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넌버벌 오피스 어드벤처’를 표방하는 덴마크 니앤더 극단의 〈블램!〉이 LG아트센터에서 아시아권 최초로 공연되었다(6월 11-14일). 이 작품은 2012년 덴마크의 리퍼블리크 극장에서 초연된 후 북유럽을 투어하며 인기를 얻다가 2013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진출하면서 크게 성공을 거두어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블램!〉은 네 명의 화이트칼라 회사원이 답답한 사무공간을 배경으로 액션 활극을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암전 후 무대가 밝아지면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가만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기에는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 좁은 칸막이로 나누어진 세트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업무 외에 딴 짓을 할 수 없게끔 나지막한 높이로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은 상사의 눈초리를 피해 서로 모의도 하고 장애물 경기를 하듯 쉽게 넘어 다닌다. 여기에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껐다 켜지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 목이 부러진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스탠드, 공처럼 단단하게 구겨진 서류 뭉치들이 피로한 사무 환경의 분위기를 한껏 더한다.
넌버벌이라고는 했지만 초반에는 블라블라 하는 음성의 고저와 성량의 크기를 이용하여 직장 내 수직관계와 갈등 분위기를 빠르게 조성하는 방법을 택했다. 소심한 직원 두 사람이 상사의 기에 눌려있을 때 배우 겸 연출가인 크리스티안 잉기마르손이 지각한 회사원으로 등장하면서 작품 전개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흐름을 주도하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경직된 사무 공간은 남자들의 숨겨졌던 야성이 본색을 드러내는 정글로 변해간다.
생존 경쟁과 야근으로 찌든 우리나라의 직장 문화에서는 ‘정글’이라고 빗댈 때는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통하는 무법지대란 뜻처럼 부정적인 편이지만, 적어도 이 작품 안에서는 넥타이를 푼 사내들이 액션영화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테스토스테론을 마음껏 뿜어내는 공간이라는 뜻이 된다는 게 흥미롭다. 그런 차이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팸플릿에 적힌 연출가의 인터뷰 중에서 ‘9-to-5 일상’을 언급한 부분이 눈에 띄어서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이 정도만 해도 ‘신의 직장’ 아닌가. 완벽한 복지 국가로 동경의 대상이 되는 덴마크에서조차도 이럴진대,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일에 매달려 질식당하고 있기에 어쩌면 이런 작품이 나올 여유조차 갖지 못한 것은 아닐까 서글픈 웃음을 짓게 된다.
작품의 큰 구도는 상사에게 직원 세 사람이 맞서는 형태로 시작하여 갑을관계를 전복시키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하게 짜여있진 않았다. CCTV 카메라, 정수기통, 스탠드, 주전자, 옷걸이 등의 사물들을 의인화하거나 게임의 소재로 삼아 병렬적인 에피소드들을 구성했는데, 거기서 배우들은 돌아가면서 동등하게 주연을 맡는 식이다.
이렇게 관객들의 눈길이 골고루 배분되면 배우들의 존재감이 균등해지고 공연에 활력과 재미가 더해지면서 한편으로는 회사 일을 수행해내는 말단 직원이라도 모두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주제 의식도 은근히 끼워 넣는 1석 2조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동작의 구성은 주로 총을 쏘거나 격투를 하는 거친 액션 영화, 게임들로부터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아크로바틱이나 스턴트라고 불러야 할 만큼 사무공간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뛰고 구르고 날아다니지만(형광등 갓 위에 올라가 그네처럼 타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이 작품의 대전제는 평범한 회사원의 일상탈출에 있기 때문에 배우들은 어느 정도 어수룩한 아마추어의 분위기까지 양념을 더해 연기해야 한다.
한편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진 켈리가 가로등에 매달려 노래 불렀던 것과 같은 장면을 따라하며 가벼운 춤을 선사하기도 했다. 여하튼 75분간 이 복잡다단한 동작들을 쉼 없이 수행해내려면 배우들의 물리적인 신체조건의 우월함이 전제되어야겠고 마임과 슬랩스틱, 춤, 액션까지 골고루 교육과 훈련을 제공할 환경이 있어야할 것이기에 그런 풍요로움이 저절로 부러워진다.
카드 놀이하는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을 주기 위해 테이블을 앞쪽으로 눕힌다던지, 공연 후반부 세트 전체를 들어 올려 기울임으로써 액션에 입체감을 더한 것은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유명한 영화나 만화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구성의 연속이라 참신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관객에게야 쉽고 빠르게 다가가지만 이런 공연이 흥행한다는 것은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근원적인 갈등에 빠뜨린다. 다른 매체에서 인기가 검증된 것을 복사해서 붙여넣기와 창작의 아슬아슬한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OST부터 시종일관 그렇게 밀어붙이면 오마쥬인 거라고 변을 붙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유의미하게 읽을 수 있었던 부분은, 이 공연을 가져온 LG아트센터가 고층빌딩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역삼동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요즘 ‘문화회식’이라고 하며 회식문화도 서서히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데 그래서인지 삼삼오오 관람하러 온 직장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앞으로 이렇게 작품이 소구될 타겟을 확실히 정하고 영리하게 만든 공연 상품을 더 찾고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