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한국춤비평가협회 4개국 국제 포럼〈다시 최승희를 본다〉
국제학술포럼 발제2 : 최승희 신무용(New Dance)의 이국 취향(Exoticism)
김영희_우리춤연구가

 1. 시작하며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최승희는 20세기 중반에 동아시아 무용계에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최승희의 예술적 행보는 이념을 뛰어넘고, 춤의 장르를 넘나들며, 전 세계를 무대로 전개되었으니, 그는 시대가 낳은 불세출(不世出)의 무용가였다.
 그러나 20세기의 격변하는 정치와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꽃피었던 최승희 춤에 대한 연구는 시기별로 지역별로 분절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해방 이전의 활동을 중심으로 연구가 전개되었고, 중국에서는 해방이후부터 중국과 북한에서의 춤 활동에 대한 연구가 주로 진행되었다. 또 일본에는 최승희에 관한 자료가 풍부하지만 문인들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그녀를 회고하는 수준이다. 북한에서는 최승희가 많은 업적을 남겼고, 2003년에 복권되며 그녀의 활동이 재평가되고 있다. 또한 서양학자들은 최승희가 1930년대 후반에 세계 순회공연을 했던 시기를 중심으로 민족무용의 입장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최승희 춤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연구들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어야 하겠지만, 아쉽게도 한국 무용계와 무용학계는 아직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여러 각도에서 최승희의 춤을 평가할 수 있겠는데, 이 글에서는 최승희가 처음 추었던 신무용(新舞踊)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무용은 한국 근현대춤에서 두 가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20세기 초 전통시대의 춤과 구분되는 서양춤, 서양춤을 개작한 춤, 전통춤을 서양식 무대에 맞게 재구성한 춤들을 총칭하여 신무용(New Dance)이라 하였다. 1926년 봄 이시이 바쿠의 경성 초연을 신무용이라 칭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의미로 신무용(Sin-Mooyong)은 최승희와 조택원이 1930년대에 모던댄스의 기법으로 전통춤을 재창작한 춤으로, 한국에서는 1970년대까지 주류(主流)의 춤이었다. 이 경우의 신무용은 한국의 전통춤과 유사한 듯하지만, 춤의 기법과 소재, 정조(情操), 스타일 면에서 한국의 전통춤과는 구분되는 춤이다. 이 두 개념의 신무용 각각에 최승희는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번 발표에서는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에게서 처음 배웠고,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주로 추었던 서양춤 - 신무용(New Dance)을 다루고자 한다.
 이 시기(1930~1932) 최승희의 신무용(혹자는 모던댄스라고 하기도 한다.)은 <에헤야 노아라> 이후 만들어진 신무용과 월북 후 북한에서 성취한 춤들보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않았다. 그러나 최승희 초창기의 작품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예술무용으로서 서양춤을 대중적으로 소개하였고, 이 때 소개한 서양춤들은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춤계에 그 잔영을 남겼다. 또한 초창기 최승희의 신무용은 일제강점기에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녀의 신무용 작품들이 마리 뷔그만과 이시이 바쿠로 이어지는 표현주의 모던댄스가 중심이지만, 이국취향(Exoticism, 異國趣向)의 작품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문화사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최승희 춤이 한국춤계에 남겨준 유산을 찾고자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2. 최승희 초기 신무용의 다양한 스타일

 최승희는 1930년에 스승 이시이 바쿠(石井 漠)에게 배운 것을 바탕으로 경성에서 첫 무대를 만들었다. 이시이 바쿠에게 배운 직후였으므로 그녀의 춤들은 이시이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익히 아는 프로그램들이지만 1930년부터 1932년까지 경성에서 발표했던 작품들을 다시 나열해본다.
 《최승희 1회 발표회》(1930년 2월 1, 2일 / 경성공회당)
 1부 1. <金婚式의 舞蹈> 2. <印度人의 悲哀> 3. <陽氣의 踊子> 4. <戲弄>
 2부 1. <愛의 踊> 2. <오리엔탈> 3. <哀愁의 乙女> 4. <모던풍경>(재즈)
 3부 1. <해방을 구하는 사람> 2. <靈山舞> 3. <마주르카> 4. <적막한 왈츠>
 《최승희 2회 발표회》(1930. 10. 21, 22 / 단성사)
 1부 1.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2. <달밤에> 3. <長春不老之曲>(조선아악) 4. <放浪人의 설움> 5. <스파닛쉬 댄스>
 2부 1. <南洋의 情景> 가. 土人의 춤 나. 布?小夜曲 2. <淨土의 舞姬>(조선정악) 3. <印度人의 戀歌>
   4. <집시의 무리>
 3부 1. 가극 「파우스트」 중 제5막 초두의 ‘왈프르스의 밤’ 장면에서 무용조곡 (가. <古代舞踊>
   나. <클레오파트라와 黃金의 杯> 다. <트로이 처녀의 춤> 라. <각 여신의 춤>)
   2. <이 병정 못났다> 3. <埃及風景>
 《경성여자고학생 상조회 동정 최승희 공연》(1930. 11. 14 / 장곡천정 공회당)
 1부 1.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2. <달밤에> 3. <長春不老之曲>(조선아악) 4. <스파닛쉬 댄스>
 2부 1. <戱弄> 2. <放浪人의 설움> 3. <淨土의 舞姬>(조선정악) 4. <印度人의 戀歌>
 3부 1. 가극 「파우스트」 중에서. A. <古代舞踊> B. <클레오파트라와 黃金의 杯> 2. <印度人의 悲哀>
   3. <이 병정 못났다> 4. <埃及風景>
 《최승희 3회 발표회》(1931. 1. 10~12 / 단성사)
 1부 1.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2. <방랑인의 설움> 3. <淨土의 舞姬> 4. <그들의 로맨스> 5. <이집트 풍경>
 2부 1. <인도인의 비애> 2. <서반아소녀의 무도> 3. <남양의 정경> 4. <향토무용> A : 농촌소녀 B: 풍년이 오면
 3부 1. <인도인의 연가> 2. <집시의 무리> 3. <광상곡> 4. <이 병정 못났다> 5. <그들의 행진>
 《제 4회 최승희 무용연구소 신작무용회》(1931. 9. 1~3 / 단성사)
 1부 1. <世界의 노래> 2. <自由人의 춤> 3. <土人의 哀史> 4. <미래는 청년의 것이 다> 번외. <소야곡>
 2부 1. <人造人間> 2. <靈魂의 絶叫> 3. <鐵과 가튼 사랑> 4. <苦難의 길> 번외. <異國의 밤>
 3부 1. <폭풍우> 2. <어린 勇士> 3. <十字架> 4. <건설자>
 《양현여학교 자선 최승희 무용공연》(1931. 11. 23 / 장곡천정 공회당)
 1부 1. <겁내지 말자> 2. <나는> 3. <그들의 로맨스> 4.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번외. <남양의 밤>
 2부 1. <폭풍우> 2. <土人의 哀史> 3. <우리의 카리카츄어> 4. <世界의 노래> 번외. <향토무용>
 3부 1. <흙을 그리워하는 무리> 2. <어린 勇士> 3. <十字架> 4. <건설자>
 《5회 최승희 신작발표회》(1932. 4. 28~30 / 단성사)
 1부 1. <봄> 2. <향수> 3. <어린 동무> 4. <여직공> 번외. <유랑인의 춤>
 2부 1. <印度의 黎明> 2. <자장가> 3. <말세이유> 4. <흑인의 애환>
 3부 1. <수도원> 2. <철창에서> 3. <修女征服> 4. <두 세계>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최승희는 3년간 신무용의 선봉에서 많은 서양춤들을 발표했다. 춤의 화면 자료가 별로 없고, 춤의 제목만으로 작품 경향을 정확히 분석할 수 없지만, 이상 의 공연 프로그램에서 최승희 초기 작품들은 당시 서양춤의 여러 경향들이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이에 대해서 필자는『공연과 리뷰』 2009년 봄호에「최승희 모던댄스 시론」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스승 이시이 바쿠가 유럽에서 경험한 마리 뷔그만(Marie Wiegmann)의 표현주의 모던 댄스 계열로 <哀愁의 乙女>, <放浪人의 설움>,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광상곡>, <인도인의 비애>, <해방을 구하는 사람>, <靈魂의 絶叫>, <人造人間>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고뇌나 도시적 인간군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기보다는 역사적 비애나 박해, 자연적 재해와 결부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사도라 던칸(Isadora Duncan) 스타일로 짐작되는 춤은 <金婚式의 舞蹈>, <적막한 왈츠>이다. <적막한 월츠>는 로마 옷인 튜닉(tunic)에 맨발로 추는 춤으로, 이시이 바쿠의 <푸른 다뉴브 강가에서>의 사진과 비슷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시이 바쿠의 작품 경향은 마리 뷔그만의 표현주의 모던댄스가 주를 이루지만, 그 이전에 달크로즈의 리드믹이나 이사도라 던컨의 뉴댄스의 영향을 받았던지라, 이시이 바쿠에게 수업한 최승희 또한 이러한 계열의 춤도 추었다고 본다.
 이국취향의 작품도 다수 있다. <오리엔탈>, <스파닛쉬 댄스>, <南洋의 情景>, <집시의 무리>, <이집트 풍경>, <서반아소녀의 무도>, <남양의 밤>, <마주르카>, <인도인의 연가>등이 그러하다. 이 작품들은 일본이 서양춤을 도입하면서 서양인이 춘 동양춤, 즉 이국풍 춤으로 도입한 춤들일 것이다. 최승희는 이러한 이국풍의 춤을 조선에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추었을 수도 있다.
 조선춤의 개작으로 <長春不老之曲>(조선아악), <淨土의 舞姬>(조선정악), <靈山舞>, <향토무용>을 추었고, 안막과 결혼 후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로 <건설자>, <겁내지 말자>, <그들의 행진>,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여직공>, <自由人의 춤>, <흙을 그리워하는 무리>도 발표하였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에게 모던 댄스를 배웠지만, 그의 초창기 작품에는 표현주의 모던 댄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최승희의 공연에 대해, ‘혹은 그윽한 애수로 관중의 가슴을 조리게 하며, 혹은 속삭이는 로맨쓰의 쓰고도 달콤한 맛으로 마음을 근즐니게 하며 혹은 쾌활하고 익살구진 춤으로 사람을 웃기며 완전히 관중의 온 정신을 캣취하여 이리저리 마음대로 끌고 다니며 여지없이 매혹하였었다.’는 인상평은 최승희의 초기 작품들에 여러 경향이 혼재되어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3. 최승희 초기 신무용의 이국취향

 최승희 초기 신무용 작품 중에 다수의 이국취향의 춤들이 있으니, 이국 취향(異國 趣向, exoticism)을 간단히 말하면, 다른 지역이나 나라의 정서나 문물을 동경하고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국 취향은 20세기 전후하여 서양이 근대의 자본주의 발전에 절망하면서, 그 대안으로 이국 정취에 탐닉하고, 이것을 미적 향락의 대상으로 하거나 예술상의 수법으로 취했던 하나의 경향이었다. 또한 19세기 이래 서양 제국(帝國)이 동양을 본격적으로 식민지화하고 쟁탈하는 과정에서 동양문화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발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앞에서 분류한 <오리엔탈>, <스파닛쉬 댄스>, <南洋의 情景>, <집시의 무리>, <이집트 풍경>, <서반아소녀의 무도>, <남양의 밤>, <마주르카>, <인도인의 연가>등이 이국취향의 작품들이다. 이중 유럽의 춤들은 유럽 중심이 아닌 외곽의 민속춤 내지 캐릭터 댄스들이고, 유럽 바깥 지역으로 이집트, 인도의 춤들이 있다.
 이국취향의 춤들에 대한 사진이 일간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먼저 [사진 1]은 <스파니쉬 댄스>이고, [사진 2]에는 <인도인의 연가>라는 제목이 붙었다. 각각 스페인 춤과 인도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사진 1]최승희의 <스파니쉬 댄스>
 

 




[사진 2]최승희의 <印度人의 戀歌>

 

그리고 [사진 3]은 제목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의상과 손동작에서 인도풍 혹은 서아시아 춤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3]최승희의 한 포즈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통해 유럽의 표현주의 모던 댄스를 배웠음에도, 이국 취향의 작품들이 다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는 이시이 바쿠의 신무용 작품들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4. 이시이 바쿠의 조선 공연

 이시이 바쿠는 1926년부터 1928년까지는 조선에서 매년 공연했고, 이 시기는 유럽의 모던댄스를 경험한 직후였다. 1927년 이시이 바쿠의 두 번째 조선공연에 대해 출연자와 작품설명이 기사화되었다.
   1. 무용 <金魚> 란케 曲에 의함 : 崔承喜 石井榮子. 무용시는 안이다 한낫의 무용 遊泳하는 金魚群의 描寫.
   2. 무용시 <夢見> 리히알트 시유도라우쓰 曲에 의함 : 석정소랑. 순수한 독일음악에 일본적 감정을 시러노흔
    무용, 장래 일본무용으로서의 漠의 습작, 그윽한 처녀의 樂慾을 敍한 것.
   3. 무용 <에- 무서워> 시유만 曲에 의함 : 석정영자 石井美津子. 크리구의 동명의 곡을 무용화한 것.
   4. 극적 무용 <囚人> 라하마니노흐 曲에 의함: 석정막. 라파륜(나폴레옹을 말한다.)…모스코로…精銳한 軍隊의
    長驅…그러나 문득 오는 氷雪과 飢餓…이럿든 光榮, 鐵鎖 그것이 음악의 마음이다. 그러나 무용의 마음이 곳
    나파륜은 안이다. 인간…다만 인간…彼는 잡힌 몸이다…이러바린 자유와 인생.
   5. 무답(舞踏) <百鬼夜行> 에드와드 홀스트 曲에 의함 : 杉本直 山野春技 최승희 석정영자. 漠曰 이것은 내가 말
    하는 무용이 안이고 舞踏이다.
   6. 극적 무용 <海洋의 幻想> 藤井淸小 曲 : 석정막 석정소랑. 藤井씨의 동명의 곡을 무용화한 것. 이후 될 수 잇
    스면 邦人의 손으로 된 曲을 무용화하고 십다(漠)
   7. 무용 <遊戱 두 가지> A <파리○ 쓰>…山田耕作 曲 석정미진자. B <遊戱躍木> …石井五部 曲 석정영자 산
    야춘지.
   8. 무용시 <세레나-드> 모스고스키 曲 : 최승희
   9. 무용시 <山에 오를 > 에드와드 크리그 曲 : 석정소랑 석정막. 이 무용시는 山에 登하는 人의 心의 표현이다.
    漠의 가진 유모리틱한 一面을 荒削한 木彫的의 효과가 낫하난다.
   10. 무용시 <크로테스크> 에드와드 크리크 曲(석정소랑 振付) : 최승희 석정영자 삼본직. 섹스피아의 막베쓰에
    낫하나는 三人의 요괴, 피 등의 特한 이상한 一面의 인상적인 것을 무용화한 것.
   11. 무용 <아니도라춤> 에드와드 크리그 曲 : 석정소랑
   12. 무음악무용 <食慾을 다> 木魚의 音으로 산야춘지 삼본직 최승희 석정영자. 木魚를 치는 사나희 석정막,
    음악반주. 무용에서 무음무용에 過渡해 가는 힌낫 프로세스…적나라한 마음이 되얏슬 의 인간의 姿…그것
    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엿본다. 그 마음의 표현…新宿의 어느 가페의 속에서 발견하얏다고 漠은 말한다.
   13. 무용시 <람쓰의 자장가> 요한네쓰 람스 曲 : 석정소랑. 람쓰가 아기네를 위해 지은 세 가지 인텔메쓰
    의 하나이다. 가사가 업는 자장가…그것을 무용화.
   14. <아릿답고 푸른 늄강에 잠겨서> 요한 슈트라우스 曲 : 왈쓰의 王이라 이르는 슈트라우쓰의 대표적 圓舞曲
    그 무용화…百花繚亂.
 이상의 작품설명에서 프로그램들은 무용, 무용시, 극적(劇的) 무용, 무음악무용으로 춤 작품의 특성을 구분하였고, 이러한 구분만큼이나 이시이 바쿠는 다양한 스타일의 서양춤을 추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해 1928년 공연은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선인 제자 최승희, 조택원, 한병용이 동행했고, 프로그램은 <時의 亂舞>, <소야곡>, <호도찝게>, <죽음의 왈쓰>, <迦燈>, <유모레스크>, <食慾을 끈다>, <페아균트>, <靑春의 춤> 등이었다.
 이 기간의 작품들 중에서 <囚人>, <山에 오를>, <크로테스크>, <식욕을 끈다>는 표현주의 계열의 모던 댄스이다. 이시이 바쿠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의 1차 세계대전 이전의 가족제도와 관료제도의 권위, 완고한 사회질서, 산업사회와 삶의 기계화에 대한 도전의 성향과 독일인들의 불안정한 사회현상 속에서 내재하고 있는 자기의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하는 마리 뷔그만의 무용을 통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무음악의 무용’, ‘음악의 시각화’, ‘무음악과 타악기에 의한 추상감각 작품’과 같은 작품 형식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고,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마리 뷔그만이 무용에 음악을 종속시킨 것과 군무로 작품이 전개되는 무용 형식에 충격을 받았다. 마리 뷔그만의 표현주의 모던 댄스는 이시이 바쿠의 춤에 있어서 중심이었다.
 그러나 다른 경향의 작품들도 볼 수 있다. 음악을 시각화한 작품으로 <海洋의 幻想>, <람쓰의 자장가>,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강에 잠겨서>를 들 수 있다. 또한 무용으로 소개한 <金魚>, <遊戱 두 가지>는 특별한 양식적 특징을 갖지 않는 밝고 명랑한 춤으로 짐작되고, <아니도라춤>은 집시의 춤이다. 한국의 무용평론가이자 학자였던 강이문도 이시이 바쿠의 첫번째 조선공연이 서구 신흥무용의 온갖 면상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었다. 그의 춤이 표현주의 모던댄스를 중심으로 하지만, 다양한 춤들을 선보였던 것은 유럽의 다양한 근대춤들을 수용했었기 때문이었고, 이는 일본이 다양한 서양춤을 수입했던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5. 1920년대 일본 춤계의 이국 취향

 일본은 명치시대 이래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을 수입했고, 일본에 서양춤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900년대부터였다. 서구의 무용가들이 1900년대 초부터 일본에서 흥행했고, 일본의 젊은 무용가들은 서양춤을 배우기 위해 유학했다. 1910년대에 일본의 근대무용은 전통 가부키에 대한 개량으로서의 신무용과, 서양의 현대무용을 수입한 신흥무용으로 나뉘게 되었다.
 일본의 신흥무용은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와 음악가 야마다 고오사쿠(山田耕筰)에 의해 1916년에 무용시운동(舞踊詩運動)으로 시작되었다. 1915년에 극작가 오사나이 가오르(小山內薰)와 음악가 야마다 고오사쿠가 유럽을 경험하고 이사도라 던컨의 뉴댄스와 달크로즈(Emile Jaques-Dalcroze, 1865~1950)의 리드믹 개념을 이시이 바쿠에게 전해주었던 것이다. 무용시운동은 전통적인 일본무용과 발레에 대한 반발로 서양의 현대무용 기법과 이론을 기초로 창조된 순수무용을 추구하였다.
 이시이 바쿠는 1916년 제국극장에서 무용시 공연으로 데뷔 후, 1917년 ‘현대무용대회’를 개최하면서 호평을 받았고, 1922년 유락좌에서 단독 신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그리고 제자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와 함께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유럽에 체재하면서 표현주의, 다다이즘, 구성주의 등을 경험했다. 귀국 후에는 1925년부터 1927년까지 5회의 신작발표회를 개최하였는데, 이시이 바쿠의 초기 무용시 운동이 야마다 고오사쿠와 오사나이 가오르를 통한 간접 체험으로 얻은 1910년대의 달크로즈와 던컨의 영향이었다면, 유럽에서 귀국한 후로는 유럽체재 기간 동안 경험한 독일 표현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의 1910~1920년대의 작업은 순수예술을 지향했던 신흥무용이었고, 1928년에 엘리아나 파브로바가 일본에 직접 발레학교를 열기 전까지 당시 일본은 서양의 민속춤, 사교춤과 레뷰춤 등이 동시에 무대에 올려지고 있었다. 이시이 바쿠가 1916년에 4개월간 다카라츠카소녀가극단(寶塚少女歌劇團)에서 무용교사를 했었고, 아사쿠사에서 참가한 동경가극좌 활동(1917~8)이 점점 오락 취향으로 변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던 것과 같이 신흥무용은 일본 대중들에게 아직 계몽되지 않았었다.
 동경레코드 소속 오케스트라 반주의 <오리엔탈 댄스>는 발레부터 순회레뷰까지의 모든 서양무용 공연 프로그램에서 빠지지 않았고, <카라반>, <바그다드의 도적> 등 중동풍의 토속곡들이 범람했다. 다까다 세이코(高田せい子)는 듀엣 <인도의 환상>(1925), <마라게니아>(1925), <코팍크>(1927) 등 인도, 스페인, 러시아의 민족무용을 창작해 보였다. 또 일본의 속요 ‘春雨’에 맞춰 춤춘 <자장가>(1923)와 <장미의 정>(1925), <지나인형>(1923)은 일본 민속과 인도지나반도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1925, 26년에 데니쇼운(Denishawn)무용단도 공연하였다. 즉 1920년대가 끝날 무렵까지 이시이 바쿠를 제외하면 일본의 서양춤은 현대감각이 결여된 채, 이국취향이 중심을 이뤄 오리엔탈 댄스부터 쇼댄스, 서양의 민속춤 등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1928년에 공연한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작품도, 동양풍 춤, 스페인춤, 이집트풍의 춤, 찰스톤 댄스 등 마치 레뷰의 세계각국을 여행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또 1929년 스페인무용의 아르헨티나(La Argentina, 1890~1936) 공연 이후, 그녀의 <불의 제전의 춤>은 石井漠, 小林敏, 益田隆, 牧幹夫 등 일본의 남성 창작무용가들이 반드시 안무하여 상연하는 인기곡이 되었고, 스페인 무용이 인기를 얻었다. 1920년대 일본의 순수 예술무용 역시 충분히 개화하지 않았으며, 대중적 취향에 따라 다양한 서양춤들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시대 이래 서구적 근대를 지향하면서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서구에 편입시켰었다. 서양제국의 일원으로서 서양문화를 습득하고자 했었고, 다양한 서양춤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구미에서 유행하고 있는 춤들이 큰 시간차 없이 일본 무대에 올려졌고, 서양이 오리엔탈리즘으로 대상화했던 동양의 춤들도 다양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동시에 일본은 자신을 제외한 동양을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타자화, 대상화하면서, 동아시아 내부에서 일본 자신은 문명국으로 조선과 중국은 야만국으로 아시아 국가들을 차별화했었다.



 6. 최승희 신무용에 나타난 이국 취향의 문화사적 배경

 최승희가 유학했던 1920년대 일본의 춤계가 다양한 이국취향에 젖어있었던만큼 최승희 초창기의 신무용에도 이국취향의 작품들이 다수 있었다. 최승희가 이를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이는 일본이 취했던 자아 오리엔탈리즘(auto-orientalism)의 산물이었고, 이러한 작품들이 일제강점기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지식인이 취했던 일본을 통한 서구화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개항 이후 중화문명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고, 서구문명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을 통한 서구화였고, 서구의 문명과 동양의 야만이라는 대비적 구도에서 서구문명을 자기화하면서, 자신을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며 스스로를 타자화했었다. 그 순간 전통은 하루빨리 벗어야 할 유물이 되었고, 이러한 가치관은 문화예술 전반에, 식민지 조선의 춤 문화에도 적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속적으로 전개된 서양공연예술과 서양춤에 대한 지향으로, 조선의 전통공연예술에 대해서는 ‘서구 사회처럼 문명의 진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무지몽매한 야습(野習)’이라 했고, 이러한 ‘음무추태(陰舞醜態)’를 개선하기 위해 ‘일본연극(日本演劇)을 모방설행(模倣設行)’해야 한다고 했었다. 또 전통춤의 개량을 요구하며 ‘우리 기생의 연예는 벌써 시대에 늦은 죽은 연예가 되어간다.’고 했다.
 반면 서양춤에 대해서는 열려 있었다. 1910년에 극장 단성사가 러시아 무용수의 춤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고, 덴까스곡예단은 1913년 초연 이래 매년 조선 공연에서 서양춤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917년에 다동기생조합 기생이 처음으로 서양무도를 공연했다. ‘조선 기생도 이만하다 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도록’ 하라는 내용은 조선의 기생도 서양춤을 추어 신문명을 보여줄 수 있게 하라는 뜻이었다. 조선인이 드디어 서양춤을 추었고 감상하기 시작했으니, 서양춤에 대한 지향이 실체화된 것이었다.
 1921년 봄에 해삼위청년음악단이 전국을 순회공연한 후, 1920년대 들어 식민지 조선에는 서양춤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빈번해졌다. 기생들이 종종 서양댄스를 추었고, 일본의 곡예단이나 가극단의 래조공연에서 레뷰댄스도 볼 수 있었다. 서양음악과 서양춤을 보여주는 음악무도회가 여기저기서 열리기 시작했고, 가극단이나 흥행단체에서는 서양춤의 교수를 위해 외국인 춤선생을 초빙하기도 하였다. 서양춤은 소위 문명한 조선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위와 같은 문화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최승희의 신무용(New Dance)이 적극 수용되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춤은 여러 스타일의 서양춤이 혼재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이국취향의 서양춤들이 있었다. 이러한 이국취향의 춤들에 대해 약관 20세의 최승희가 취사선택할 판단력은 아직 없었을 보인다. 단지 스승에게서 배운 춤들을 조선에서 펼쳐보였던 것이며, 그것이 조선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7. 맺으며

 최승희의 초창기 신무용에서 볼 수 있는 ‘이국 취향’은 한국근대춤이 갖고 있는 ‘이국 취향’의 면면이기도 한 셈이다. 일제강점기에 서구지향이라는 문화사적 배경에서 일본을 통해 ‘이국 취향’의 춤들이 수용되었고, 근대 한국사회가 全사회적으로 갖고 있던 이국 취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최승희와 마찬가지로 조택원의 초기 작품에서도 이국취향의 춤 등이 혼재되어 있다. <에스파노로루>, <시바에 바친다>, <스페인야곡>, <흑인의 노래>, <인도의 노래>, <항가리아 광상곡>, <집시의 무리>, <애수의 인도> 등이 그러하다.
 당시 세계의 춤은 이국취향에 깊이 빠져 있었다. 19세기 말에 이사도라 던컨이 발레의 형식성에 반대하며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로부터 영감을 얻어 춤을 추기 시작한 이래, 세인트 데니스는 <무희의 춤>(1908), <에집타>(1909)를 추었고, 데니쇼운무용단의 <재탄생의 춤>(1916), <관음>(Kuan Yin, 1919)도 있었다. 발레도 모던 댄스의 영향을 받으며 비유럽의 춤들을 작품화하였다. 미하일 포킨의 <이집트의 하루 밤>(Une Nuit d'Egypte, 1908), <세헤라자데>(1910), 니진스키의 <목신의 오후>(1912), 골레이조프스키의 <미소년 요셉>(1924), 발란쉰의 <뮤즈를 인도하는 아폴로>(1928) 등이 그러하다. 많은 작품들이 이집트, 그리스, 이슬람, 인도, 중국 등의 문화를 소재로 하였고, 유럽의 무용가들은 이 지역들에서 새로운 소재들을 발굴하고자 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이 주체적으로 이러한 이국취향을 택한 것은 아니었으며, 최승희의 춤에서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최승희의 신무용에서 볼 수 있는 이국취향의 춤들은 한국 근대춤의 한 흐름으로 다음 세대에 이어졌다. 최승희의 레파토리들은 다른 무용가들에 의해 계속 재공연되었고, 모던댄스, 전통춤을 모던댄스 기법으로 재창작한 신무용, 이국취향의 춤들이 신흥무용이라는 범주에서 1960년대까지 공연되고 교육되었었다. 장추화의 <타부라의 리듬>, 진수방의 <마드리드의 무희>, <스페인의 밤은 깊어>, 은방초의 <항가리안 댄스>, <남방춤>, 주리의 <단사 에스파뇰라(Danza Espanola)>와 조광의 <플라멩코>, 정무연의 인도춤 <남국의 정서>, 송범의 <사사의 춤> 등이 이 계열의 춤들로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추어졌던 것이다.
 최승희가 추었던 이국취향의 춤들은 최승희 개인의 춤이면서 당대의 춤이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최승희의 춤을 문화사적 의미에서 되짚어보고자 했으며, 그녀의 춤이 다음 세대 한국근현대춤의 역사에 남긴 흔적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최승희 춤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최승희가 추었던 당대의 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음 세대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 속에 다음 세대의 춤의 철학도 반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론문 1>


최승희 신무용의 이국취향에 대한 토론문



박해영_중국 연변대학교 예술대학교 강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최승희무용예술의 발전맥락에서의 또 하나의 새로운 장르를 보아낸것 같아서 새로웠습니다.
 그중 첫째: 한국 신무용시대에 최승희의 이국적취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체현이 되였는지?
 둘째: 최승희의 이국취향을 갖춘 작품들이 한국신무용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셋째: 전래의 한국전통무용은 이러한 최승희의 이국취향사상에 의하여 어떤 변모를 가져왔는지를 더 공부하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토론문 2>



최승희 신무용의 이국취향 토론문



이지현_춤 비평가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렇게 국제포럼을 통해 한국춤역사에 최승희라는 중요한 인물을 포함하여 논의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을 감격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리를 가능하게 한국춤비평가협회와 한국춤정책연구소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춤연구가 김영희선생님의 ‘최승희 신무용(New Dance)의 이국취향’은 최승희의 한국전통춤을 기반으로 한 본격적 신무용 창작기와 월북 후 이념적 지향성을 뚜렷이 드러냈던 시기에 밀려 상대적으로 자칫 소홀하게 취급되었던 초기 작품의 경향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연구로 이 시기 최승희 공연에서 이시이 바쿠로부터 받아들인 서구 스타일의 모던댄스 경향과 이국적 취향의 작품들이 혼재되어 있는 지점을 포착하여 연구하였다.
 본 연구를 통하여 1930-32년까지 최승희의 작품경향을 서양춤 중심의 신무용으로 규정하고 그 세부의 경향에 따라 1. 마리 뷔그만의 표현주의 모던댄스 계열 2. 이사도라 던컨의 뉴댄스나 달크로즈의 리드믹 영향을 받은 계열 3. 이국취향 4. 조선춤을 개작한 작품 등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이국취향의 작품에 대해서는 순수 예술춤보다는 이국취향의 오락춤들이 1920년대 일본 춤계에 소개되고 유행되었던 문화적 배경을 제시하고, <오리엔탈>, <스파닛쉬 댄스>, <南洋의 情景>, <집시의 무리>, <이집트 풍경>, <서반아소녀의 무도>, <남양의 밤>, <마주르카>, <인도인의 연가> 등의 작품들이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이국취향의 특성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배경으로 다음의 질문을 하고자 한다.
 1. 1930-32년까지의 최승희 작품의 이국취향에 대해 “일본이 서양춤을 도입하면서 서양인이 춘 동양춤, 즉 이국풍 춤으로 도입한 춤들일 것이다. 최승희는 이러한 이국풍의 춤을 조선에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추었을 수도 있다” 라거나 “서양이 오리엔탈리즘으로 대상화했던 동양의 춤들도 다양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이미 있었던 작품을 그대로 모방하여 무대에 올린 것이나 그저 일본의 상황을 어떤 자의식도 없이 그대로 반영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창작자로서의 주체성 측면에서 최승희 이국취향 작품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

 2. 논문을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이국취향의 작품과 서구 스타일의 모던 댄스 계열의 작품은 구별하고, 이국취향 작품과 레뷰춤이나 오락적인 쇼춤은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구분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대중적인 인기와 주목을 끌었다는 의미와 그것이 모던 댄스의 특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는가? 그렇게 본다면 그 당시 서양춤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이국취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위 논문은 한국춤비평가협회와 한국춤정책연구소가 공동 주관하는 2011년 심포지엄의 발표문이며 발표문의 원저자는 김영희임. 저자의 승인 없이 인용 및 복제할 수 없음.

2011. 1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