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윤정 · 정현진 · 김보람
표현의 자유, 춤 활성화의 혈맥이다
김채현_춤비평가

 올 하반기 우리 문화예술에서 손꼽을 화두는 표절과 검열이었다. 표절처럼 표현의 자유를 오용하는 것도 그러려니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비록 최근의 검열 사태가 춤에서 비롯되진 않았을지라도 물론 방치할 수 없는 일이다. 90년대 후반기 공연예술윤리위가 폐지된 후 표현의 자유가 그런 대로 작동해오던 터에 느닷없이 불거진 검열은 표현의 자유가 언제라도 침해받을 수 있고 또 그럴 가능성이 항상 잠복해 있다는 점을 웅변한다.
 실제 검열은 어떤 특정 작품을 대상으로 행해진다. 그래서 혹시라도 검열을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 행해진 검열은 불문율처럼 검열 자체를 관행화시키는 전염력이 강하다. 만성화되어 오히려 이젠 망각되다시피 하는 예술의 위기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는 원론에서뿐만 아니라 특히 순수(고급)예술 활성화 측면에서도 수호되어야 한다. 억압의 다른 이름인 검열이 궁극에 자기 검열, 심지어 창작 위축을 유발해서 예술 활로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기 성향과 다른 춤이라도 자유로이 표현되고 유통되어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춤을 보는 이상의 위안을 받지 않을까.
 많은 춤꾼들이 춤의 활로를 찾아 씨름하고 있다. 춤 활로의 종착점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종착점이 얼른 왔으면 싶을 정도로 춤 활로를 많이들 목마르게 기다린다. 춤 활로엔 정석(定石)도 없고, 하다 보면 정석이 된다. 그래서 활로에 이바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이윤정 안무 〈75분의1초〉
 
 올 하반기 김보람은 앰비규어스무용단의 <예술을 위한 조화>(9월 5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가족이 함께 즐기는 힙합을 연출하였다. 그의 힙합은 기계적 숙련도를 뛰어넘어 강한 해학적 표현으로 예술성을 갖춰왔으며, 지난 초가을 안산에서 그의 힙합은 스펙터클한 춤극 형태로 진화하였다. 

 이와는 전혀 대조적으로 이윤정의 〈75분의1초〉(12월 15-16일. 서강대 메리홀)는 무대에서 자각하는 몸에서 (몸이 자각하려면) 춤이 핵심 매체임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춤 또는 춤꾼의 자의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매우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앞의 두 경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할 정현진의 <파탈>(12월 15-16일. 아르코예술극장소극장)은 불안에 놓인 어느 일상적 에피소드에 춤성을 버무리면서 사랑의 감정을 우리 면전에서 스케치하였다.
 이윤정은 서강대메리홀 대극장의 객석을 차단하고 무대 공간에 객석과 무대를 새로 설정하였다. 3면을 무대 객석으로 에워싼 중앙에서 세 춤꾼(공연선·용혜련·전지예)은 균형과 불균형을 반복하며 춤을 끌어간다. 75분의1초는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刹那)의 시간 길이만큼의 물리적 측정치이다. 아마 우리가 균형을 취하지 못하는 그 짧은 순간도 75분의1초로 수치화되는 듯하다.




 춤꾼들이 무시로 겪을 자신들의 불균형을 춤작품화하는 일이 없진 않았겠으나, 〈75분의1초〉는 가식적인 불균형이 아니라 실제 무대 현장에서의 불균형을 춤 매체로 동원한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실제의 불균형을 재현하면서 한 편의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이번의 작업은 사실상 몸의 현존 상태와 심적 인지(認知, recognition)를 동시에 의도적으로 구현해야 한다. 그러한 현존을 인지가 유도하는 듯 하면서도 인지가 현존에 양보해야 하는 두 겹의 층위를 하나의 실체로 모아들이는 세 춤꾼의 춤은 그러므로 상당히 복합적이다. 몸에 대한 느낌에서 다시 몸에 대한 자각(自覺)으로 회귀하는 모습은 춤이 실존적인 사유를 동반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75분의1초〉는 이윤정의 춤 행로에서 이정표로 남을 작품이다.



정현진 안무 <파탈>

 <파탈>은 팜므파탈(치명적인 여자)이 그 출전이겠지만 여기서는 치명적인 남자(옴므파탈)를 가리킨다. 외모가 뛰어난 남자 둘, 내면이 매력적인 남자 하나 등 치명적인 세 남자 사이에서 그 외모를 택할까 아니면 내면을 택할까를 따지며 줄타기하는 한 여자는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네 사람이 서로에 대해 노출하는 다양한 태도를 스케치해서 사랑의 현상을 건드려보는 이 작품에서 움직임과 사랑의 감정은 아주 절제된다. 냉랭한 긴장과 애타는 열정을 오가며 마음 졸이면서도 여자에게서 끈을 놓지 못하는 그들(여자도 그렇기에는 마찬가지다)을 객석은 사뭇 긴장하며 주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는 얼마간의 구체적 요소 또는 일탈 현상을 덧붙여 여심(女心)과 남심(男心)을 구현하는 캐릭터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더 많이 명시해도 좋을 것이다.
 




 <파탈>에서 김지혜와 이제성 등 춤꾼들의 움직임은 조형감이 돋보인다. 이 작품의 미덕은 그런 움직임들을 남발하려는 유혹과는 거리를 두는 기조를 시종일관 유지한 점이다. 여기에 덧붙여 DJ가 라이브세트를 휴대하고선 무대 여기저기 현장에서 디제잉을 진행한다. 음향 박스에서 해도 될 일을 굳이 무대에서 진행함으로써 목격자로서의 일정한 개입을 시사한다. 그리고 공연 전부터 소극장 무대 바닥 곳곳에 세워 놓인 사각형 나무 널빤지(백과사전 크기)를 하나씩 끌어 모은 다음 무대 한 켠에서 드릴을 사용해서 이리저리 짜맞춰보는 여성 솔로 퍼포먼스가 간단한 설치미술처럼 공연 내내 펼쳐진다. 스튜디오 작업복 차림의 여성이 행하는 이 퍼포먼스는 공연과 무관한 듯 진행되지만 실은 그것에서 유추되는 것은 성형미용 같은 소비적인(?) 일로 우왕좌왕 하는 여성의 내면이다.
 〈75분의1초〉는 직립, 찰나의 잦은 불균형 그리고 약간의 뒤엉킴으로 구성되며 <파탈> 또한 작품 동선이 복잡하지도 길지도 않아서, 두 작품은 각각 일견 단순한 구도를 취한다. 작품의 맥락을 참조해서 면밀히 주시하게 된다는 점은 각 공연이 주는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다.



김보람 안무 <예술을 위한 조화>

 이와는 달리, <예술을 위한 조화>는 아주 풍성하다. 예술에 가치를 두어야 하는 예술의 강점으로서 예술적 조화를 염두에 둔 듯한 이 공연은 빅뱅부터 선사시대를 거쳐 현대까지의 인류 문명사를 펼쳐보인다. 

 신재희가 디자인한 인류사의 영상 이미지들은 인류 문명사를 춤이 쉽게 풀어보도록 시각화한다. 구석기 알타미라동굴벽화 그림이나 지폐 등등 잘 알려진 이미지들이 다큐멘터리 화집처럼 펼쳐진다. 군포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실황 연주는 <볼레로> <왕벌의 비행> <목신의 오후> 같은 친근한 곡들로 춤을 뒷받침하였다.




 영상 이미지와 클래식 곡을 배경으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가족을 위하여 장구한 인류사를 집약하였다. 춤에서 이와 같은 시도가 있었을 법하다. 그래도 <예술을 위한 조화>는 가족을 위한 인류사 소재의 무용극으로서 완성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 자잘한 기교의 가지를 쳐낸 힙합을 경쾌하게 선사하면서 그들은 춤 기교에 대해 과도하게 의욕을 부리지 않는다. 일단 가족의 눈높이에 맞추고선 그 다음에 인류사와 춤으로 향하는 가족의 눈높이를 사뿐 끌어올리는 전개 방식은 적절해 보였다.
 현대 사회의 정장 차림 부분이 있는 반면 후드나 보호 헬맷을 쓰고 때로는 우주인이나 외계인처럼 등장해서 환상적인 분위기도 돋운다. 중간에 약간의 풍자를 삽입하고 코믹한 장면도 연출하면서 앰비규어스무용단은 교과서 역사를 벗어나 나름 자유스런 역사 읽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물론 종교 간의 화합도 잊지 않았다.

 75분의1초 찰나는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다. 이윤정은 〈75분의1초〉가 삶의 균형과 불균형을 경고하는 은유로 읽히기를 원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보자. 무대 위 춤꾼의 찰나뿐 아니라 일반 개인의 찰나, 범사회적으로 중요한 증권거래소 거래나 정치적 결정, 119 구조, 재난 구조 등 특정 직업군의 찰나도 있다. 그런 찰나도 춤작품화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예술을 위한 조화>를 보며 인류사 이외에 과학, 한국사 같은 소재도 그들의 손으로 다듬어질 법한 것으로 보였다. 또한 팜므파탈, 옴므파탈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치명적인 인간들이 드물지도 않고 갈수록 불어나는 것 같아 <파탈>의 속편은 상당할 것 같다. 이러한 상상적 소재를 춤으로 실현하고 않고는 각자 소관이겠으나, 상상이 실현되는 것을 보려면 이런저런 표현의 자유로써 춤꾼들을 뒷받침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2016. 01.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