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겨울잠을 자던 무용계가 3월 들어 굵직한 발레 공연들과 함께 깨어났다. 유니버설발레단의 〈멀티플리시티〉(3월 18-22일, LG아트센터)는 작년 초연 후 관객 요청에 의한 앙코르 공연으로 마련된 무대였고, 국립발레단은 2011년 초연했던 파트리스 바르 안무의 〈지젤〉(3월 25일-2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2015 시즌 첫 정기공연으로 올렸다. 한편 마린스키발레단에 이어 10년간 유니버설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재직했던 올레그 비노그라도프가 이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시어터의〈신데렐라〉(3월 27-28일, 고양아람누리)는 부산, 거제, 울산, 대구, 순천, 대전, 전주 등 전국 투어를 시도했다.
유니버설발레단 〈멀티플리시티〉
〈멀티플리시티〉(평자 19일 관람)는 이제는 유니버설발레단의 몸에 맞는 작품으로 거듭났다는 인상을 주었다. 초연에서 1부 ‘멀티플리시티’와 2부 ‘침묵과 공(空)의 형상’이 그저 병렬로 놓였다면, 이번 공연에서는 수미상관으로 보다 결속력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롤로그에 이은 첫 장면, 칸타타 BWV 205 ‘에올루스’가 터져 나오며 바흐의 지휘 아래 음표들이 뛰놀며 움직이는 장면에 대한 부제로서 ‘부수어라, 무덤을 파괴하라’를 명기한 것은 마지막 부분 바흐의 죽음 장면과 맞물리며 삶과 죽음의 교차를 극명하게 암시하는 단초가 되었는데, 작은 차이이지만 그간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이 작품을 연구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는 흔적을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바흐의 생애와 그 음악에 대한 안무가 나초 두아토의 경외심에 유니버설발레단이 한층 가깝게 다가섰음은 1부보다 2부의 깊이가 월등해졌다는 것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무용수들이 장면과 하나 되고자 하는 열망은 토카타와 푸가 D단조에서 절망을 뚫고 나아가려는 의지를 표현한 남성군무, 뒤이은 트리오 소나타 6번 G장조에서 포박당한 영감, 어둡게 침잠한 영혼을 표현하는 여성군무에서 최고조에 이르러 많은 발전을 이뤄냈다.
바흐의 뮤즈 역을 맡은 김나은의 탄력은 뛰어났다. 바흐를 침범해 오는 죽음(홍향기 역)에 당찬 에너지로 맞섬으로써 긴장감을 높였다. 바흐가 죽은 뒤 오선지에 별처럼 박혀 빛나는 음표가 된 무용수들의 모습은 영원불멸하는 예술가의 정신에 대한 찬사였고, “당신의 음악을 제가 감히 사용해도 되겠습니까?”라는 겸허한 마임은 비단 바흐뿐만 아니라 모든 선배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후배 예술가들의 존경과 사랑을 담아 진한 여운을 남겼다.
전체적으로는 군무의 집중도가 좋아지고 동작이 짜임새 있게 깔끔하게 완성된 점은 눈에 띄었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다. 바흐 역할의 춤이 많지는 않으나 무대에 등장하는 분량은 많은 만큼, 그냥 걸어 다니는 장면이라 할지라도 의미 없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연기력이 필요하다. 특히 활을 들고 첼로가 된 여성무용수의 몸을 켜는 무반주 첼로모음곡 1번 프렐류드 장면에서는, 음악에 맞추어 활을 놀리는 기민한 음악성이 요구된다.
첼로 현 위에서 활이 마찰될 때의 부력이라던가, 활을 좌우로 잡아당길 때의 탄력에 대한 느낌을 더욱 살려 연기한다면 아가페와 에로스가 공존하는 그 장면을 더욱 맛깔나게 살릴 수 있을 듯 싶다. 한편, 2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음악 소리를 뚫고서도 들렸던 무대 뒤편의 소음은 관람을 방해할 정도로 불편함을 안겼다.
국립발레단 〈지젤〉
국립발레단의〈지젤〉(평자 26일 관람)은 파리 오페라 발레의 부예술감독이었던 파트리스 바르의 버전을 택하면서 개연성 있는, 보다 실감 나는 연출을 꾀하려 했다.
프로그램 북에도 설명해놓았듯 파트리스 바르 버전은 지젤과 바틸드가 이복자매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이것이 지젤의 전개 자체에 큰 영향을 줄 만큼 비중 있는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고전을 이렇게라도 해석해보려는 안무가의 노력은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깨알 같은 설정’을 곳곳에 넣어 익숙한 것이라도 새롭게 다가오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1막에서 지젤 엄마가 마을 청년들에게 윌리에 대한 경고의 잔소리를 한다든가, 쿠드랑드 공작이 지젤이 딸임을 확인하는 장면 등은 사실 이번 공연에서는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부분이었는데 1막 전체의 반주가 안정성 위주로 흘러가며 파국으로 이어질 동력을 제대로 얻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그동안 지휘자 주디스 얀과 코리안 심포니는 여러 번 호흡을 맞춰 왔기에 이번에도 무용수들의 동작을 편안히 뒷받침해주는 반주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다. 다만 클라이막스까지 끌어올리는데 계산된 수순을 밟아 나가는 것이 너무 훤히 보이는 그림이 되어 극 전개의 재미가 다소 감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근대화된 귀족들의 의상, 보통 ‘숲속’으로만 그려지던 2막 풍경을 근교의 묘지 주변으로 가져온 설정 등은 〈지젤〉이 낭만주의의 전형을 넘어서서 현대까지 소급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였다. 한편 그간 〈백조의 호수〉〈라 바야데르〉 등의 백색발레 장면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던 어둡고 푸른 조명을 제거하고, 여러 겹의 조명을 레이어링하여 무용수들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수채화 같은 효과를 낸 것도 주목할 만했다. 수직으로 떨어져 반사되는 조명 덕분에 로맨틱 튀튀 아래 무용수들의 다리선이 고혹적으로 드러난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리고 2막의 초반에 묵직하게 깔리며 오케스트라 피트까지 흘러내리던 포그는 미르타의 등장을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등 2막은 여러모로 환상적인 연출의 묘미가 잘 살아났다.
지젤을 맡은 이은원은 가녀리고 처연한 지젤의 전형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나름대로의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새로운 지젤의 모습을 구현했다. 매드 씬의 섬세한 감정표현에는 아직 연륜이 필요해보였지만, 2막에서 보통 초현실적인 존재로 변신하는데 몰두하느라 놓치기 쉬운 감정선을 지켜내는 장점이 있었다. 육신을 가지고 있던 그렇지 않던, 사랑하는 마음은 오래도록 남아 때론 연인을 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의지로 발현될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지젤〉을 명작으로서 사랑받게 하는 것인데, 이은원은 윌리가 된 지젤이 살아있을 때와 다름없는 당차고 따스한 모습을 유지함으로써 타이틀 롤에 대한 설득력을 보여주었다. 알브레히트 곁에서 물러나면서 선보인 파 드 부레는 매우 빠르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관객의 탄성을 자아냈다.
알브레히트를 맡은 이동훈은 자신감 넘치는 점프와 앙트르샤 등으로 치기어린 젊은 귀족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미르타 역의 한나래는 윌리의 여왕으로서의 매서움은 덜 하였지만 당당한 자태 자체로 장악력이 있었다. 힐라리온과 알브레히트를 벌할 때 일체된 움직임, 새벽 종소리에 함께 귀를 기울이는 적극적인 표현은, 아름다워서 오히려 더 슬픈 처녀귀(處女鬼)로서 짙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 점에서 국립발레단의 이번 〈지젤〉은 신진 주역들과 군무의 약진을 확인하게 된 보람이 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시어터 〈신데렐라〉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시어터의 〈신데렐라〉(평자 27일 관람)는 대중들이 발레 공연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신데렐라〉는 오페라, 발레, 영화 등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만들어질 만큼 인기가 높은 소재이고 그런 만큼 기대치도 큰 편이지만, 프로코피에프의 〈신데렐라〉 발레 음악은 같은 작곡가의 발레 음악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교하면 그리 썩 쉽게 귀에 들어오지 않는 현대적인 선율을 갖고 있다. 이런 특성이 작품의 색깔을 결정하는데도 상반된 영향을 준다.
고전적인 소재의 환상적인 측면을 생각하면 누레예프나 애쉬튼 안무가 떠올려지고, 음악의 현대적인 측면을 생각하면 마기 마랭이나 2002년 초연된 마린스키 극장의 라트만스키 버전이 더 그럴 듯하게 들어맞는다.
이번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시어터의 공연은 그랑 발레 스타일의 〈신데렐라〉라기 보다는. 부피를 줄이고 눈높이를 낮추어 온가족이 부담 없이 볼 수 있게,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기획된 공연상품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화려하게 조각된 기둥으로 이루어진 세트를 전면에 드리우고 배경을 바꾸어 막은 무대는 인형의 집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아기자기한 맛을 선사하면서도 변화가 적어 다소 답답한 느낌을 주었지만, 동선을 객석과 가까운 앞쪽으로 한정시켜 무용수들이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었다. 입체적인 표정으로 조각된 주전자의 군무나 12시를 경계하게 하는 시계의 군무는 환상적인 마법의 세계를 조성하는 재미를 주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호박 마차나 신데렐라의 변신 등을 연출하는 것은 과감히 생략하고 결과만 제시하여 전개의 속도를 높였다.
한편 애쉬튼 버전에서 신데렐라의 두 새 언니 역할이 남성에게 맡겨져 코믹함을 배가했던 것에 비하면, 계모와 두 언니가 엇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며 늘어진 이번 비노그라도프 버전은 캐릭터 창출에 있어 지루한 면도 있었다. 신데렐라는 시종일관 밝은 톤을 유지했고, 외로움을 드러낼 만한 솔로라던가 마지막 결혼식의 파 드 되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아 정서적으로 공감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보였다. 왕자와 신데렐라의 무도회장 파 드 되에서는 회전시키며 리프팅할 때 배를 받쳐주는 등 특징적인 동작도 있었지만, 모든 춤은 가벼운 터치로써 장면에 포인트를 줄 만큼만 ‘경제적으로’ 사용되었다.
평자가 관람한 날의 고양아람누리 공연에서는 다수의 어린이 관객이 자리를 잡아 과연 두 시간 남짓의 공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지 우려했었는데, 숨죽이며 공연을 지켜볼 만큼 놀랄 만한 집중력을 보였다. 아름다운 발레리나들의 몸짓과 반짝이는 의상, 전형적이지만 유쾌한 캐릭터만으로도, 낯선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은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 듯 보였다. 물론 전환할 장치가 많지 않았음에도 막간에 20분, 15분 두 번의 넉넉한 인터미션을 두었고, 음량을 좀 낮추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음악의 전개에 따라 장면을 쉽게 풀어간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말이면 등장하는 〈호두까기인형〉이라던가 제법 흥행했다는 서울발레시어터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가족발레를 표방하는 작품들도 더러 있어 왔지만, 어쩌면 그간 우리 공연계에서는 이토록 단순하게 발레 자체가 지닌 환상적인 매력으로 어필하는, 아기자기하고 쉬운 발레 ‘상품’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