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자기 결단과 수련의 춤 ‘검무’를 다시 생각함
김영희춤연구소의 <검무전>
남기성

 지난 4월 12일 강남의 한국문화의집 코우스 무대에서는 김영희춤연구소 주최로 <검무전(劍舞展)>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유형의 칼춤(검무劍舞)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색다른 춤 기획전이 펼쳐졌다. 이날 공연은 서로 다른 네 작품의 검무와 영상으로 만나는 춤, 그리고 판소리 ‘적벽가’ 한 대목과 공연 사이사이 이번 춤판을 마련한 기획자이자 연출자인 김영희의 해설로 이루어졌다.

 공연의 첫 순서로 무대에 오른 <해주검무>는 봉산탈춤과 강령탈춤, 그리고 서도소리의 명인으로 잘 알려진 고 양소운 선생이 황해도 지역의 춤과 소리를 익히던 1930년대의 춤으로 당시 50대의 세습 예인인 장양선으로 부터 배워 1983년 재현된 춤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의 춤은 4인무로 추어졌다. 느린 타령(타령 시나위)장단으로 시작 된 춤은 네 명의 춤꾼이 두 줄로 마주보고 서서 흐르는 듯 넘실되며 춤을 추다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손목을 꺾어 양손을 번갈아 뒤집으며 잡아주는, 맺고 풀어주는 손 춤사위가 특징적으로 보였다. 특히 빈손에 칼을 쥔 듯 살짝 주먹을 쥐고 한 손으로 전립을 잡고 나머지 손목을 돌리며 추는 춤은 해주검무에서만 볼 수 있는 춤사위로 여기검무(女技劍舞)가 가지고 있는 여성적 미감을 잘 드러낸 부분이다. 타령 시나위 곡에 맞춘 춤이 다소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쯤 춤꾼들이 칼을 손에 쥐자 장단이 타령 곡으로 빨라지며 역동적인 움직임이 살아난다. 손잡이와 칼날이 분리된 칼에서 나는 소리는 춤추는 도구로서 뿐 아니라 악기로서의 역할로도 제몫을 하는 듯하다. 춤의 말미에 칼을 크게 휘저어 땅을 치며 도는 연풍대는 해주검무만의 맛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이날의 공연은 고 양소운 선생의 예술적 삶을 이어 가고 있는 따님(차재숙)이 춤꾼으로, 두 명의 손녀가 반주로 함께하여 더욱 뜻 깊은 자리였다.

 

 



해주검무보존회 <해주검무>, (사진=김영희춤연구소)

 

 이제는 고인이 된 진주 교방 춤의 명인 김수악 선생의 구음 반주에 맞춰 홀춤으로 추어진 <구음검무>는 무엇보다도 춤을 춘 김미선의 춤 맛이 도드라진 춤판이었다. 주로 8인무로 추어지는 진주검무를 김수악 선생이 생전 녹음한 구음에 맞춰 독무로 재구성하여 보여주었는데, 4인무나 8인무에서는 드러내기 힘든 춤꾼 개인의 감성과 개성을 집중하여 보여주기에 적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염불장단에 맞춰 유장하게 시작된 춤은 여느 입춤과 비슷한 분위기로 흘러가지만 느린타령으로로 장단이 바뀌고 한삼자락을 벗어던진 후 양손바닥을 밖으로 펼치며 매듭을 주는 춤사위로 춤에 긴장감과 흥(興)을 불어 넣었다. 허튼타령장단에 칼을 잡기 직전의 손춤인 농검(弄劍)이 펼쳐지면서부터 칼을 쥔 듯 맨손으로 가볍게 주먹을 쥐고 칼을 돌리듯 손목을 돌리는 춤사위는 어느덧 여인에서 천진난만하고 앙증맞은 아이와 같은 몸놀림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손놀림은 앞의 해주검무의 손춤과 같이 마치 해서지방이나 산대놀이의 깨끼춤이나 자라춤과 유사한 느낌이 들게 했으며, 이윽고 다시 느린타령으로 장단이 넘어가면 칼을 곧추들고 잠시나마 날카로운 칼의 느낌이 살아나는 역동적인 춤이 보여졌다.
 진주검무가 염불장단에 장중하고 담백하게 시작하는 춤이었다면, 이날 김미선에 의해 추어진 구음검무는 같은 염불이라도 여성적인 맛을 한층 더 드러내고 또 한편으로는 전체적으로 활달함 속에 정제된 움직임이 진주검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춤꾼 개인의 춤 역량과 느낌을 잘 드러내고 있는 춤이었다.

 



신미경 <검무낭>, (사진=김영희춤연구소)

 조선 후기 변방의 기생들이 가무악의 기예와 더불어 군사들과 함께 검술과 말 타기를 연마했다는 옛 기록을 모티브로 하여 이번에 처음 무대에 올려진 신미경의 <검무낭劍舞娘>은 앞의 춤이 개화기 기생조합과 권번의 여기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추어진 여성적인 춤이었던 것과는 달리 남성적이며 활발하고 역동적인 춤이다. 조선무24반의 쌍검을 기초로 하여 안무된 듯한, 장검 두 자루를 들고 춘 쌍검무는 베고 자르고 찌르는 ‘칼’의 본 쓰임새가 오롯이 살아있는 검무로 춤꾼이자 무예지도자자격증을 보유한 신미경 자신의 특장점을 잘 살려낸 공연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공연이 초연이라 그런지 태평소와 사물로 이루어진 생음악 반주와 다소 겉도는 듯 하여 공연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아쉬운 생각이 들게 하였다. 이런 현상은 전통 검술을 토대로 하여 새로이 안무된 여타의 검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무예가 춤으로 변화되면서 넘어야 할 고비로 무예와 춤의 경계가 무엇일까 하는 고민 속에서 더 많이 무대예술로써 다듬어 져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신미경의 <검무낭>은 전통춤과 무예를 토대로 한 새로운 ‘창작’ 검무로 앞으로 발전할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한순서류 장검무>, (사진=김영희춤연구소)

 이날의 마지막 검무는 한순서류의 <장검무>로 서울 살풀이의 명인인 한순서 선생의 춤을 이어 받은 따님인 이주희 등 3인의 춤으로 추어졌다. 이 춤은 19세기 초 풍속화의 대가인 신윤복의 쌍검무도(雙劍舞圖)를 모티브로 하여 한순서 선생에 의해 4인무로 재현된 것을 3인의 장검무로 다시 재구성한 것이다. 장검의 의연함과 절제된 움직임에 쌍검을 마치 단검을 휘두르듯 활발하게 휘두르는 전투적인 춤사위가 돋보였는데, 이 춤 역시 앞의 <검무낭>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춤의 소도구로서의 칼이 아니라 찌르고 베고 가르는 칼의 본 쓰임새를 적극 활용한 춤사위들을 많이 품고 있는 춤이었다. 권번춤 계열의 4인무나 8인무의 검무와 달리, 칼을 잡은 이후 오방진 장단에 맞춘 시원한 연풍대와 발놀림 뿐 아니라, 화려한 칼놀림과 더불어 역동적인, 마치 풍물의 진풀이와 같은 다양한 대형이 시원하고 장쾌한 맛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아울러 중간 중간 진을 감고 풀며 마치 두 진영이 대진하고 있는 듯한 움직임에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칼춤’에 걸맞은 긴장감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신윤복의 그림에서 묘사된 것처럼 중간이 크게 부풀어 오른 치마폭이 편안한 곡선을 만들어 내어 춤의 폭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인상을 주기도 하였다. 

 

 이날 공연에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영상으로 만난 20여 년 전 명무전 무대에서의 고 김타업 선생의 <휘쟁이춤>이었다. 이는 ‘밀양백중놀이’의 상쇠였던 고 김타업 선생의 휘쟁이춤(휘겡이 춤이라고도 부른다)은 붉은 탈을 쓰고 장검 두 자루를 손에 쥔 채 상여행렬의 선두에서 장지에 이를 때 까지 이를 호위하며 삿된 것을 물리치고 액운을 막는 춤으로 요즘은 상여행렬도 보기 힘들거니와 이 춤을 추는 사람도 없어 영상으로 밖에 접할 수 없게 된 춤이다. 이날 공연된 다른 춤과는 달리 휘쟁이 춤은 무대화된 춤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이름 없는 춤꾼들에 의해 추어진, 전통시대 당대의 현실적 삶과 밀접한 관련 속에 살아 숨 쉬던 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색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무대화된, 전문 춤꾼에 의해 다듬어지고 세련된 여타의 춤과는 달리 투박하고 어설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검무 뿐 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춤의 맥락 속에서 춤이 삶의 중요한 대목에서 추어졌던 유래를 상기해 본다면 주목해야할 춤이 아닐까 싶다.
 봉두난발 풀어헤쳐진 머리에 붉은 가면을 쓰고 사방팔방으로 힘차게 뛰어올라 쌍검을 휘두르는 춤사위는 장례행렬을 가로 막는 삿된 것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 삶을 위해(危害)하는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서민들의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 헤치는 듯하다. 매섭게 추켜올려진 두 눈에 산발한 머리, 사납게 생긴 붉은 귀면(鬼面), 그러나 탈은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어딘가 살짝 웃음기를 머물게 하는 아이와 같은 천진함이 묻어난다. 이러한 탈의 느낌은 김타업의 춤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앞으로 내달으며 쌍칼을 휘두르고 펄쩍 뛰어 위엄을 과시하기도 하지만 언뜻 언뜻 장난기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어쩌면 이 춤을 보고 있는 내 마음이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추는 사람이 없어 영상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아쉬움에 더해 김타업 선생이 썼던 탈도 칼도 남아있지 않다는 해설자의 설명은 더 큰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다행스럽게도 검무전을 이번 한번으로 끝내지 않는다 하니 다음번 공연에서는 누군가에 의해 재현되기를 소망해본다.

 

 



'영상으로 보는 검무이야기', (사진=김영희춤연구소)

 


 우리의 문헌 기록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검무는 가면동자검무(假面童子劍舞)인 황창무(黃昌舞)이지만 아마도 그 이전에 전투와 의례춤으로써, 수렵춤으로써 검무가 있었다고 추측되어 진다. 또한 칼이란 우리의 일상 삶 뿐아니라 비일상적 삶 속에 늘 가까이 있는 도구였기 때문에 지금 남아있는 궁중검무나 권번 등을 통해서 전해진 검무와 달리 다양한 형태의 검무가 우리의 춤 역사 속에 있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그 중 하나가 이번 공연에서 영상으로나마 볼 수 있었던 <휘쟁이 춤>일 것이다. 다행이도 이번 검무전을 통해 적으나마 서로 다른 다양한 검무의 맛을 느낄 수 있었지만 ‘검무’ 자체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검이라는 것이 생활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황창의 설화에서와 같이 무엇보다 전투의 도구이며 자기결단과 수련의 도구임에도 그러한 칼의 본연의 모습을 담은 칼춤이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예컨대 100여 년 전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 스스로 지어 부르고 추었다는, 종국에는 그 노래로 인해 반란죄로 처형되기에 이르게 한 ‘칼노래’나 ‘칼춤’은 현대에도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는 의미있는 모티브가 될 것이다. 춤이란 것이 생명력의 충일이요 살아있음의 지극한 자기 확인이며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살아 생동하는 것이라면, 따라서 생명을 위해하는 모든 것들과 대결하는, 적극적이고 쟁투적인 삶의 단면이라면 이러한 반생명적인 것에 대항하는 수운의 칼춤은 춤다움을 가장 잘 담아낸 춤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특히 자기 결단과 장쾌하고 웅대한, 전우주적 신명이 담긴 노래와 춤으로써의 새로운 ‘칼노래 칼춤’에 대한 기대가 <검무전>을 통해 실현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공공기관의 그 흔하디흔한 지원하나 없이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이번 <검무전>을 기획하고 연출, 해설까지 일인삼역, 사역을 마다하지 않은 김영희 선생에게 박수를 보냄과 아울러 더욱 다채롭고 신명난 두 번째, 세 번째 <검무전> 역시 기대해본다.

탈춤을 기반으로 한 마당극 연희패인 ‘놀이패 한두레’에서 활동. <마당극의 몸미학>으로 부산대에서 석사. 현재 부산대 예술·문화와 영상매체 협동과정 예술학 박사과정, 부산대 강사.

2012.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