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4년 12월 12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국립국악원(원장 김해숙)이 주최하고 문화재청, 사직대제보존회, 일무보존회, 국악방송이 후원한 ‘사직대제’(社稷大祭) 공연이 있었다. 종묘제례악을 무대에 올린 공연은 몇 차례 있었지만, 사직대제가 무대에 올려지기는 처음이었다.
사직대제는 조선시대에 나라의 평안을 위해 왕이 직접 지내던 대사(大祀는 종묘, 영녕전, 원구단, 사직단에 지낸 제사이다.) 중의 하나로, 사직(社稷) 즉 땅과 곡식의 신에게 지내는 천제(天祭)였다. 경복궁의 서쪽에 사직단이 위치했었고, 현재 종로구의 사직공원 자리에서 조선시대 내내 사직제가 행해지다가 1908년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고, 사직단은 일개 공원으로 격하 축소되었다.
사직대제는 1988년에 (사)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의해 80년 만에 다시 시행되었다. 초기에는 악기편성이나 의물 등 본래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거행되다가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111호로 지정되었다. 사직대제는 종묘제례와 함께 조선시대 국가의 평안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한 의례로서 조선시대 치도(治道)의 이념이 제례(祭禮)로 승화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번에 올려진 ‘사직대제’ 공연은 정조의 명에 의해 1783년에 만들어진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를 근간으로 재연되었다.
예악당에 들어서자 로비에는 사단에 올리는 제사음식들과 제기들, 『사직서의궤』의 영인본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직대제에 올리는 제수(祭需)들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보았다. 공연은 송지원 국악연구실장의 사회로 시작되어, 이번 재연작업의 골자를 자료영상과 함께 설명했다.
막이 오르자 무대는 백 스테이지까지 깊게 구성되어 있었다. 뒤쪽 중앙에 댓돌 위로 단이 하나 설치되었는데, 무대가 협소하고 공연시간을 조절하기 위해 사단(社壇)만 설치하고 직단(稷檀)은 설치하지 않았다고 했다. 단 아래 계단을 내려오면 무대 중앙으로 신도(神道)가 길게 꾸며졌다. 무대 하수의 왼쪽에 등가(登歌) 22인, 반대편 오른쪽에는 헌가(軒架) 22인의 악수들이 2단으로 자리를 잡았고, 등가 쪽에 휘(麾, 아래로 내린 기)와 조촉(照燭, 밤에 지내는 제사에 등불로 신호하는 도구)이 배치되었다. 일무는 무대 앞쪽에서 12명이 6열 2행으로 춤추었다.
공연은 사직대제의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집례 이건웅(사직대제 예능보유자)과 한글집례 김병오(국립국악원 정악단)가 각 절차를 구령했다. 신을 맞이하는 의식인 영신(迎新), 신에게 폐백을 올리는 의식인 전폐(奠幣), 신을 위한 제수를 올리는 의식인 진찬(進饌), 신에게 첫 번째 술잔과 축문을 올리는 의식인 초헌(初獻), 신에게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인 아헌(亞獻), 신에게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의식인 종헌(終獻), 초헌관이 복주를 마시는 의식인 음복(飮福), 제사에 쓰인 제물을 거두어들이는 의식인 철변두(徹籩豆), 신을 보내는 의식인 송신(送神), 제사에 쓰인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의식인 망료(望燎)가 이어졌다.
등가 헌가의 악기를 『사직서의궤』의 기록대로 구성‧재현했고, 음악은 1928년에 이왕직아악부가 연주하고 빅타레코드가 녹음한 ‘응안지악 황종궁’의 음반을 기준으로 속도를 참작하여 연주했다고 해설자로 나온 김영운 한양대 교수가 설명했다.
이 음반과 비교하면 현행 아악의 속도가 많이 느려졌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정조대의 『사직서의궤』를 기준으로 악기 구성을 재현한 점이나, 1928년 이왕직 아악부의 연주 실황을 참조하여 악곡의 속도를 조절한 점은 이번 공연의 음악적 성과라고 하겠다.
일무는 일무보존회원들이 추었는데, 문무(文舞)인 열문지무(烈文之舞)는 영신과 전폐, 초헌에서 춤추었고, 무무(武舞)인 소무지무(昭武之舞)는 아헌과 종헌에서 추었다. 1908년 사직제가 폐지된 후 사직에서 추는 일무가 사라졌기 때문에, 현행 사직대제의 일무는 문묘의 석전에서 추는 일무를 옮겨 추고 있다고 한다.
복식은 ‘사직단국왕친향도병풍’에 그려진 조주삼(皂紬衫)을 재현했다. 무구는 문무에서 약(籥, 피리)과 적(翟, 꿩털)을, 무무에서 간(干, 방패)과 척(戚, 도끼)을 들고 추었다. 그런데 춤의 도구인 약, 적, 간, 척의 상징성은 무엇인지, 왜 이런 도구를 들고 추는지, 일무(佾舞)로 추는 춤에 대한 설명이 없어 아쉬웠다. 설명이 있었다면 사직제의 의미가 좀 더 입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었을 것이다.
제례(祭禮)는 제례를 구성하는 의식, 복색, 음식, 음악, 춤, 의장 등에 있어서 방위의 설정, 음양의 구분, 색깔의 배치, 악기의 배치, 팔음의 구성뿐만이 아니라 각 도구가 상징하는 바, 행위가 상징하는 바가 모두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의미들은 곧 조선시대의 세계관이며 통치 이념을 반영한 문화적 기호들이다. 이런 문화적 기호들을 대중에게 누차 설명할 필요가 있고 본다. 어쩌면 이런 내용들이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을 연구자나 종사자들이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중들은 이러한 제례를 다만 접촉하고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므로 (특히 한국전쟁 후에 더욱 그랬다.) 설명해 준다면 이 문화적 기호들에 익숙해질 것이다.
사실 사직단은 도성인 한양뿐만이 아니라 지방 군현에서도 실행된 중요한 제사였다. 농경을 관할하는 토지신과 곡식신에 대한 제사는 백성들 모두에게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은 그간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사직대제’를 재조명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킨 국립국악원다운 의미있는 기획이었다. 국립국악원이 한국 정신의 뿌리가 되는 공연문화 유산들을 균형있게 조망하고 국민의 관심을 일으켜 문화적 충만감을 일깨우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