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홍선미무용극단 NU는 2014년 유진 오닐의 희곡 〈느릅나무아래욕망〉을 〈그녀의 잔상〉이라는 제목의 무용극으로 발표했었다. 창단 20주년을 맞은 올해는 원제로 돌아오면서 연출 또한 희곡의 내용을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어 올렸다(3월 24-26일 서강대메리홀 대극장, 평자 26일 관람).
공연이 시작되기 전 객석에서 내려다 본 무대 풍경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가 있었다. 요즘 어지간한 현대무용 공연에서 보기 드물게 손으로 직접 그리고 글씨를 쓴 포스터에서 풍기는 인상도 그렇지만, 넓은 폭으로 천을 잇고 드리워 표현한 느릅나무의 형태나 얼룩덜룩 페인트칠을 한 큰 통들을 늘어놓은 모습까지 어떤 ‘손맛’이 느껴진다. 자로 잰 듯 깔끔하게 떨어지는 세련미는 덜하지만, 그것은 인공미가 덜하다는 뜻도 되고 극의 배경과도 어울린다.
이번 공연에서는 탐욕스런 늙은이 이프레임 캐벗, 그의 세 아들인 시미언, 피터, 애번 그리고 캐벗의 세 번째 아내가 되어 농장을 찾아온 애비까지 다섯 인물을 배우로 세우되, 극에서 초반에 사라지는 시미언과 피터는 장면마다 감정을 표현하는 배경의 군무를 겸하게 하고 갈등의 중심인 캐벗과 애번, 애비는 흰 옷을 입게 하여 분리시켰다. 가장 욕심 많은 세 사람이 깨끗한 흰 옷을 입은 것은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지만, 한편 그들이 각자 욕망에만큼은 아주 충실하고 순수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름 설득력이 있는 설정으로 보였다.
그리고 희곡 속에서 중요하다 생각되는 대사들을 추출하여 짧게 끊어 외치게 하는 방식으로 복잡하게 얽힌 주인공들의 사연과 내면을 비교적 간결하게 전달하였다. 예를 들어 초반에 애번이 반복하는 “예쁘다”는 말은 원작에서 애번이나 캐벗이 하늘을 보고 경건에 가깝게 감탄하는 말이지만 홍선미의 작품에서는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나타내는 대사로 전용(轉用)되었다. 생략된 대사와 감정들은 배우의 뒤편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대신하는데, 희곡의 지시문에서 ‘황소처럼’, ‘들짐승처럼’이라 서술된 것에 근거하면서도 안무가의 해석을 보태 원숭이, 뱀, 돼지 등등 온갖 동물적인 움직임을 많이 구사하도록 만들었다.
군무에서 무용수의 몸으로 돌무더기를 쌓는 동작에서는 고된 노동을 하다 죽은 캐벗 집안 두 여인이 연상되고, 애번의 어머니 역을 맡았던 무용수가 군무의 꼭대기에 올라 앉아 집안 전체에 저주를 드리우는 동작을 통해 극 전체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장면 등도 눈에 띄었다.
평자가 가장 의미 있게 읽은 장면은 애번을 비롯한 무용수들이 무대를 좌우로 가로질러 달려가면서 바닥을 뒹굴던 것이었다. 몇 번 반복되어 나온 이 장면은, 구성 자체는 무용수들이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달려 나가도록 아주 단순하게 짜여졌다. 각자 목표한 바를 향해 굴하지 않고 이글거리는 의지를 내뿜는 강인한 성격의 세 주인공을 표상하는 듯하여 인상 깊게 보았으나, 각 인물들의 의지에 반(反)하는 장애물이 닥친 순간 그들 내면의 갈등과 그에 대한 대응 등의 의미를 풍부하게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이 좀 더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캐벗과 애번, 애비 세 사람은 하나의 농장과 집을 두고 서로 ‘내 것’이라 주장하지만 실제 그들이 방이라 부르며 끌고 다니는 것은 원형과 타원형의 통들이다. 이것은 이번 공연의 전신인 〈그녀의 잔상〉에서 사용했던 구체(球體)보다 노골적으로 주제 의식을 전달하는데, 애비나 캐벗이 그것을 들락거리며 몸을 숨길 때는 마치 하찮은 벌레가 된 듯한 인상을 주게 만들고, 나중에는 겨우 자신의 몸 하나 뉘일 수 있는 ‘관’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평생을 매달린 재산(동물의 관점에서라면 ‘영역’)이지만 결국 그에 대한 탐욕은 허망할 뿐이다.
하지만 그 ‘탐욕의 허망함’이라는 주제 의식을 보여줄 때도 호흡은 적당히 안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진 오닐의 원작이 워낙 유명하니 많은 관객이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의 잔상〉과 〈느릅나무아래욕망〉을 거쳐 오면서 안무가의 이해가 높아지고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입장이 정해졌다 하더라도, 극이 처음 시작될 때는 앞으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감히 짐작할 수 없다는 듯 감쪽같이 속이는 마법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상징적인 장치들을 동원한 것으로도 분위기 조성은 충분하다고 보였는데, 애번 역할은 울부짖음으로 일관하여 정작 아기에 대한 비밀이 드러나고 애비의 범죄가 행해지는, 가장 중요한 갈등이 폭발하는 지점에선 힘을 잃어버린 듯 했다. 배우의 과잉된 연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3막부터 눈에 띄게 느슨해지고 지루해진 자체가 너무나 초반부터 강한 모드로 방점을 찍으려 했던 연출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안무가가 직접 애비의 어머니로 출연하여 느릅나무의 그늘을 거두고 인간사를 정리하는 의도로 구성한 에필로그의 춤이 의도한 만큼의 감동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배우와 무용수를 거의 구분하기 힘들만큼 출연진의 신체를 단련시켜 하나의 색깔로 완성해낸 점, 정혜란을 비롯한 무용수들의 적극적이고 활달한 움직임과 능숙한 감정표현- 특히 이것은 현대무용을 전공한 무용수들에게서 보기 드문 장점인데 극무용을 꾸준히 구사하면서 갖추게 된 기본기라 생각된다- 등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탄탄한 내용을 갖춘 텍스트를 중심으로 인간성에 대한 탐구를 꾸준히 개진하면서 춤으로 표현 가능한 영역을 찾아 확장시키는, 이름부터 ‘극단’임을 표방하는 홍선미무용극단 NU만의 뚝심 있는 작업이 앞으로도 꾸준한 성과를 거두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