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퍼포먼스: 예기치 않은(Unforeseen)’은 국립현대무용단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다원예술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8월 중순부터 두 달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내외부 공간에서 미디어, 영상, 사운드, 설치 등의 작가들과 무용인들 사이의 협연으로 진행되었다(8월 17일-10월 23일). 미술관의 멀티프로젝트홀, 선큰가든, 중층 공간, 옥내 로비, 옥내 복도, 경복궁마당, 미디어월에서 있은 13편의 퍼포먼스 가운데 개인적으로는 9편을 대상으로 12회 관람하였다.
시각예술 분야의 한 부문으로서 퍼포먼스가 공인된 시기를 단언하긴 힘들더라도 국내에서는 짧아도 20년은 넘은 듯하다. 그 후로 퍼포먼스는 도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지난 20여년 춤에서 퍼포먼스가 희소했던 것은 아니지만 춤(과 밀접한) 분야로 널리 인지된 것 같지는 않다. 퍼포먼스에 대한 춤계 현장의 관심은 사실상 미온적이었다. 이러한 편차를 상기하면 국립현대미술관과의 공동 기획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대개의 퍼포먼스가 낯설음을 지향하듯이 ‘퍼포먼스: 예기치 않은’ 기획 또한 제목처럼 예기치 않은 상황의 연출을 강조한다. 명시된 기획 의도에 따르면, 다원예술 형태로 장르와 형식의 한계를 예기치 않게 넘어섬으로써 공연과 관람에서 인습적인 이분법적 사고를 동요시키려 한다. 세부적 설명에서는, 신체의 한계 및 관습적 공간, 규정된 사고를 벗어나고, 퍼포먼스에서 촉발되는 규제된 우연성, 비결정성, 불확정성, 즉흥 등을 통해 동시대 다원예술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 이번 기획의 목표로 앞세워진다.
퍼포먼스의 정의는 일률적이지 않다. 공연예술과는 별개로 치는 관점에서 보아, 부동(不動)의 미술에 물리적 이동성을 더한 것이 퍼포먼스 아트(행위미술, 행위예술)라는 기본적인 점에 착안하면 물리적 이동성은 퍼포먼스의 필수 요건으로 부각된다. 이 같은 물리적 이동성(move, time, play)은 관(람)객과의 관계에서도 이동성을 전제(또는 허용)하기 때문에 퍼포먼스에서의 가변성을 토대로 매우 포괄적인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특히 관객에 대해 취하는 수평의 관계에 힘입어 퍼포먼스는 더욱 창의적인 장르로 업그레이드되기도 한다.
퍼포먼스 장르 자체를 일목요연하게 정돈하기가 무리인 터에, 이번 프로젝트에서 관람한 9편 역시 그렇게 정돈하기에는 난점이 따른다. 작품들이 심지어 서로 이질적이라 할 만큼 전개 양상이 고르지 않다. 이런 중에서 모두 국립현대미술관(의 다종다양한 공간)에서 펼쳐진 공통점을 전제로 해서, 춤(또는 움직임)만으로 진행된 작품들을 한 묶음, 춤(또는 움직임)과 시각예술(또는 미디어 아트, 영상) 또는 문학이 결합해서 진행된 작품들을 또 다른 묶음으로 대별할 수 있을 듯하다. 전자에는 조형준의 〈오버 더 월〉, 김재덕의 〈호흡 타격〉, 이재영의 〈디너〉가 속하고, 후자에는 안데스(안무: 이소영)의 〈시체옷〉, 김숙현-조혜정(안무: 김성현)의 〈스크린+액션!〉, 진달래-박우혁 등의 〈움직이는 현재〉, 김뉘연-전용완(안무 출연: 강진안)의 〈문학적으로 걷기〉, 김보라(안무)-신제현의 〈꼬리 언어학〉, 김보라-신제현(안무: 박상미, 양지연, 안현숙)의 〈쾌락의 정원〉, 태이(출연: 김건중 외)의 〈잠물결〉, 김정선(안무)-마티아스 에리안의 〈풍경 없는 지역〉이 속한다.
다종다양한 매체의 참여에 대해 개방적인 것은 퍼포먼스의 강점이다. 게다가 퍼포먼스는 캐릭터나 선형적 스토리텔링을 무시하는 경향이 완강하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런 경향과는 대조적으로 김숙현-조혜정(안무: 김성현)의 〈스크린+액션!〉은 자기 그림자를 양도한 자의 후회와 깨달음을 단편영화로 묘사하였다. 여기서는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칼리가리박사의 밀실〉 〈노스페라투〉 등)에서 차용된 이미지들에다 그와 유사하게 모방된 현대의 이미지가 섞였고, 대사를 자막으로 처리하고 화질을 거칠게 하는 등 무성영화 시대의 감성으로 처리된 이미지들이 셋으로 나뉜 화면에 투사되었다. 이 단편영화가 펼쳐지는 실시간에 영화 속 인물들의 분신들이 무대에서 영화에 호흡을 맞추는 실제 움직임을 전개함으로써 이 단편영화는 퍼포먼스의 일부로 변신하였다. 여기서 실제 몸 움직임들이 대체로 평이해서 더 해체될 필요가 있어 보였으나 관객은 스크린의 조작된 시공간과 실제 퍼포먼스의 비가역적인 시공간이 접속하는 현장의 체험을 누렸을 것이다.
태이(출연: 김건중 외)의 〈잠물결〉과 진달래-박우혁 등의 〈움직이는 현재〉은 멀티프로젝트홀에서 이뤄진 다매체 작업이다. 멀티프로젝트홀의 규모를 기준으로 말하면 모두 대형작이며, 이들 각각의 설치 작업은 그것대로 전시되면서 춤 또는 몸 움직임이 결합하는 이벤트가 여러 번 있었다. 두 작품의 이벤트는 모두 (현대) 사회 속 인간이 직면하는 수면 부족이나 기계처럼 조종되는 잠재의식을 표현하는 데 있어 몸 움직임을 활용하였고 설치 작업은 퍼포먼스의 장으로 기능하였다.
김뉘연-전용완(안무 출연: 강진안)의 〈문학적으로 걷기〉는 걷기가 움직임의 기본이라는 점에 착안하였다. 그들은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문학 사조의 작가 6인의 작품에서 걷기와 연관된 부분을 발췌해서 각기 국립현대미술관의 여섯 군데 장소에서 날짜를 달리하여 몸 움직임으로 구현하였다. 그들의 작업은 해당 작품의 내용 재현보다 작품 속 걷기(또는 걷기와 연관된 순간)를 움직임에 초점을 맞춰 표현한다는 점에서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일정상 두 군데서만 관람할 수 있었다. 기욤 아폴리네르(〈얼굴 없는 별〉)에게서 채택한 칼리그람은 내려다 보도록 관람하는 데 적절하도록 미술관 내 경복궁 마당에서 열렸고, 사뮤엘 베케트의 〈이름붙일 수 없는 자〉는 작중 인물의 항아리에 갇힌 이미지가 상상되어 미술관 내 미디어월에서 제시되었다. 두 작품(아마도 여섯 작품 모두)에서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강진안의 미니멀하되 밀도 높은 움직임은 퍽 인상적인 여운으로 남아 있다.
미술관 내에서 퍼포먼스는 다반사의 현상이다. 그렇더라도 국내 미술관 내 퍼포먼스에서 춤은 다소 뒷전이었지 않나 싶다. 이번처럼 춤이 미술관과 대대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내의 퍼포먼스가 확장과 변화를 향해 새삼 스타트업하는 것으로 해석될 만하다. 그 정도는 아니라면 적어도 정지된 이미지를 다량 축적하는 대형 미술관의 공간에다 일순간이나마 수시로 움직임, 즉 살아 있는 이동성(liveness)을 구현하려는 의도가 읽혀진다. 조형준, 김재덕, 이재영, 김보라, 김정선의 작업들은 이런 점에서 그 의의가 짚어진다.
극장을 벗어난 공간에서 퍼포먼스는 흔하고 춤이 가담하는 퍼포먼스가 희소하지는 않더라도, 이번 프로젝트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집중적 이벤트라는 점 그리고 영상 및 대형 설치 작업과 춤의 만남을 다원예술 형태로 가능케 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렇더라도 굳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해야 할 이유, 다시 말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퍼포먼스를 행해야 할 특이성을 구현한 작품은 필자의 관람작 가운데 절반 정도였다. 즉, 국립현대미술관 자체를 관람객이 역발상으로 대하도록 하는 차원에서의 낯설게 하기가 더 필요해보였다.
덧붙여, 이번 프로젝트에서 퍼포먼스 작가의 의도를 관람객 입장에서 감지하기 애매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장르 간의 협업 달성에 치중하는 한편으로 작가의 의도가 특이하면 관객도 그에 호응할 것이라는 기대가 주도한 것 같은 인상마저 갖게 된다. 아울러, 퍼포먼스 예술의 특성상 작가의 의도, 즉 개념 설정에 대해 보다 자상한 소개가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극장에서는 여의치 않아 국립현대미술관을 수행 공간으로 택한 퍼포먼스는 그 수행 공간의 맥락 변경을 비롯하여 작품 전개 방식, 적절한 움직임과 몸, 관객의 감성과 반응 등 공연의 관행을 일거에 변동시키기 마련이다.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이와 같이 공간에 대해 가하는 일종의 균열 내기는 공간의 또 다른 발견뿐만 아니라 몸과 움직임(춤)과 관객의 예기치 않은 발견 및 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 퍼포먼스와 관계가 깊은 낯설게 하기의 작업은 이 모두를 집약하는 것 같다.
주최 측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지속과 참여의 형식으로서 ‘공연과 전시 사이의 긴장’이 목격될 것을 기대하였고, 또 이를 동시대예술의 화두라 하였다. 동감이 가는 화두인 데 비해, 그럼에도 이번 프로젝트 현장에 무용인들이 관람객으로 참여하는 등으로 얼마나 관심도를 보였는지 의문이다. 물론 무용인들만의 관람객이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 입장객으로서의 관람객이 한결 중시되어야 할 터이고, 옥내 퍼포먼스는 그 속성상 대개 소수의 관람객을 상대로 진행되는 게 상례이긴 하다. 이런저런 관람객의 호응도를 지표로 이번 프로젝트를 마냥 재단할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기획과 홍보의 추진 측면에서 되새겨야 할 바가 적지 않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