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AYAF 이상훈 〈story of statues〉
부적절하게 빚은 조각상
권옥희_춤비평가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생각자체는 독창적이지 않다. 우리보다 먼저 생각을 해낸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창적이지 않은 그 생각을 독창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 예술가들. 예컨대 여행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자. 춤을 추는 이가 자신만의 독특한 춤의 언어로 여행을 통해 사유한 것을 작품으로 만들어낼 때. 그것은 절대적으로 독창적인 것이 된다. 자신만의 사유로 사건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변주냐에 따라 높은 지혜에의 희구가 되고 좋은 세상을 향한 비원이 되고 순결한 사랑의 열정이 되기도 하는, 절대적인 성의가 있다면 말이다.
 춤과 영상, 무대미술로 인해 그 성의는 풍요로워지고 잘 다듬어진 춤의 언어에 의해 작품은 반짝이게 된다. 한데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가 되어야 할 춤의 언어(요소)가 남의 것을 가져온 것이라면? 그 작품을 독창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과연 그 정신은 주목받아야 할 젊은 정신일까.




 아르코가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AYAF)에 선정된 이상훈의 작품 〈story of statues〉(1월 10일, 웃는얼굴 아트센터 청룡홀). 지방(대구) 작가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이상훈은 누구보다 성실한 무용수다. 무용수로서 자신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소극장, 짧은 작품이 아닌 긴 호흡으로 풀어낸 첫 번째 작품 〈story of statues〉을 본다.
 32개(안무자의 나이를 상징)의 스티로폼으로 만든 정육면체 블록. 유럽에서 받은 인상을 석조 건축물의 벽과 열주, 조각상을 빚는 과정으로 풀었다. 흰색의 스티로폼(대리석 돌이라고 하자)블록을 무용수들이 한 줄로 쌓아올리니 기둥, 다시 한쪽으로 몰아쌓으니 벽이 세워진다. 파열음과 함께 돌을 쪼고 다듬는 정과 망치, 전동 드릴의 기계 소음이 배경음악이 된다. 이상훈이 전동드릴을 무용수의 몸에 가져다대자 무용수의 관절이 툭툭 꺾어진다. 조각되는 과정의 연출.
 이상훈이 입은 검정색 바지, 그 길이가 의미심장하다. 긴 바지자락은 신체의 확장성. 무용수로서 자신의 신체조건 혹은 그가 처한 상황의 좌절이거나 설명일 수도. 긴 바지자락에 갇힌 무용수의 움직임은 제한적일 수밖에. 공중에다 다리를 뻗어 올릴 수도, 무대를 자유롭게 걷거나 뛸 수도 없다. 물구나무를 서는가 하면 구르고 옆 돌기를 반복한다. 바지자락이 공중에 후르륵 흩날리는 것이 마치 한삼자락 같다. 제약과 욕망을 동시에 드러내 보여주는 좋은 설정이다.




 가벽, 영상에 검은 점이 생겨나더니 물에 번지는 먹처럼, 점은 빛 속에서 길이와 면적을 얻었다가 다시 점이 되어 사라진다. 독립무용수의 춤의 여정과 닮았다. 세계를 다니며 오디션을 보고, 무용수로 작업에 참여(스몄다가), 공연이 끝나면 다시 점으로 흩어지는. 블록으로 만든 계단위에 앉고 서 있던 무용수들의 움직임, 이어지는 군무(꺾이고 단절되는), 의미 없고 지루하다. 안무자가 가진 춤의 욕망과 상관없이 춤의 무대는 허술하고 조악하다. 안무자의 의도를 춤이 아닌 영상에서 읽는다. 가벽(유럽문화)에 투영되는 먹(자신)의 번짐은 이상훈이 ‘춤과 언어’를 배우면서 그들의 ‘문화’에 스며드는 과정의 은유. 영상이 춤보다 안무자의 내면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마지막, 파편이 떠다니는 영상이 입혀진 블록을 무용수들이 밀어 넘어뜨린다. 깨어진 블록 위를 징검다리 건너듯 밟으며 걸어 나온다. 크게 서고 싶다는 안무자의 열망으로 읽힌다. 군무진이 흩어져 나뒹구는 블록위에 앉아 망치로 정을 두드려댄다. 자신이 조각되는 과정, 관절을 꺾고 뒤틀며 추는 이상훈의 솔로. 의미 없는, 허전한 것의 치열한 움직임.
 셰르키위(Sedi Larbi Cherkaoui)의 작품 〈Eastman〉을 구성하는 독특한 춤의 요소가 있다. 전동드릴에 반응하는 무용수의 움직임, 정과 망치로 조각하는 과정, 흰색의 가벽(크기와 규모는 다르지만) 등. 〈story of statues〉의 주된 춤의 골격을 이상훈이 〈Eastman〉에서 상당부분 가져온 듯. 그가 〈Eastman〉에서 무용수로 참여하여 더 잘 알 것이다. 그의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story of statues〉, 5년 동안의 유럽문화를 접하고 난 뒤의 생각을 정리한 작품이라고 그는 말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함 정도는 아닐지라도 예술가로서의 밑그림은 그릴 수 있는 시간이다. 아마도 긴 호흡의 작품을 만드는 첫 작업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참고와 복제는 엄연하게 다르다. 이상훈의 춤을 ‘의미 없는, 허전한 것의 치열한 움직임’이라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가에게 있어 자부심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정당한 책임(도덕적인)정도가 되지 않을까. 창작에 대한 고민 없이 안이한 사고로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면 예술가의 자부심이라는 것? 근거 없는 망상이 될 뿐. 적어도 예술가의 자부심이란, 작품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 때, 예술가로 스스로를 정당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스스로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다. 내가 내 작품을 창조하는 게 아닌, 다른 이의 것을 가져와 내 작품을 만드는(복사) 것, 쉽다. 반면 온 마음과 힘을 다하고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 자신 안에 있는 소중한 가치를 키우는 것,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드는 것, 어려운 일이다. 어디에 닿을지도 모르고 그곳에 닿는 길 또한 멀고, 거기서 만나려 했던 것을 이름 짓고 그려내는 일, 어렵다. 마음은 그 어려운 만큼 깊어질 것이겠지만.
 안무자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자신의 춤으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부디 대리석처럼 견고한 춤의 정신으로 자신만의 춤을 조각해내는, 아름다운 춤작가로 거듭나길 바란다. 이상훈을 응원한다.




 사족으로 몇 마디 덧붙인다. 〈story of statues〉 공연이 있기 전, 짧은 버전의 작품을 서울과 대구의 소극장에서 공연했다고. 작품에 대해 아무에게도 조언을 듣지 못했는지, 듣고도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정작 조언해 줄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는 것이 없었다는 것인지. 문제는 이러한 내용이 비단 이상훈뿐만이 아니라 대구지역 일부 작가들의 작품에서 보인다는 것. 그 정도의 차이 일뿐. 누가 더 교묘하게 포장하여 관객을 속일 수 있는가, 마치 내기를 하듯 한다는.

 공연 후 평가는 왜 하는지.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올리든 지원금을 받는 이들은 계속 받는다는 것. 저프다(두렵다는 뜻). 예술가들의 정신이란 것이.

2015.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