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시무용단(단장 예인동)이 5월 정기공연을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국수호 안무, 김태근 음악의 <신시(神市) - 태양의 축제>(5월 21-2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를 무대에 올렸다.
2013년 예인동 단장 출범이후 시무용단으로서 그간의 임이조 단장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난 새로운 시도의 <춤추는 허수아비>와 <서울 아리랑>으로 사회적이고 현대적인 형식에 대한 시도가 있은 후에, 2014년 <춤추는 허수아비 2.0>과 <두레>로 약간의 침체기를 가진 뒤라서 인지 이번 <신시(神市) - 태양의 축제>는 어느 때보다 많은 기대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막 강림, 2막 인간, 3막 전쟁, 4막 태양의 축제 로 14장으로 구성된 1시간 30분가량의 ‘대하 신화역사춤극’ <신시(神市) - 태양의 축제>는 그간 단군신화를 다룬 여느 작품과 다르게 요즘 한창 재조명되고 있는 홍산(紅山)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을 바탕으로 보다 현실적인 해석에 힘이 실려 있는 듯 탄탄한 전개(대본 이태권, 자료제공 우실하 교수)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5개의 거대한 신의 형상 조각물(무대 디자인 박성민)과 홍산문화 유물의 이미지로 만든 장대 소품(소품 디자인 김기향)들이 광활한 세종문화회관 무대를 꽉 채우고 장면에 따라 움직였으며 그 덕분에 무대는 안정감을 가졌고 춤의 밀도를 높이는 효과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작품은 무대장치 요소들이 많이 개선되었는데, 조각상 뿐 아니라 후방의 램프무대, 전쟁 장면에서의 높은 이동 소무대, 결혼 장면의 신단수와 중앙의 단이 오랜만에 시각적인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한층 밝아지고 강렬해진 LED조명과 무빙 라이트(조명 디자인 이중우), 보다 화려해지고 세련된 의상(의상 디자인 이호준)과 전면을 긴 조각으로 내려뜨린 붉은 색 천 등은 장면을 실감나게 하는 데 적절하게 사용되어 극적 클라이막스를 향하는데 중요한 주춧돌 구실을 하였다.
작품의 다이나믹을 늘어지지 않게 잘 끌어 간 요소로는 1차적으로 대본의 구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의 경쟁, 전쟁, 승리, 결합, 탄생이라는 전형적이면서도 건국신화에 필수적인 요소들이 북방문화의 색조 속에서 새로운 흥미를 자아냈으며, 각각의 장면이 군더더기 없이 이해 가능하도록 잘 정돈되어 형상화 되어있어 마치 사극 드라마처럼 이전까지의 무용극의 진부함을 벗어나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돈된 것이 큰 장점으로 작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신화에 대한 현실감이 있는 고증이 가지는 현실감이 신화를 보다 지금의 현실 가까이 끌어 당겨 주면서 환웅이 하늘의 사람들 3천 명을 데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에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신시(神市)’라는 주제 역시 다분히 서울시무용단의 레퍼토리로서의 타당성과 흡입력을 생성시킨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서울시무용단이 90년대 이후 창작춤의 선두에서 무용계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영화가 사라지고 난 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항상 빈약함을 느낄 수밖에 없던 것을 고려한다면 ‘신시(神市)’에 대한 반가움은 무용단과 단원 모두에게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무대에서 단원의 기량의 향상과 성실함은 어느 때보다 빛나 보였고 특히 주인공을 맡은 웅녀 박수정, 호족장 최태현, 환웅 신동엽의 기량과 연기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국립현대무용단이 생긴 2010년 이후 공공직업무용단의 사회적 역할과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 되면서 ‘공공성’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실현할 것인가는 각각의 무용단들이 자기의 현실에 맞도록 지속적으로 고민해야할 당면과제로 떠올랐다.
특히 공공무용단은 재정적 근거를 제공한 지역민에게 문화향수의 기회를 되돌리고, 설립 지역의 특색을 충족시키면서 각각의 규모와 상황에 맞도록 지역민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일이 우선 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무용단의 그간의 침체는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한 침체였지만 시대의 흐름에 맞게 상당히 용기 있는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고 체험함으로써 단원들의 의식과 현실감을 드높이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다져진 정체성에서 나오는 이번 작품에서의 폭발적 에너지를 느끼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를 다룰 때 너무 과장되거나 너무 현실감 없이 매몰되는 경향은 조심해야할 요소이다. 흔히 그런 경향은 무대를 채우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과장으로 작용할지 몰라도 자칫 관객이나 제 3자가 봤을 때 그 과도함 때문에 긍정적인 자부심을 넘어 과도한 자화자찬의 자기매몰로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 비현실성은 강해지고 부정적인 집단 무의식만을 강화하는 위험이 도사리게 된다.
이번 <신시(神市)>를 보면서 적절하게 아름답고 적절하게 용맹스럽게 묘사가 되었지만, 과도한 미화에 그치고 마는 비현실적 해석의 위험성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마고할미의 춤’과 달빛 아래 원경으로 보이는 강강수월래가 이전까지의 상투성에서 벗어난 장면으로 적절한 해석과 미적으로도 상당히 우수한 장면으로 꼽을 수 있었음에도 대부분의 장면들이 그간 국수호 안무의 상투성을 그대로 지닌 채 전개된 것은 하나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안무가 국수호가 프로그램북에서 밝히고 있듯이, “... 혹자들은 ‘한국춤 부재’를 성토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20여년 전부터 만연되어진 ‘극적 부재의 춤’들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발레 ‘백조의 호수’나 ‘지젤’을 보며, 스토리텔링의 한국 춤극의 필요성에 기대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라는 춤극에의 간절함은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춤에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춤극’은 춤의 뚜렷한 스타일 중의 하나로 특히 아시아의 전통춤들에서 유서 깊게 존재해왔으며 다음 세대로 문화 전달의 역할과 사회통합 역할을 담당해오며 다져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스토리를 거부하거나 시적 정서 편린의 춤, 형식파괴의 춤들이 만연한다 하더라도 춤극이 사라질 위험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춤극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진화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그것을 담당할 주체들이 지속적으로 양산되고 있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그 관점으로 보자면, 안무자가 우려하듯이 한국 춤극은 정체기에 있는 것이 맞다. 국립무용단이 대규모의 춤극의 형식을 끌고 나갔던 60년대 이후로 근 30여년 시간동안 춤극 진화의 속도는 세상 변화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고 처지는 것이 된 것이 사실이다. 국수호가 거의 독보적으로 이 분야에 애정과 열정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왔으며, 단순히 역사를 춤화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역사인식과 해석의 지점들까지 획득해 내면서 노력한 것이 전부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돋보이는 지속적인 노력은 이제는 다음 세대로 이어져 차세대 춤극으로 진화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컨템포러리 춤의 다양한 발전 속에서 ‘춤극’ 분야, 특히 한국적 소재와 형식의 ‘한국 춤극’은 과거의 형식적 틀을 깨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앞 세대가 구축해 놓은 결과를 이어 받아 모자라는 점을 보완하고, 예술적으로 정교화 시키고 더 볼만한 장면으로 만드는 일을 해나가는 점전적인 진화를 담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담당할 차세대 주자들이 그다지 풍성해 보이지 않는 건 왜일까?
대부분의 국시립 공연과 안무경험이 있는 안무자들은 과거의 신무용 형식에서 완전히 객관화되지 못하거나, 과도하게 시각적 스펙타클에 함몰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너무 형식적인 실험에 치중하다보니 ‘춤극’의 기본 요소들까지 탈피해 버려 대중 입장에서는 도무지 스토리를 전달 받을 수 정도로 알맹이를 놓쳐 버리는 경향이 노출되어 왔다. 이 세 가지의 흐름 어디에서도 춤극에 대한 긍정적 진화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국수호의 안무는 한국 춤극의 획기적 발전에 기여한 바는 크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하여 예술적 성취보다는 행사용 매스게임의 형식에 많이 의존해 있다. 군무의 배치와 동작의 어휘들이 집단적이고 획일적이어서 깔끔한 집단적 맛은 있지만 예술적 깊이와 섬세함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작품에서 인문학적 성찰을 느끼거나 답을 찾아내기는 어렵고 자칫 전형적 스토리, 단순하거나 틀에 박힌 해석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약점을 갖고 있다. 이런 지점들은 바로 다음 세대의 안무가들이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이번 서울시무용단의 <신시(神市) - 태양의 축제>를 보면서 이제는 국수호의 업적을 이어받을 차세대 안무가 양성과 출현에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