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파리 현지취재_ 파리오페라발레 시즌 개막공연
새 감독에 의한 발레 종가의 새로운 변신
장지영_국민일보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파리오페라발레의 2015-2016시즌은 전 세계 발레계의 주목을 모으고 있다. 바로 브리지트 르페브르에 이어 2014-2015시즌부터 예술감독이 된 벵자멩 밀피예가 프로그래밍한 첫 시즌이기 때문이다. 2014-2015시즌의 경우 전임 감독인 르페브르 시절에 이미 프로그래밍 된 것이어서 밀피예의 색깔이 드러나지 않았다.
 밀피예는 프랑스 출신이지만 파리오페라발레에선 이방인이다. 프랑스 남부 리옹 컨서바토리를 다니다 미국 뉴욕시티발레단(NYCB) 부속학교로 옮긴 그는 제롬 로빈스의 눈에 띄어 1995년 NYCB에 입단했다. 무용수로서 승승장구하는 한편 안무가로서 LA댄스프로젝트를 이끄는 등 커리어를 쌓아온 그는 미국 무용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영화 〈블랙스완〉의 성공에 이어 여주인공 나탈리 포트만과의 결혼은 그에게 세계적인 유명세를 안겨주기도 했다.

 



 지난 2월 4일 파리오페라발레의 2015-2016시즌 프로그램이 발표됐을 때 평단과 팬들은 당황해 했다. NYCB 출신인 밀피예가 오면서 발레단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폭이 컸기 때문이다. 2004년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을 해체한 이후 발레를 떠나있던 윌리엄 포사이스가 1년에 3개월씩 상임안무가로 활동한다는 소식과 함께 밀피예를 비롯해 조지 발란신, 제롬 로빈스, 크리스토퍼 휠든, 저스틴 펙,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등 미국 출신이거나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는 안무가들의 작품이 대거 포함된 것이 특징이다.
 마기 마랭, 보리스 샤르마츠, 제롬 벨, 안느 테레사 드 키에르스마커 등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안무가들의 작품도 여럿 있었지만 미국 안무가들이 수적으로 워낙 두드러졌다. 특히 NYCB의 전설인 발란신과 로빈스는 물론 현재 상주안무가인 펙의 작품이 2개 이상 포함됐다.
 이와 관련해 부정적인 측에서는 파리오페라발레가 ‘NYCB화 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파리오페라발레의 전통적인 전막발레는 누레예프 버전의 〈라 바야데르〉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파트리스 바르의 〈지젤〉 등 3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변화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 가운데 2015-2016시즌이 지난 9월 22일 개막했다. 개막작은 이날 오후 6시 보리스 샤르마츠의 〈20세기를 위한 20인의 댄서〉와 오후 8시반 밀피예-로빈스-발란신의 트리플빌 공연이었다. 10월 11일까지 매일 나란히 공연된 두 작품 가운데 〈20세기를 위한 20인의 댄서〉는 가르니에궁 복도와 회랑에서 추는 프롬나드 공연으로 티켓 값도 15유로로 저렴했다. 반면 NYCB 출신 3인방의 공연이 시간대나 티켓 값으로나 본공연에 해당하는 셈이다. 게다가 예술감독 밀피예의 올 시즌 처음이자 유일한 신작이 선보이는 자리라 더욱 주목을 모았다.

 



 우리나라에도 몇 번 공연한 적 있는 샤르마츠는 일상에서의 움직임과 전시공간에서의 연극적인 움직임을 병치시키는 작업을 보여주는 단체 ‘뮤제 드 라 당스(Musee de la danse)’를 이끄는 한편 프랑스 렌느 국립안무센터의 예술감독이다. 평소 “움직임은 문맥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펴는 그는 이번에 파리오페라발레의 둥지이자 발레사의 증인인 가르니에궁 내부에서 공연을 펼쳤다.
 실제로는 24명의 무용수가 나온 〈20세기를 위한 20인의 댄서〉는 무용수들이 캐주얼한 의상을 입은 채 발레 뤼스부터 제롬 벨까지 20세기에 등장한 유명 레퍼토리의 솔로춤을 선보였다. ‘발레의 종가’인 파리오페라발레이기 때문에 가능한 작품으로 평단의 평가도 매우 좋았다.





 한편 밀피예-로빈스-발란신의 트리플 공연은 〈Clear, Loud, Bright, Forward〉 〈Opus 19/ The Dreamer(작품번호 19와 몽상가)〉 〈Thème et variations(주제와 변주)〉로 구성됐는데, 세 작품 모두 신고전주의 발레 스타일인 것이 특징이다. NYCB의 두 거장과 자신의 작품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밀피예는 자신이 발란신으로부터 내려온 신고전주의 발레의 적자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셈이다. 따라서 이번 개막작은 앞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누레예프 스타일로 대표되던 파리오페라발레에서 추상적이고 심플한 발란신 스타일의 작품이 많아질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예고했다.
 우선 맨 처음 무대에 오른 밀피예의 〈Clear, Loud, Bright, Forward〉는 미국 현대음악계의 총아인 젊은 작곡가 니코 뮬리가 음악을 맡았다. 정통 오페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클래식한 작품은 물론이고 록음악과 영화음악까지 두루두루 재능을 보여주고 있는 뮬리는 밀피예가 NYCB 소속이던 2007년 〈From Here on Out〉에서 처음 만난 이후 여러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 왔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편인 밀피예는 미니멀리즘의 거장인 필립 글래스를 비롯해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들과의 협업을 즐겨 했는데, 글래스의 소개로 뮬리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남녀 무용수가 각각 8명씩 출연하는 이 작품은 딱히 주역 없이 군무 중심으로 구성됐는데 평소 음악, 음향, 조명을 중시하는 그의 안무 특성을 극대화시킨 느낌이 강하다. 세 면을 회색으로 처리한 프로시니엄 무대 위에 은회색 레오타드를 입은 무용수들이 음악에 맞춰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여기에 조명은 끊임없이 바뀌며 공간을 분리하거나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강조한다.
 전반적으로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이 작품은 확실히 관객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무용수들의 움직임, 공연의 구성과 흐름이 전반적으로 빠른 편이었는데, 밀피예가 잠시라도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한 게 느껴졌다. 자신이 처음 프로그래밍하는 첫 시즌의 첫 작품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힘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평단의 반응도 ‘수작’까지는 아니지만 대체로 호평을 내놓았다. 참고로 프랑스는 물론이지만 밀피예의 사실상 고향인 미국의 언론과 전문잡지 등에서는 이번 공연에 대한 리뷰를 대거 쏟아냈다.

 



 〈Opus 19/ The Dreamer(작품번호 19와 몽상가)〉 역시 로빈스의 아름다운 안무를 대체로 잘 살린 편이었다. 파리오페라발레의 레퍼토리 안에 로빈스의 몇몇 작품이 포함되어 있지만 1979년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가지고 만든 이 작품은 이번에 처음 공연됐다.
 뮤지컬과 발레를 오가며 안무를 병행했던 로빈스는 1968년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끝으로 발레계로 완전히 복귀했다. 이듬해 뉴욕시티발레로 가서 1972년 발란신과 함께 공동 예술감독을 맡는 등 세상을 뜰 때까지 머물렀다.
 발란신의 영향을 받은 로빈스는 1969년 〈모임에서의 춤들〉을 시작으로 1970~1980년대 스토리와 감정이 최대한 배제된 추상발레 작품들을 꾸준히 내놓았다. 드라마 중심의 뮤지컬 안무에서 빛나던 그가 뉴욕시티발레에서 만든 추상발레는 평론가들로부터 ‘이류 발란신’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발란신과 다른 따뜻함이 있다. 〈Opus 19/ The Dreamer(작품번호 19와 몽상가)〉만 보더라도 주역 무용수가 제목에 나오는 ‘몽상가’처럼 꿈꾸듯 움직이는 모습이 내면적이며 연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Opus 19/ The Dreamer(작품번호 19와 몽상가)〉는 남녀 무용수가 각각 7명씩 출연하며 1쌍의 주역이 있다. 초연 당시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패트리샤 맥브라이드가 주역을 맡았다. 이번 파리오페라발레 작품에서는 에투왈인 매튜 가니오와 아만딘 앨비슨이 주역으로 나섰는데, 프랑스 언론이 대체로 호평을 한 것과 비교해 미국 언론에선 다소 아쉬웠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발란신이 1947년 차이콥스키의 관현악 조곡 3번 가운데 마지막 악장인 4악장을 가지고 만든 〈Thème et variations(주제와 변주)〉는 젊은 시절을 보낸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우아한 형식미를 무대에 새롭게 불러낸 작품이다. 남녀 주역 1쌍을 중심으로 솔리스트, 군무가 체계적으로 배치돼 차례차례 화려한 춤을 보여준다. 파리오페라발레의 이번 공연에선 에투왈인 조슈아 호팔트와 로라 해켓이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이미 파리오페라발레의 레퍼토리에 포함돼 있는 이 작품이 이번 공연에선 제대로 구현됐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원래 발란신의 안무는 박자 하나까지 확실하게 추지 않으면 단점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는 게 특징인데, 이번 공연의 경우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각각 흐트러져서 어수선하게 보였다. 이와 관련해 미국 언론에서는 "파리오페라발레 발란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고 냉정한 반응을 내리기도 했다.

2015. 10.
사진제공_파리오페라발레 공식블로그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