겨진 이소영은 공장 유리창벽을 배경으로 몸이 기진맥진해서 소외되는 모습을 홀로 춤으로 표현하다가 갑자기 쓰러진다. 이 시대에 만연한 몸의 약탈을 벗어나 몸의 창조가 절실하다는 메시지가 춤에 담겼다.
〈14 feet〉가 주목을 끌 점은 여럿이다. 연관 분야의 전문 지식을 소재로 하는 동시에 무대화하였고, 이를 위해 퍼포먼스 방식을 동원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몸과 춤에 대한 대안적 탐구의 지향점으로서의 공감(共感)을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제시한 점 등이다. 설명 부분을 대사로써 진행한 배우 장재키는 신경과학 전공의 전력이 있고, 자료에서는 작품 〈14 feet〉의 자문역으로 소개된다. 또 보도 자료는 이소영과 장재키가 신경과학의 뇌심장학 분야를 장기간 리서치한 결과를 이번 공연의 소재로 발굴했다고 전한다. 학구적 내용의 〈14 feet〉가 공연으로서 설득력을 갖추는 데 있어 퍼포먼스가 큰 역할을 한 점은 다시 강조되어야 하겠다.
융복합이 춤 공연장의 다변화를 촉진할 가능성을 현재로선 속단할 수 없으나, 시대 조류로 서서히 조성되는 참이어서 언젠가 대세로 정착할 것이다. 특히 갤러리가 늘어가는 추세로 미루어 그에 적절한 춤 공연 형태, 곧 춤 퍼포먼스 또는 퍼포먼스 춤에 대한 수요가 증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무튼 춤계는 이에 대응하는 적극성을 띠어야 할 것 같고, 일례로 대학 학과들에서는 심지어 퍼포먼스 관련 교과를 개발하는 방안까지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