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AYAF 김준희 〈감각의 권리〉
피상적 관념어에 함몰된 순수한 감각
방희망_춤비평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ARKO가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 세 번째로 김준희의 〈감각의 권리〉(1월 21일, 서강대메리홀 대극장)가 공연되었다.
 2014년 5월 AYAF(Arko Young Art Frontier) 공연예술 창작자부문 지원 사업 심사를 통해 선정된 무용분야 이상훈, 박연정, 김준희, 전효인 네 명의 안무가는 각 3천만 원의 파격적인 지원 혜택을 받은 만큼 이들이 선보일 작품 수준에 대한 기대는 높았다.
 김준희의 작품 제목은 ‘완벽하게 자유한 몸, 그리고 감각. 이것은 소이연이 존재하지 않는 권리’라는 해설을 달고 있었다. 한자가 병기되지 않아 처음엔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소이연’(所以然)이라는 말은 성리학에서 나온, 보통 ‘존재의 이유, 근거’ 정도로 해석되는 개념이다. 복잡한 수사가 난무한 설명을 걷어내고 이해한 바로는 현시대를 ‘억압’이라는 상황으로 놓고 그 속에서 어느새 통제되어버린 날 것 그대로의 ‘감각’, 묻거나 따지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천연 그대로의 감각을 다시 찾자는 것이 모토인 듯하다.




 서강대메리홀 대극장의 객석을 쓰지 않고 프로시니엄 무대 전면부에 직사각형으로 에어캡(뽁뽁이)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하우스 안쪽 사면을 따라 객석으로 사용할 의자들을 배열하였고 무대 곳곳에는 은박 호일을 구겨서 만든 마네킹과 에어캡 더미가 놓여있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던 박연정의 <망구-그믐달>의 무대 연출 방식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는데, 박연정은 극장 입구부터 오귀굿에서 쓰이는 오린 종이 다발을 샹들리에처럼 매달고 객석을 보통 위치했던 자리 반대편으로 보냈으며 무대 전체를 코팅된 크라프트지로 감싸 안아 포근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관객과의 밀착을 유도했었다.
 김준희의 무대 역시 서강대메리홀 대극장의 경사진 객석을 거부하고 마치 유럽의 부티크에서 소수의 고정 고객들을 위해 쇼를 여는 것처럼 밀폐되고 집중된 느낌을 주고자 했는데 비교적 저렴한 질료인 에어캡의 비닐과 알루미늄 호일은 조명 효과에 힘입어 자못 미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김준희를 포함한 7명의 무용수들은 들숨과 날숨을 고르게 끌어올리는 것에서부터 공연을 시작하였다. 요가나 동양의 무예 수련을 가볍게 응용한 체조 같은 동작들, 손바닥을 편 채 보이지 않는 기운을 밀고 끌어당기는 팔 동작과 한 번의 긴 숨으로 당겨 회전하며 움직이는 스텝의 군무가 펼쳐졌다. 이어 뒤틀고 꺾는 동작 위주로 구성한 장면들은 그런 자연스러운 ‘숨’의 흐름이 방해받아 막혀가는 현 시대의 고통과 억압에 대한 안무가의 관점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을 눕혀 놓고 은박지들을 갖고 들어와 그 모양에 맞게 본을 떠 완성한 마네킹을 천장에 매달아 끌어올리는 장면에서 퍼포먼스는 절정을 이루었다.
 마네킹을 매닮으로써 드디어 감각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남자 무용수들은 에어캡을 붙여 만든 매트와 더미를 가지고 들어와 뜀틀 놀이를 하다가 옷을 벗어던지고 서로의 등짝을 때리며 거칠게 뛰어 논다. 에어캡 꾸러미를 풀어 헤쳐 바닥을 메우고 비닐 공들까지 들여와 거기에 파묻혀 구르던 이들은 무대 한편 상단에 밝아오는 빛을 발견하고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오르며 에어캡 장막을 찢는 것으로 무대를 마무리하였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하고 손쉽게 변형 가능한 재료들로 무대를 꾸미고 그것을 터뜨리거나 구기면서 나는 소리까지 안무가가 건드리고자 한 감각의 범주 안에 끌어들이려 한 아이디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렇지만 앞서 공연된 박연정의 작품에서 무대를 꾸민 크라프트지, 요강, 토이피아노, 모빌 등의 오브제와 다용도로 활용되도록 구조적으로 꼼꼼히 디자인된 의상까지 무대 위 등장한 모든 요소가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고 수공예의 ‘손맛’을 느끼게 했던 것에 비하면, 김준희의 작품에 주재료로 등장한 에어캡과 은박호일 등의 일회용품은 인공적인 성질이 강하여 움직이는 신체와 제대로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두 무대에서 그것이 가장 극적으로 대비된 장면을 들어보겠다. 김준희의 작품에서 누워있는 인체에 은박 호일을 끌고 들어와 본을 떠서 호일 마네킹을 만들어 매달아 올렸던 장면은, 박연정의 작품에서 크라프트지를 구겨서 말아 올려 주인공 할머니의 남편인 할아버지의 모습을 만들고 그 속에 파묻히면서 내면의 갈등을 표출한 장면과 유사했으나 그 효과는 아주 달랐다.
 김준희의 경우 ‘감각이 차단된 인체’라는 주제를 무용수의 몸 외부환경(호일 마네킹)으로 만들어놓고 결국 객관적, 분석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을 취하였고, 박연정의 경우에는 크라프트지로 만든 할아버지 속에 숨거나 그것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등 무용수와 재료가 한데 엉겨 감정 표출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한국무용이냐 현대무용이냐 하는 경직된 구분을 떠나, 두 안무가가 우연히 교차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선호하는 취향과 추구하는 스타일이 모두 다르므로 단순히 무엇이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는 문제다.
 하지만 적어도 김준희가 다루려고 했던 ‘감각이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라는 주제의 측면에서, 그런 감각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고 다른 얘깃거리를 풍부하게 만들어 관객에게 정서적 자극을 주는 접근 방식이 ‘감각이 있느냐 없느냐’의 명제만을 동어 반복으로 집요하게 다루는 접근 방식보다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신체에 스며들지 못하고 기운을 튕겨내는 김준희 작품의 재료들이 감상하는데 있어 피로감을 더한 측면도 있다.




 한편 김준희와 같은 아지드현대무용단원인 조선영의 Movement J가 일주일 전 발표한 〈짝: 짓기 The second story〉(1월 16~17일, 문화역서울 284 RTO)도 주제와 안무 구성의 유사성 측면에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감각과 움직임’이라는 테마야 공히 흔하게 다룰 수 있다 하더라도 무대 코너의 조명 앞에 무용수들이 모인 데서부터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풀어가는 방식이라든지, 진지한 전개 도중 가볍게 확 풀어 놓기 위해 뜬금없어 보이는 장면을 삽입하는 장면에서의 유사함을 들 수 있겠다.
 〈짝: 짓기>에서는 두 명의 남성 무용수가 동성애 코드를 연출했던 장면, 〈감각의 권리〉에서는 남성 무용수들이 옷을 벗고 등이 빨개질 정도로 때렸던 장면 등이 작품의 흐름 속에 유난히 돌출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마침 양쪽 공연 모두에 출연한 무용수들 때문에 한결 더 눈에 띄었던 점도 있었다.




 에어캡 장막을 찢고 외부로 나가는 <감각의 권리> 마지막 장면에서는 영화 〈트루먼쇼〉가 생각났다. 어쩌면 인공적인 세계 안에 갇혀 있는 한 우리는 본연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치며 애를 쓴다고 해도 그것을 벗어나느니만 못할는지 모르겠다. 그것을 일깨우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다시 인공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그것을 부수고 나오는 지난한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테크놀로지의 폐해를 이야기하기 위해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물량공세를 동원하는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가 지닌 딜레마처럼, 김준희의 작품도 그렇게 보였다. 피상적인 관념어를 과다하게 이것저것 섞어 버무린 작품 해설부터 순수한 감각 자체보다 논리와 이성으로 재단하고 포장하려는 의지가 더욱 기승한 상태처럼 보여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형이상학적인 개념과 이론들을 풀어내는 작업이 본래 가지고 있는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안무가 또한 분석에만 사로잡혀 자가당착에 빠지고 문제제기 ‘이후’를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다음에는 ‘감각의 권리’를 되찾은 바람직한 모습이 어떤 것일지 작가의 고민이 심화되어 작품에 녹아나오길 기대한다.

2015. 02.
사진제공_옥상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