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최두혁의 〈기억ARCHIVE〉(12월 28일, 수성아트피아 용지홀). 작품 <아카이브>는 안무자의 춤의 기록을 선별, (무대에)보관하는 공간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담아낸 춤의 (기억)창고였다. 안무자 최두혁은 ‘경쟁’이라는 단어를 ‘치열하지만 따뜻하게’라고 말하는 이다. 무한함. 그는 자신이 지나온 시간에 관해 말하면서 이 무한함에의 감정이 마치 이 기억의 장소, archive를 만들게 된 이유인 것처럼 춤을 풀어낸다.
안무자의 춤의 진척을 막는 (고통의)기억. 그것은 닫은 채 시작하는 무대 막, 혹은 쓰러져있는 (나신)여자무용수에게 인공호흡을 하는 남자, 알 수 없는 춤에 취한 여자이거나, 그녀의 주위를 걸으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불어로 대사를 읊어대는 또 다른 남자이다. 어쩌면 이들 사이에 떠도는 갈등,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일 수도.
몬드리안의 회화 작품 같은 두 개의 큰 프레임이 배경으로 걸려있는 무대. 오래된 기억의 그것처럼 군데군데 빈 공간이 드러나는 낡아 보이는 프레임은 다양한 의미를 담아내는 장치로, 근사하다. 프레임에 고요한 강(바다)의 영상이 얹히자 깊은 강을 닮은 군무가 시작된다. 같이 춤을 추다가 한 명씩 툭툭, 마치 기억의 조각들이 불쑥불쑥 튀어 올라오는 듯한 움직임. 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드러난 장이었다.
‘꿈’의 장. 긴 소매 의상의 무용수들. 옆에 선 이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니 길게 늘어나는 꿈(기억) 자락. 자락을 잡은 채 다른 쪽을 향해 팔을 뻗어 또 다른 이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면 또 다른 이가 잡아당기면서 연결되는 춤의 꿈을 놓아버리지 않으면서, 기억을 분산시키고, 관계를 도치하고, 기억 위에 기억을 중첩하고, 의미를 묻고, 춤을 추면서 딴청을 부리고, 연결이 불가능한 연상을 타고 달아난다. 하나에서 둘, 셋, 다섯으로 이어지면서 큰 덩어리가 되었다가 흩어지는 기억의 조합과 탈주. 꿈의 얼굴을 가져야 할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들. 들추어지고 조직되는 기억의 말이 (의상)희고, 혹은 암흑같이 검기도 한, 명확하지 않은 기억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무대에 떠도는 춤. 인상적이고 아름다웠다.
‘꿈’이 ‘경쟁’으로 이어지는 장. 각자 의자를 하나씩 들고 들어온 40여 명의 무용수들이 의자 위, 각자의 자리, 위치, 공간에서 주장을 편다. (여행)가방을 들고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이가 들어온다. 얼굴이 없다. 얼굴 없는 폭력은 대체로 총체적이다. 혼자이지만 무대 전체를 흔드는 큰 폭력. 이 무한한 폭력은 오히려 치유의 성격을 지닌다. 자신을 위한 자리(공간), 없다. 벌을 서듯 의자를 머리 위로 들고는 무엇인가를 찾아다닌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으로 정리되는 무대. 흰 우산을 펼쳐든 이, 자줏빛 목도리를 한 이. 목걸이처럼 목에 걸었던 끈으로 자신의 목을 옭아매 잡아당기는 이. 의자에 앉은 여자를 의자 째로 어깨에 짊어진 얼굴 없는 남자. 삶을 괴롭게 하는 현실 속의 저 불가해하고 불가시한 존재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마치 삶의 한 부분을 도려내어 그 일상적 연관성을 제거하고 낯선 단어에 그것을 올려놓은 듯한 춤의 장. 안무자 특유의 연극적인 춤의 배치 언어가 달라졌다. 달빛이 비쳐드는 강에 몸을 던지는 그림자. 불행한 과거는 불행한 현재이기도. 비통하고 아름답다.
마지막, 시작과 같은 춤 배치의 무대. (나신의)여자무용수와 그녀에게 숨을 불어넣던 남자무용수의 듀오. 좋은 춤(몸)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생명이 없는, 인형같이 지체가 흔들리는 여자무용수를 던지듯 남자의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심장박동 소리. 다시 시작되는 삶, 관계. 남자의 어깨를 밟고 우뚝 선 여자무용수. 여전히 아슬하다. 세상은.
춤의 깊이를 만들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춤으로 다져진 안무자의 나이테이지만 그의 기억의(상처) 깊이이기도 하다.
강렬하고 인상적인 군무진의 춤과 더불어 나직하고 깊은 눈으로 삶을 관조한, 기억(고통)을 깊이있게 그려낸 작품 〈기억 ARCHIVE〉. 춤의 배치에 있어 균형과 세부에 대한 배려가 정교해진 최두혁의 달라진 춤의 세계를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