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안무가 정영두가 간만에 내놓은 신작에 김지영, 엄재용을 비롯한 실력 있는 무용수 일곱 명이 결합하였다는 점에서 공연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푸가〉를 10월 9일 엘지아트센터 첫 공연으로 보았다. 11일까지의 엘지아트센터 공연이 끝나고 대체로 호평이 주를 이루며 쏟아져 나왔던 것 같지만, 평자에겐 물음표 세 개 쯤은 머릿속에 담아두게 되는 석연치 않음이 있었다.
장르간의 융합과 통섭을 논하면서 갖은 실험으로 무대를 어지럽히며 관객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이즈음 무용 공연의 시류를 비추어보면, 〈푸가〉는 꽤 많이 공들인 안무로 단정하고 깔끔하게 완성시킨, 간만에 ‘작품다운’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무가의 변 중 ‘메시지 없는 것이 메시지다’라고 갈음되는, 음악 텍스트를 신체로 온전히 치환하여 구현하겠다는 작업 목표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동안 이것을 목표로 세상에 나왔던 작품들 중에 결국 음악을 넘어서는 설득력을 보여준 춤이 드물었기도 하고, 또한 무용가들 스스로가 자꾸만 춤을 음악의 하위 혹은 후생 장르처럼 취급하고 있기에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는 생각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또 왜 하필 바흐여야 하는지, 바흐가 새삼 거론하면 입 아플 정도로 위대한 작곡가임은 분명하나 그것은 일반론일 뿐, 기법 자체를 분석하여 무대로 옮겨야 할 만큼 우리가 매달려야 할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여러모로 감흥은 덜하였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안무가 정영두가 악보까지 파고들어 진지하게 연구했다는 이 작품을, 통영을 돌아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 도착한 마지막 공연을 (10월 24일)을 한번 더 보았다. 〈푸가〉 공연의 끝을 함께 하면서 첫 감상에서 모호하게 남았던 작품의 장단점이 보다 명확하게 다가왔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 BWV 1080〉으로부터 가져온 아홉 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1번과 3번 중 푸가 악장 두 곡, 총 11곡이 쓰인 이번 작품에서는 ‘눈으로 보는 음악’을 만들겠다는 컨셉트에 맞게 여러 가지 안무 방법이 동원되었다.
김지혜, 도황주, 최용승, 하미라 네 명의 무용수가 등장한 대선율 첫 곡은 푸가의 돌림노래 성격을 가장 쉽고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전체 공연의 밑바탕 역할로 설계된 장면이었다. 현악 사중주 버전에 맞추어 차례로 등장한 무용수들은 각자가 맡은 악기의 선율에 따라 비슷한 동작구를 반복하면서 조밀하게 짜인 채 움직였다. 이후에도 대체로 첼로 같은 저음의 악기를 남자 무용수가 맡는 식이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았던 게, 선율의 주도권을 쥔 악기에 동작의 주도권을 쥔 무용수가 따라가는 방식으로 비틀기도 했다. 하강하던 선율이 몇 도씩 도약하는 반전이 일어날 때 접었던 다리를 쭉 스트레치 하는 등 음악에 맞추려고 애쓴 동작들이 보였다.
엄재용이 솔로를 맡은 두 번째 곡에서는 안무가의 유머감각을 느낄 수 있었는데, 동양의 무술 권법을 시전하는 것 같은 동작은 혼자 추는 춤이지만 보이지 않는 상대를 상상케 했다. 푸가의 달아나고, 쫓아가는 두 가지 개념을 재미있게 연결시킨 셈이다. 피아노 연주 버전이 사용된 세 번째 장면에서는 김지혜와 하미라가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왼손과 오른손 역할이 되어 만났다 떨어짐을 반복하였기 때문에, 피아니스트의 손의 움직임이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악보에 스타카토가 있을 때는 플리에로 뛰어오르거나, 잔결꾸밈음이 나올 때는 손을 뒤집으며 떠는 식으로 기호를 표현하기도 했다.
김지영과 엄재용, 윤전일이 트리오를 이룬 카논에서는 김지영의 노련함이 안무 이상의 것을 이끌어낸 듯 했다. 작품 전체에서 가장 서정적이기도 했던 이 네 번째 곡에서, 느리게 진행되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빈 공간을 김지영은 긴 호흡으로 감싸 안으며 메꾸었다. 한숨처럼 나직한 첼로의 선율을 연주할 때 첼리스트가 첼로의 몸통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것처럼, 김지영이 음악에 접근하는 태도도 그러하였다. 음악이 끝난 후 정적 속에 김지영이 푸가의 주제를 다시금 재현하며 출 때, 연주자도 청중도 음악의 여운을 가슴에 간직하며 되새기게 되는 푸가의 최면 같은 아름다움이 극한에 다다른 명장면이 되었다.
도황주와 최용승의 유쾌 발랄한 듀엣, 하미라의 조밀하고 단단한 솔로 춤을 지나 10여분이 넘는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의 푸가 악장에 이르렀을 때 작품은 클라이맥스를 맞이하였다. 단일 악기의 화려하고 긴 곡에 일곱 명의 무용수가 솔로부터 전원 군무에 이르는 다양한 구성으로 번갈아가며 등장하도록 매치시킨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엄재용과 윤전일 두 발레리노를 기용한 10번째 곡까지 발레의 기본 동작들이 날 것으로 삽입되면서 부쩍 안무가 느슨해진 느낌이 들었다. 무용수 각자의 개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각자 몸에 익은 동작들로 장면을 꾸미도록 맡겼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무가의 절제된 감각과 집중력은 이 장면부터 하향세를 그렸다.
6곡까지 제시했던 동작의 주제들을 다시 부드럽게 헤쳐 반복하며 다지면서 내실을 기해도 좋았을텐데, 새로운 것들을 쉼 없이 구상해 넣어야 한다는 압박이 원인이었을까. 마지막 미완성 푸가에 이르러서도 침잠하며 수렴하는 음악의 분위기와 상관없이 너무 빼곡하게 직조해 넣은, 과열되어 붕 뜬 춤이 마무리를 가치 있게 만들지 못하였다. 바흐가 현란한 대위법 실력을 뽐내려는 목적으로만 이 곡을 구상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절대자 혹은 대자연의 질서에 대한 경외심, 가장 작은 사물조차도 우주의 신비를 고스란히 갖고 있기에 그로부터 큰 이치를 꿰어낼 수도 있다는 지혜가 위대한 음악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메시지 없음이 메시지’라는 생각에 함몰되었던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묻고 싶어지는 부분이다.
한편 상체에만 집중된, 특히 오른팔을 수직으로 올리고 왼팔을 수평으로 든 상태에서부터 풀어나가는 안무가 많았는데, 그토록 다양한 아이디어에도 불구하고 왜 스텝에 집중한 안무는 고려하지 않았는지 아쉬움이 있었다. 대형 극장을 위한 작품이고 조명의 설계에 따라 얼마든지 스텝의 궤적에 주목시킬 수 있으며 발재간이 좋은 발레 무용수들을 기용했기에 충분히 이끌어낼 만한 부분인데 말이다.
몬드리안과 전통 나무 격자문을 연상시키는 단아한 무대장치는 작품 전체의 톤과 잘 어울렸으나 다소 소극적인 해석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일부를 가리거나 별도의 틀을 새로 겹치는 방식으로 변화를 꾀했지만 후면을 꽉 채운 무늬가 무용수를 배경에 묻히게 한 측면이 있다. 주제 의식에 보다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아예 단순한 조각들로 여백과 각기 다른 조합을 만들며 큰 그림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10월 24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해돋이극장에서 관람한 마지막 공연은 엘지아트센터와는 다른 편안함이 있었다. 엘지아트센터와 달리 무대의 높이가 맨 앞줄 객석보다 낮아서 시야가 밝게 확보되었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은 엘지아트센터와 〈푸가〉를 공동 제작했고 이 작품으로 ‘몸짓페스티벌’의 포문을 열었는데, 11월 7일까지 진행되는 이 페스티벌은 상주단체인 김보람의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뿐만 아니라 김설진의 Mover, 국립현대무용단의 〈춤이 말하다〉까지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때문인지 뜻밖에도 다수의 청소년 관객이 객석을 메우고 진지하게 관람하는 흐뭇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민간 극장과 공공 극장이 협력하여 제작한 좋은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안산 공연에서는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들어가면서 독자적인 공연 팸플릿이 나오지 않고 페스티벌 리플렛으로 대체된 점이 안타깝다. 무용 공연 감상 인구를 확충하려는 노력에는 작품에 관한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려는 정성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공연장에 직접 발품 팔아 다녀왔는데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귀한 정보, 만든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팸플릿을 얻게 되면, 다음번에도 공연장을 찾는 것은 그만한 수고를 기꺼이 감내할 만한 일이 된다. 공연을 애써 만들고도 인터넷 검색하면 그냥 알 수 있는 언론 매체의 보도 기사를 로비에 게재하는 것으로 전달을 끝내버리면, 같은 공연을 감상한 서울과 안산 관객의 정보력 차이를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겠는가. 지방의 공공 극장으로서는 드물게 무용에 꾸준한 투자를 하고 있는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이기에 더욱 안타깝다. 덧붙이자면, LG아트센터 공연에서부터도 작품에 삽입된 음악이 어떤 연주자의 연주본인지 밝혀두는 것이 좋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