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주 작은 사항에 집중하면 일상적이고 진부한 것들이 다시 낯선 것이 되는, 그러니까 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덜 현실적이 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장현희의 작품 〈your name〉(6월 6일, 대구봉산문화회관 가온홀)이 그랬다.
다소 무거워 보이는 흰색 코트를 입은 군무진의 마임. 한 명의 무용수의 마임, ‘자신이 없어서 가슴이 아프고, 길이 엇갈린 것 같고,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로 시작된 움직임의 파동이 다른 무용수에게로 이어진다. 그것은 ‘길이 보이기도, 안 보이기도 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잘 알지 못하지만, 용기 있게 도전’할 것이라고. 혹은 누가 뭐라고 하든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가겠다는 젊은 의지의 춤이다. 반드시 드러나고 온전히 보존되어야 할 가치들이다.
마임에서 변주된 7명이 반복적으로 숫자를 세면서 무대를 오간다. 눈앞의 무대. 그 공간에는 아무 것도 없다. 강박적으로 숫자를 말하고 걷고 시선을 옮기고 의식을 옮겨도 무용수들이 만나는 것은 내내 같은 공간. 입에 물을 머금은 채 머리를 젖혀 뽀로록 소리를 내면서 끊임없이 걷는다. 어항 속 물고기가 숨을 쉬듯, 끊임없이 같은 공간에서 숨쉬기.
한 조각의 조명, 권효은의 솔로. 자신의 의지로 추는 춤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 같은 움직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32세의 현대무용가”의 일상이다. 개인연습, 학원 강사일, 이러저러한 공연들로 이루어지고 있는 건조한 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을 추겠다는 갈망을 가지고 있기에, 절망의 시간을 견뎌낸다. 하지만 시간과 함께 마모될 뿐인 자신의 육체와 일상의 범속함 속에 무너지는 자신의 정열을 마주 바라볼 수밖에. 춤에 단정함과 결기가 보인다.
솔로에서 발전시킨, 7쌍 14명의 군무. 춤을 향한 열정과 맞바꿔온 범속한 공간. 삶의 질적 변화가 불가능하고 생활의 무의미한 앙금들로 여전히 괴로울 것이지만, 춤을 추는 청춘의 찬란함을 믿는다는 의미로 읽힌다. 음악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남자무용수의 춤이 자해로 보일만큼 그 움직임이란 것이 파괴적이다. 삶의 무게로 바닥을 기고, 제대로 서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다른 이들이 나를 미친놈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는, 이들 젊은 무용수의 날카롭고, 한편으로 무모한 의식이 빚어내는 (춤)삶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한 춤의 장치와 설정의 세목들이 길어지면서 객석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내면을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모든 것을 폭로하듯 내뱉는, 과도한 진지함이 객석의 답을 흐트린다.
격자무늬의 무대장치가 무대 중앙으로 내려오면서 무용수들을 가두는 조명. 감옥이 생긴다. 호리존트와 오케스트라박스 쪽의 무용수들을 조명이 선명하게 경계를 만든다. 서로를 선동하듯 팔을 들어 주장하고 소리친다(표정으로만). 여유가 없다. 검정색의상의 깨끗하고 절제된 춤. 뭔가 많은 얘기를 객석에 전하고 싶은 듯, 무대를 서성이고, 무릎위에 손을 짚은 채 절룩거린다, 끊임없이. 시리고 아픈 시간과 기억의 회복. 조명디자이너 조동혁의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장이었다.
장의 빠른 전환 뒤에 피아노 선율에 묻어나오는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 노무현이다. 정신이 번쩍. 오래 전 “현실의 상황에 눈을 뜨는, 자각하게 하는 이들의 외침”이 있었다고. “600년 조선의 역사…진리와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했으나…, ‘저항’이라는 단어와 ‘죽임’을 당했다는 곳에서 목소리가 높아지며 반복되는 그의 육성.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인간적 한계의 인식과 그 고립감이 절절하다. 그가 생전에 한 강연이, 마치 넘어설 수 없는 운명에 몸을 던진 그의 대답처럼 들린다. 영리한 배치다. ‘권력’에 ‘저항’했으나 ‘죽음’, ‘진리’ ‘정의’라는 단어의 반복을 음악처럼 쓰는 남자무용수(정종웅)의 춤. 온몸을 뒤집고 엎어졌다 다시 일어나고 다시 뒤집고 엎어지기를 반복. 아프다. 운명이 간섭하지 못하는 어떤 자리를 춤으로 기어코 찾고야 말겠다는 듯. 역사의 분망한 감옥이 우리 기억의 어느 부분에 상처를 입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장현희는 노무현의 육성을 빌어 인간으로서의 삶이 불가능한 곳, 즉 춤의 현실을 말한다. 노무현의 운명처럼. 춤으로 자신을 가두면서 동시에 희망을. 동시에 젊은 무용수의 춤을 대비하면서 아픈 현실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준다. 젊은 무용수의 자기 연민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시대의 아픈 곳을 끄집어 내 끼어들면서 거리를 만들고, 그 간격이 너무 깊어지면 다시 일상적인 것, 다시 낯선 것이 나타나는 식으로.
9명의 무용수가 불행을 열거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쓰러지고 일어나고 다시 정렬하기를 거듭한다. 마치 안무가의 의식, 혹은 창작의 진정성을 검증하려는 것처럼 춤이 움직임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침내 서로를 일으키고 첫 장의 그림으로 돌아간 뒤, 객석을 응시. 안무자의 의식과 무용수들의 열정이 그대로 객석으로 전해지는 좋은 장이었다.
춤에 대한 습관의 획득은 철저히 몸과 몸의 운동성에 기초한다. 그 다음이 정신. 실수 없는 무용수들의 정확한 무대동선 이동에서 그들의 연습량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구체적인 동작의 모티브로 표현되는 관념들 또한 대체적으로 잘 드러났다. 세련되고 단단한 작품이었다.
장현희는 〈your name〉을 통해 기억의 깊이로 자신을 이해하고, 이해되기를 바란 듯하다. 안무가든 혹은 그저 평범한 한 인간이든 우리는 자신이 태어난 시대와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시대와 공간의 경계는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안무가 장현희는 전북대학교에서 강의하고, 대구에 산다. 무대 위 무용수들은 전주와 대구출신들이 섞여있다. 그녀가 어느 곳에서든 완벽하게 스미는 것, (춤현장에서)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your name〉의 작업의도를 그녀의 (시대)공간에서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방에서 춤작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춤으로 상처 입는 것은 춤을 잘 추는 재능과 열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라건대 (춤)현실 앞에서 항상 명철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