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 안무LAB 〈여전히 안무다: 장치〉
재기 넘친 퍼포먼스, 그 뒤에 숨은 함정
방희망_춤비평가

 국립현대무용단이 젊은 안무가들의 실험과 창작을 독려하기 위해 올해로 3회째 진행하고 있는 안무LAB의 연계공연이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나흘간 열렸다. 지난 1월에 무용 아닌 타 장르 예술가까지도 지원할 수 있도록 공개모집하였고, 선발된 7인의 예술가는 3개월간 국립현대무용단 측에서 설계한 강의와 연습, 창작 작업 등을 거쳐 이번에 작품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안무랩은 그동안 “여전히 안무다”라는 타이틀 아래 진행되어왔는데, 이 ‘여전히’라는 부사의 수식은 ‘안무’의 개념을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는 현대무용계(라고 아우르기도 이제는 힘들지만)의 상황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것이다. 올해는 거기에 ‘장치’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이번 안무랩의 큐레이터 장혜진이 밝혔듯 이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실제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안무’의 개념 진화를 도모하듯 ‘장치’까지도 의미를 확장하길 시도하며, ‘무대에서 무언가를 작동하게 하는 어떤 매커니즘과 시스템 설계로서의 안무’를 ‘장치’의 개념에 넣길 원한다.
 이제 3회째를 맞이하면서 축적된 바탕이 있고, 과거 참여했던 아티스트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약속하는 의미로 올해는 2014-15 참여 아티스트 중 두 명을 뽑아 PART 1의 공연을 맡겼다(6월 22-23일, 평자 22일 관람).


 



 2014년의 참가자인 오설영은 이번에 〈빅빅빅땡큐〉라는 작품을 올렸다. ‘리틀엔젤스’ 활동을 통해 전통무용을 배우고 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안무가는 이제 성인, 독립 안무가가 된 시점에서 ‘리틀엔젤스’ 활동을 반추한다.
 본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오래된 자개무늬상에 골동품 족두리, 장구, 꽹과리, LP판 등을 늘어놓으며 리틀엔젤스와 관련된 기억을 소환한다. 동영상과 문선명 총재의 음성을 통해 보이는 리틀엔젤스의 정체성은, ‘어린이는 평화의 상징’이란 기치 아래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군부독재와 특정종교의 가치관이 맞아떨어져 형성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발레전공자가 한국무용을 가르쳤다든지, 한국춤을 전수할 때 강조되는 애매하고 두루뭉술한 명령들(예를 들어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 등)을 통해 요즘말로 웃픈(웃기고도 슬픈) 그 시절의 상황을 전달했지만, 그것이 마치 ‘리틀엔젤스’에서만 벌어졌던 일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다소 위험해보였다. 여전히 한국춤 전수 현장에서는 저러한 어법이 흔하게 행해지고 있고, 객석에서 웃음이 많이 난 것도 도제식 예술교육에서 스승의 ‘감정을 유지하라’는 모호한 압박을 경험해본 사람이 상당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동과 예술이 선전도구로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끔찍한 현실을 일깨우기도 하지만, ‘리틀엔젤스’의 문화적 성과라는 것은 과연 온통 부정당할 것만 있는가? 마치 개종자가 이전의 것을 강력히 부인함으로써 현재의 신념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안무가의 입장은 편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것 역시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일 수는 있겠다. ‘리틀엔젤스’를 통해 신무용/전통무용/한국무용/한국춤을 둘러싼 담론에 뛰어들고자 한 야심찬 출발은 좋았으나, 특정종교에 대한 희화화(맥콜의 등장이 꼭 필요했을까?)에 휘말려 진지한 질문으로 꿰뚫어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2015 안무랩 출신의 윤자영은 〈금박의 춤〉을 통해 경제활동의 가치로 평가되는 중년 남성의 몸, 그 쓸쓸한 풍경을 그려낸다. 발목에 금줄 리본을 묶은 두 사내의 몸은 배가 나왔거나 말랐거나, 전혀 무용수로 단련된 몸이 아니다. 다른 한 명은 완벽한 근육질의 몸을 가졌지만 쭈글거리는 주름과 기괴한 표정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다. 그들이 더듬이를 장착하고 ‘금’을 찾아 도는 고생은 경제 지표를 상징하는 그래프 막대의 끝에 앵두처럼 작은 열매가지 몇 개 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마지막 세 남자를 모아놓고 입으로 생수를 뿜게 한 모양은 ‘오줌누는 소년상’의 패러디인 듯한데, 더 이상 귀엽지도 않고 생산적일 수도 없는 이들의 초라한 초상이다. 소재와 주제 때문에라도 활기찬 움직임을 구상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업했겠지만, 그보다는 조형적인 어떤 순간, 이미지들을 먼저 구상하고 정해놓은 다음 사이를 채워 연결하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6월 25일과 26일의 PART 2(평자 25일 관람)는 올해 선발된 7인의 작품이 인터미션 10분 포함하여 세 시간의 장정으로 펼쳐졌다. 7인의 개성을 한데 모아 올해 안무랩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전개되었는지 바로 볼 수 있게 한 주최 측의 의도는 이해되지만, 낯선 개념들이 마구 돌출하고 실험적인 과정으로 채워지는 작품들을 연달아 보는 일은 관객 입장에선 상당한 집중력을 요하고 피로감도 크게 몰려온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김이슬의 〈An elephant in the room〉은 공연 전 아르코 소극장 1층의 매표소 앞에서 6명의 출연자들이 물 담긴 통에 발을 담근 채 줄서 있는 퍼포먼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극장 바닥에 체스판처럼 신문지를 배열했다가 구겨서 공으로 만들고, 플라스틱 통에 엉덩이를 집어넣다가 빼고, 물을 분무기로 뿌리다가 큰 통으로 쏟아 붓고, 한 명이 휘감은 이불 조각을 여러 명이 나눠 걸치는 등 일련의 동작들을 나열하면서 수시로 평면과 입체, 조각과 전체, 개인과 집단, 작은 것과 큰 것의 이미지 등을 대비시켰다. 비닐봉지와 투명 테이프, 가발 등 가장 많은 소품이 동원된 무대였지만 그럼에도 가장 난해하다고 느껴진 것은 작가가 의도한 대로, 우리는 절대로 전체를 아울러 볼 수 없기 때문일까.
 이은경의 〈무용학 시리즈 Volume Ⅰ:분리와 분류〉는 그가 참여자로서는 가장 경력이 많고 노련한 때문인지 그만큼 쉽고 직관적으로 와 닿는 작품이 되었다. 결국 해를 거듭해 진행되는 안무랩의 화두 ‘무용이란 무엇인가’ ‘안무란 무엇인가’에 대해 동료 지인들의 의견을 들려주고, 거기에 자신의 해석을 더해 펼쳤다. 그녀의 다양한 경력만큼 모아진 티셔츠를 껴입었다가 벗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후배가 그것을 다시 주워 입는 상황은 의미심장하다. 연극과 스포츠 사이 어디쯤 위치해온 듯한 무용이지만,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속에서도 살아있음, 춤을 발견하게 된다는 시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을 찾고 추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강진안의 〈여집합 집집집 합집여〉는 일정한 동작구를 설정해놓고 반복하면서, 뒤에 있는 두 대의 TV에 그 동작이 전송, 편집되는 양상에 변화를 주며 카메라의 시선 구성이 곧 안무가 되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일부를 가린 채 촬영된 모습은 실제 벌어지는 상황을 왜곡시키고 이것은 이란의 풍자만화가 Mana Neyestani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이전 녹화분을 송출하면서 라이브 중계인 것처럼 속이는 것은 빨간 빨대의 유무나, 타이밍의 어긋남 등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다.
 구)홍은예술창작센터 입주작가 시절부터 허를 찌르는 퍼포먼스에 참여해온 송주호는 〈응원세포〉를 통해 극장의 입지를 재확인한다. 채찍을 휘두르고 발길질이나 몸으로 관객을 밀어내면서(이날 아르코소극장의 객석은 완전히 접힌 채 관객들이 방석을 놓고 아무 데나 앉는 방식으로 공연이 이루어졌다) 관객의 출입을 막을 때 치는 배리어를 놓는다. 변두리로 내쫓긴 관객은 송주호와 박유라 두 사람이 객석 철골구조물에 밧줄을 묶어 힘들게 끌어내는 모습, 객석을 향해 절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소통을 위해 마련된 극장이란 공간, 그 소중함에 대한 역설이다.


 



 인터미션 후에 진행된 세 편의 작품은 기존 무용공연의 범주에서 탈주하는데 가속도를 낸 작품들이라 할 수 있었다. 나연우의 〈오늘의 공연 2016.6.25.〉는 공연을 준비하는 일련의 움직임까지도 안무의 영역에 넣었다. 세 명의 출연자가 에코백을 들고 나와 리플렛을 접고 비닐에 넣은 다음 연필을 붙인다. ‘생활의 달인’이란 프로그램에서도 단순 작업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사람들이 나오듯 일상의 동작 특히 공연을 홍보하는 움직임도 안무의 영역으로 포섭할 수는 있겠지만, 25분의 기계적인 작업이 결국 그것을 나눠주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예측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리플렛은 ‘내일(6.26)의 공연’에 관한 것이었으며, 출연진 명단은 외국인 이름으로 채워졌는데 어떤 내용으로 진행되었는지 궁금하다.
 주현욱의 〈21세기를 위한 SF안무〉는 낭독자 세 명과 퍼포머 두 명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낭독자들은 달의 뒷면을 보는 것, 자동차 경주, 컴퓨터가 부르는 노래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퍼포머들은 옆에서 그에 맞는 장비를 움직이는 것으로 시연한다. 미래를 예측한 학자들의 책을 세운다음 쓰러뜨리는 것은 무엇도 절대적으로 단언할 수 없는 21세기의 상황을 대변한다. 안마의자에 앉아 그것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이 작품이 내린 결말이다.
 남정현의 〈그것과 그 것〉은 아마도 관객에게 가장 당혹스러운 작품이었을 것이다. 출연진은 오직 암흑과 여러 겹의 굉음, 가끔 희미하게 숨통을 틔우는 빛뿐이다. 작품의 시작과 끝, 장면 전환을 위한 암전은 약속과 훈련을 통해 익숙해져 왔지만, 이렇게 통으로 주어지는 암흑은 경험해본 적이 없다. 굉음의 레이어링에 주는 변화, 공간 속에 퍼지는 포그, 그것의 움직임을 조종하는 외부의 연한 바람, 이 모든 것이 ‘안무’의 이름을 달고 있다.


 



 〈여전히 안무다〉라는 타이틀을 걸고 행하는 이 모든 작업들은 나름의 정당성을 갖고 있다. 큐레이터의 ‘안무란 안무가 결여한 것이다’라는 제안처럼, 우리는 비움이나 자기부정을 통해야만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작가들 중 마르셸 뒤샹의 〈샘〉이나 존 케이지의 〈4분 33초〉처럼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을 내놓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도 벌거벗었다 말할 수 없는 백성처럼 관객은 작가들이 입수한 온갖 현대 철학, 개념화·범주화와 화려한 언술에 속아 미혹당할 수도 있다. 특히나 국립현대무용단이라는 어떤 권위의 이름 아래 이루어진 작업이라면 말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여 진행하는 프로젝트이니만큼, 일방적으로 젊은 안무가들을 지원하는 목적뿐만 아니라 국립현대무용단 역시 그들의 아이디어를 수혈받아 레퍼토리에 깊이와 다양함을 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재기 넘치고 발칙한 퍼포먼스들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관객에 대한 기만을 걱정하게 되는 것은, 논리와 새로움만 좇다가 ‘감동’이라는 기본을 잊어버리는 것 같은 경향이 자꾸만 보이기 때문이다. 

2016. 07.
사진제공_국립현대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