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우리

의학의 시각: 춤의 세계 - 그림의 세계 3
드가가 무용수 권리를 옹호한 방법
문국진_원로 법의학자

프랑스의 화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가 무희 그림에 손을 대게 된 데는 두 가지 동기가 있었다. 그 하나는 그가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발레를 관람하고 무희들의 역동적인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고 발레장면을 그릴 것을 생각 했다. 다른 하나의 동기는 당시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이 사업에 실패해서 가정에 경제적인 타력을 받는 때인지라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의무감에서 돈이 될 그림을 그릴 것을 생각하다가 무희의 그림으로 낙착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중들이 발레에 열광한 것은 몸매가 아름다운 무희들이 빚어내는 오감만족의 종합예술이라는 것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중의 흥미를 감지한 드가는 그렇다면 무희 그림은 팔릴 것이라는 영민한 판단을 하였으며, 그렇다고 드가가 화가로서의 자존심마저 내던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아무도 그리지 않았던 무희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연습과 공연 모습을 직접 관찰하고 사생(寫生)해야 하는 등 이만저만 노력이 드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의 연습하는 무회들이 아니라 직접 무대에 선 무희들의 작품을 보고 그 작품에 암암리에 표출된 당시의 사회상도 표현한 그림을 보기로 한다.




드가 〈무대 위의 두 무희〉 (1874) 런던, 코 톨드 갤러리




 드가의 작품 〈무대 위의 두 무희〉(1874) 그림을 보면 무대 뒤에서 대기하거나 연습하며 긴장된 무희들의 모습과는 달리 이 작품은 무대 위에서 두 무희가 춤추는 장면을 그렸다.
 그림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주인공들이 화면의 중심에서 벗어난 구도와 무희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시점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검이다. 즉 이렇게 주인공들을 중심에서 빗겨 배치하고 제한된 틀에 맞춰 배경을 자르는 구도는 그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이는 드가의 전형적인 그림 수법으로, 마치 우연히 셔터가 눌려 찍힌 사진처럼 실제 관객이 되어 발레 극을 보고 있는 순간의 효과를 내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동시에 이 작품에서 무대의 앞부분은 생략되었다. 드가가 높은 위치의 관람석에서 내려다보고 무희의 동작을 포착한 것이기에, 무대의 무희 이외의 배경도 자유로운 터치로 처리할 수 있기를 바라서 시도한 것 같다. 배경에 산으로 보이는 무대장치는 무대의 공간감을 확대시키기 위한 것인데 여기에 나타나는 사람들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를 시험해 보는 의미가 포함된 작품으로 보인다.
 두 무희는 서로 보며 제각기 다른 동작을 취하고 있는데, 좌측의 무희는 두 다리를 고추 세우고 두 팔을 좌측으로 향하고 있으며, 우측의 무희는 양다리와 팔을 벌리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그림 왼쪽의 무희는 제법 우아한 포즈로 춤에 열중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얼굴은 예쁘게 표현한 얼굴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쁘지 않는 얼굴의 무희를 그린 것 역시 드가의 의도였다고 한다. 드가는 많은 무희를 그림으로 남겼지만, 그가 그린 어느 누구도 개성이 없다.
 이러한 드가의 무희들의 그림 표현에 대해 일간 〈가디언〉지의 미술평론가 아드리안 셜은 “드가가 그린 일련의 춤추는 무희들의 표현은 그녀들의 육체적인 동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내면까지 포착해냈다”고 평했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 화가 고갱은 “드가가 그린 무희는 여성이 아니라 평행을 유지하는 기묘한 선(線)”이라 평해 드가의 흥미는 개인의 성격이나 기질이 아니라 움직임의 형태였다고 서로 다른 평을 했는데 이렇듯 미술평론가와 실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보는 관점에는 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드가 〈무대 위의 무용수, 일명 스타〉 (1878) 파리, 오르세 미술관




 드가의 다른 무대 위의 무희작품인 〈무대 위의 무희, 일명 스타〉(1878) 작품은 오일 페인트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빛깔은 찬란하지만 빨리 마르기 때문에 단번에 칠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당시에는 별로 사용하지 않던 파스텔로 그려 그림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러한 기법은 다른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는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이다. 드가는 파스텔의 색채가 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특별한 점착방법을 사용하였다는데, 그 기법은 오늘날까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다.
 여기에 빠른 필치로 공연의 한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역동적인 발레의 모습과 환상적인 공연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져 드가의 가장 유명하고 훌륭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하여 평론가들로부터 발레 공연장의 분위기와 무희의 아름다움을 간결한 표현만으로 화폭에 생생히 재현해냈다고 호평을 받은 작품이라 한다.
 주인공 무희를 캔버스 한쪽에 배치하는 과감한 구성과 중간이 텅 빈 균형 잡히지 않은 구도는 예측하기 어려운 드가의 작품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눈부신 빛에 싸인 스타 무희의 두 팔은 마치 무엇을 향한 호소인 듯한 순간적인 모습과 그녀가 발 딛고 있는 무대 뒤편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낸 것이 바로 드가의 진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사실 드가가 무대 위에서 정말 ‘공연’하고 있는 무희를 그린 경우는 드물었다. 그가 무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무희라는 역동성과 간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훌륭한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무대 뒤에서 연습하거나 준비하는 무희를 그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그는 무대 위의 무희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그 당대 사회의 현실적인 모순을 숨김없이 표현하였다.
 즉 무대 뒤편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성이 화려한 순백의 발레복을 입고 조명을 받으며 우아한 발레동작을 선보이고 있는 무희를 응시하고 있다. 이 그림은 어린 무희의 발레동작만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숨은 뜻을 알고 나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여성 무용수는 가난한 하류 계층의 소녀들이었다. 반면에 사교장의 성격이 강했던 오페라 극장에서 발레를 관람했던 것은 사회 지도층들과 귀족들이었다. 이들 중 2층 박스 석에서 무대를 관람한 최상류 계층들에게는 극이 끝난 뒤 무대 뒤에서 무용수들을 따로 만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고 한다. 무대 뒤에 마련된 크고 화려한 공간에서 가난한 무용수들과 부유한 상류 인사들 사이의 은밀한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검은 정장의 사나이에 대해 일부는 그저 ‘예술 후원자였을 뿐’이라고 설명하지만 ‘19세기 프랑스 발레계의 퇴폐의 상징’이라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그래서 드가는 화려한 무대 뒤에 숨겨진 예술계의 어두운 단면 또한 화폭에 담아냈던 것이다.
 즉 당시 가난한 부모들은 돈을 받고 자녀를 무용단에 입단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무용단에 입단한 소녀들은 부유한 후원자의 수입에 의존해 고급 매춘부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즉 이 작품 속 무대는 아름다운 예술의 현장이 아닌 무희들이 돈으로 매매됐던 시대의 현실을 암시 폭로한 것이다.
 드가는 자기 가정이 경제적 타격을 받는 때인지라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의무감에서 돈이 될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했던 입장에서 수입도 중요하지만 무희들의 무대에는 화려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의 마수가 뻗치고 있었다는 것을 폭로하는 의미를 담았던 것이다.
 이렇듯 드가는 무희들이 예술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생계를 위해 고생하는 것이 가여워 무희들의 권리 옹호 차원에서 붓을 놀린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을 그림을 자세히 분석하면 알 수 있다.

문국진 박사(1925~ )는 한국 최초 법의학자이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창립 멤버로 한국 법의학계의 살아 있는 역사이다. ​​
2019. 0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