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AYAF 전효인 〈B.C. – Before Christ〉
만화경(kaleidoscope)을 들고 노는 아이
이지현_춤비평가

 〈B.C. – Before Christ〉는 임진호와 지경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해오고 있는 ‘고블린 파티(Goblin Party, 이하 고블린)’의 신작이다. 하지만 공연 전단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단체의 특별한 대표자 없이 작품의 안무자가 그 프로젝트의 리더를 맡아” 움직이는 방식으로 활동하겠다고 표방하는 무용단이다. 이번 신작은 단원인 전효인 안무의 프로젝트이고 그들이 작업해 오는 방식을 유지하여 고블린 파티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한발 더 나아간 새로운 지점을 확장한 흥미로운 공연이었다.
 자신을 ‘21세기를 살고 있는 원시인’으로 규정한 전효인은 그 원시인이 이 현대에 나타난다면 어떨 것인가의 상상을 덧붙인다. 작품은 인터미션으로 1, 2부로 나뉜다. 보통의 경우 1시간 길이의 공연이 그런 경우는 흔치 않은데, 〈B.C.〉는 전효인과 지경민이 중심이 되어 ‘호랑이 놀이’를 하는 1부와 임진호, 지경민, 김평수, 이경구의 4명의 춤으로 진행되는 2부로 진행되었다. 1, 2부는 연관이 없는 별개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독립적이고 관련성이 적어 보인다. 그런 이질감에 대한 의아함은 간단한 전화 인터뷰를 통해 풀 수 있었는데 원시인과 그들의 문명에 대한 접근을 1부는 진화론으로, 2부는 창조론의 관점을 갖고 했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 현실적인 이유는 적은 무용수로 진행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적 고려였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원시인이라는 소재는 어찌보면 참 고블린스러운 소재이다. 그들이 주로 내복바람으로 무대에 나오기 시작했을 때를 기억하는데, 감히 무대를 그렇게 허접한 의상과 착한 몸매, 소박한 동작으로 채우려 했을 때 많은 당혹감을 느꼈었다. 내복에 대한 이유를 언젠가 지경민은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직장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던 저녁 혼자 밥을 먹고 뒹굴거리며 놀 때, 그 때의 분위기를 그려내고 싶어서 입었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의상 뿐 아니라 그들은 군무를 통해 주로 보여지기 위한 외부 시선을 의식한 구성이나 각도를 보여주지 않고 자신들의 놀이에 열중한 결과인 주로 원형이나 혼자 놀이에 빠진 모습들을 보여 주고, 그러다 별일 없이 끝나 버려 적잖이 무엇을 보려 했던 마음에 충격을 입거나 포기를 맛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시인은 그들의 내복 감수성의 다른 모양으로 보인다. 자신들의 모습이 투영된 또 하나의 존재인 원시인을 통해 그들이 하고 싶었던 출발점은 자신이 이질적이고 현대문명에 못 따라가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며, “나름의 문화가 있고, 그들의 삶의 방식이 있으며, 이들만의 신조가 있다”는 주장이 배어 있다. 그러나 실제 작품은 이런 출발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속이 좁지도 않고 그렇게 상투적이고 유아적인 자기주장만을 담고 있지도 않았다.





 상상력이라는 작용이 일어난 심상치 않은 놀이

 전효인과 지경민이 무릎을 굽힌 채 발소리를 크게 내면서 무대에 등장하고 그 소리가 다시 관객에게는 음악이 되는 동작소리(movement sound)를 만들어 내면서 원시인의 등장을 장엄하게 알리는 시작과 더불어 껍질 뿐인 호랑이 인형이 등장하여 3개의 몸체가 어우러지며 춤동작을 만들어 낼 때,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힘은 그들의 장기인 ‘깨알같이’ 동작을 만들고, 연결시키고, 그것의 흐름을 짜맞추어 내는 퍼즐 같은 정교함 때문일 것이다. 원시적인 것 중의 대표인 원시림(原始林)과 그 안에 살고 있는 동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야생성에서 오는 건강한 생기와 장엄한 신비함을 통해 우회적으로 원시인을 드러내는 방식은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원시인을 친숙하게 만들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호랑이 인형을 복화술의 인형처럼 무용수가 조종하여 함께 춤추는 방식으로 신선하였으나 한동안 그렇게 호랑이와 뒤엉켜 놀다가 후반에 임진호가 이경구를 업고 마치 진짜 호랑이가 나오는 것처럼 위엄있게 호랑이 탈을 쓰고 등장하여 디저리두(didgeridoo)를 건네주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이어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듯이 무대의 비상 철제 계단을 호랑이에게 쫓겨 올라가고 거기서 1부가 끝이 났을 때 정작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잠시 오리무중에 빠진다.




 2부의 시작은 1부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시작한다. 4명의 무용수들은 무대에 넓게 펼쳐져 자신의 영역을 갖고 의상도 제대로 갖추어 입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있다.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일복(일할 때 입는 옷) 느낌이 나는 등을 몇 개의 끈으로 묶어 여미는 스타일로 몇 개의 천을 나누어 붙인 퀼트 방식의 옷은 그들이 이제는 어떤 문명을 갖추었다는 증표로 보인다. 그들이 움직이면서 돌발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서로 주고 받으며 엉키고 확장되면서 종국에는 이경구가 그것을 이어받아 배경음악에 소리로 더빙을 하고 그것이 노래가 되어 가수 아이유의 “오빠가 좋은 걸 어떡해”라는 뚜렷한 우리말 문장으로 완성되었을 때 느껴지는 코믹함은 예상의 허를 때리면서 문명의 시간적 흐름을 재치있게 보여주는 장면이 되었다.
 그 사이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장면은 김평수를 가운데 놓고 임진호와 지경민이 좌우에서 서로 얽히며 만들어 내는 동작들이었다. 그 장면은 마치 문양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서로의 몸이 기하학적으로 얽혀 신체적 균형과 도형을 끊임없이 만들어 냈는데 시간도 상당히 길었을 뿐 아니라 움직이는 방식이 아주 새로우면서도 짜임새가 정교하여 그것에 그들이 투자했을 시간과 공력 때문에 점점 긴장감이 증폭됨을 느꼈다. 놀라운 건 언어의 탄생, 그리고 그것이 노래로 순식간에 현재로 순간이동하는 속도감을 느낀 것과 3명의 몸으로 빚어내는 문양을 통해 문명의 정교함과 추상성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 장면은 작은 드론(drone)이 빨간불, 파란불을 반짝이며 좀 큰 날파리처럼 무대로 날아 들어오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드론이 허공에 떠 있고 그들은 무대 뒤쪽으로 가 벽에 붙어 서서히 움직이며 천지창조 장면을 만들어 보이기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며 어디까지 그려낼 수 있을 지를 상상하고 있지는 못했다.
 이는 감동의 증폭이 놀라우리만큼 속도와 폭을 가지면서 다가왔다는 것인데, 손가락이 닿을까말까한 천지창조 장면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수많은 인류사의 학살 장면에서 야구경기 장면에 이어 바(bar)에 다리를 올리고 림버링(limbering)을 하는 장면으로 이어질 때, 그리고 거기서 발가락의 포인트를 고쳐주기 위해 느리게 손가락이 발가락을 누르는 것으로 화룡점정으로 끝을 맺을 때, 비록 비약적이긴 했으나 놀라운 함축이 속도의 지연으로 시간을 벌면서 관객에게는 상상의 시간을 허락하는 놀라운 화학작용에 힘입은 바가 크다.





 환생(還生) - 겪어 보지 않은 것을 유전자에서 꺼내 보이는 능력

 티벳 불교에는 오랜 전통이 있다. 자신들의 종교 지도자가 계속해서 환생한다는 고유의 전통을 신앙과 연결시켜 현재의 지도자가 육체적 열반에 들면 다음 지도자가 환생하여 어딘가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환생자를 찾아 나서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환생의 관건은 현존하던 린포체(종교 지도자)가 환생한 것이라는 증표를 108가지의 시험을 거쳐 확인하고 확신을 얻는 과정이다. 대부분 어린 린포체들은 전생에 쓰던 염주와 같은 물건을 정확히 알아 맞히며 어린아이로서는 알기 어려운 종교적 사실과 지식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는 것으로 자신이 환생한 존재라는 것을 확신시킨다고 한다.
 나는 전효인의 〈B.C〉를 보면서, 어린 린포체에게서 몇 가지 환생의 증표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을 떠올렸다. 이 작품에서 원시적인 것에서 시작해 현재까지를 심한 속도로 훑어내는 문명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이들이 어리지만 문명의 흐름을 기억하고 게다가 멍청하게 사건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또렷한 기억으로 무엇을 중요하게 꼽아야 하는지를 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3명이 몸으로 그려내는 추상적 문양에서는 인디언의 것도 아니고 마야의 것도 아닌 잉카의 문양이 떠올랐고 그것의 대칭성, 기하학적 구조성, 정방형만으로 건조한 것이 아닌 풍부함으로 고도의 추상성을 이룬 것의 충족감을 맛보았다. 평소에 나는 하늘과 소통하는 고도의 제의적 방법은 동적인 에너지로 무아의 경지로 나가 한정된 존재에서 벗어나 방법이 있는가 하면 보다 고도화된다면 그런 심적인 상태가 되도록 하는 ‘몸의 기호적 형상(body code)’으로 움직이면서 고도의 추상성으로 하늘과 소통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난 ‘고블린 파티’가 그것을 정확히 알고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몸으로 놀았고 심하게 몰입해서 놀다가 보니 그들의 몸과 몸의 연결이 그런 기호를 그려내고 문명사를 그렇게 그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작품의 어디에서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자아의 느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은 전혀 그것을 의식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진하게 그들은 자신의 몸을 만화경(kaleidoscope)처럼 들여다보고, 가지고 놀면서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몸에 숨어 있던 축적된 인류의 습관과 기억이 그들의 몸을 뚫고 살아 나온 것 같다. 그래서 작품 〈B.C〉의 구성은 인지의 영역에서는 잘 분석이 되지 않고, 보는 사람도 몸 안의 유전자를 깨우고 주파수를 맞추는 순간 머릿속에서 기억이 형상화되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끊임없이 변하면서 생성되는 만화경의 방식으로 드러났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블린 파티’가 도깨비의 모습으로 춤추다가 나도 혹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따라가면서 계속 놀다 보니 인간 본질로 이어지는 하나의 길을 찾은 것 같다. 그러나 절대 긴장하거나 무게에 짓눌리면 안될 것이다. 뭐 그건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 다만 그것은 아이처럼 순박한 마음으로 놀이에 빠져 정신없이 놀아 버릴 때 트이게 되는 감각을 통해서만 보이고 들리는 것일 테니까! 도깨비일 때만 잘 느낄 수 있는 것일 테니까!
 도깨비와 한바탕 잘 논 꿈을 꾸었다.

2015. 02.
사진제공_고블린파티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