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한국춤비평가협회 4개국 국제 포럼〈다시 최승희를 본다〉
국제학술포럼 발제1 : 최승희 연구에 대한 고찰
주디 반 자일(Judy Van Zile) _ 하와이 마노아대학 무용과 명예 교수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방문하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최승희는 한국 무용과 한국 무용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 인물이다. 이 자리를 빌어 본 회의에 저를 초대해 주신 한국춤비평가협회와 한국춤정책연구소 관계자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또한 본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측면에서 지원해주신 장광열 교수님께도 감사 드린다.
 약 30년 전 쯤에 한국 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이래로 다수의 훌륭한 동료 및 지인들을 알게 되었고 이들과 함께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그들을 한 사람씩 호명해 감사를 표한다면 심포지엄 시간이 다 지나가도 부족할 것이다. 그 동안 함께 토론하고 많은 가르침을 준 무용수, 무용 비평가, 학자 및 학생들께 고마움을 표한다.
 본 연구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4차례에 걸쳐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진행되었으며, 그 이후 수 차례에 걸쳐 한국에 짧게 체류하면서 수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저자의 연구를 지원해 준 한국예술문화진흥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풀브라이트 프로그램, 한국국제문화협회, 하와이대 한국학센터 (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Center for Korean Studies) 등 연구 기관에 고마움을 표한다. 또한 직접 한국어로 발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며, 도움을 준 통역에게 감사를 표한다.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영자 신문에서 최승희의 공연에 대한 공연평(review)를 발견한 19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의 저명한 무용평론가인 존 마틴 (John Martin)은 1938년 뉴욕타임즈 (the New York Times)에 최승희 공연에 대한 평을 실었다. 존 마틴의 공연평을 읽고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즉 존 마틴은 해외 여행을 한 차례도 한 적이 없으며 당시 미국에는 한국인 무용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에 실린 존 마틴의 평론을 읽으면서, 나는 다카시마 유사부로 (Takashima Yusaburo, 1959)와 정병호 (1994) 교수의 초기 출판물들을 검색했으며,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최승희의 미국 공연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또한 1996년 여름, 그녀의 궤적을 따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뉴욕 등을 방문했으며 이 기간 동안 도서관, 고문서 보관원 등에서 신문 파일과 고문서를 살펴봤으며, 최승희를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나 이들을 알고 있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찾고자 했다.
 동시에 한때 한국의 무용사에서 삭제되었던 한 명의 한국 여성에 대해 한국 내에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 내에서 최승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최승희에 대해 더 알고 그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관심도 커졌다. 최승희가 어떠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무용이 변모하는 동안의 시대상, 개인으로써 또한 무용가로써 그녀의 삶에 영향을 끼친 다양한 요소 및 오늘날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 무용에 있어 최승희가 기여한 바 등을 연구하고자 했다.

 최승희와 그가 창조한 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의 주요 관심사도 변화했지만, 다른 연구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큰 질문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했다. 첫째, 사람들은 어떻게 (how) 춤을 추는가? 둘째, 사람들은 왜 (why) 자신의 방식으로 춤을 추는가? 즉 춤을 그 자체로 보고자 하는 노력은 내 연구의 상당부분에 있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최승희를 연구하는데 있어, 역사 연구자가 직면하게 되는 일반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가 생존했던 시기의 시대적 특성, 최승희의 경험과 춤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관심 등으로 인해 이러한 어려움은 훨씬 강력하게 다가왔다.
 즉 이들 문제는 일본 점령 및 이후 전개되는 한국 분단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북한의 다양한 측면과 관련된 자료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연구를 진행하기 어려웠다. 후자의 어려움으로 인해 연구의 초점은 1940년대 중반 이전의 최승희 춤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최승희의 초기 무용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특히 최승희의 안무와 공연이 실제로 어떠한 모습을 띄었는가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난제들에 직면했다. 최승희의 월북 이전 공연에 대해서는 거의 영상 (film footage)이 남아있지 않다. 이는 최승희의 무용을 파악하기 위해 다른 종류의 정보원에 의존해야 함을 의미한다. 무용을 짐작하기 위해 사진을 참조해야 하며, 최승희 자신이 남긴 글이나 평론가, 학자 및 그의 공연을 본 이들이 남긴 글에 의존해야 했다. 또한 그가 안무한 작품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재구성한 개인들의 공연을 살펴보았으며, 최승희의 공연을 보거나 함께 공부한 이들 가운데 생존해있는 이들의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 춤을 형상화 하기 위해 이러한 정보원을 활용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다 (잠시 주제를 벗어나 올해 초 새롭게 편집되어 출간된“Imaging Dance”를 소개하고자 한다. Visual Representations of Dancers and Dancing은 과거의 춤을 이해하는데 있어 다양한 매체의 정지 영상을 이용하는 것과 관련된 많은 문제들을 고찰하고 있다.)
 최승희 연구의 세 번째 어려움은 최승희가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곳에서 공연을 했기 때문에 관련 문서 기록이 여러 언어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감히 스스로를 최승희에 대한 권위자라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최승희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외부 관찰자”라고 부르고 싶다. 검열이 사라진 후, 많은 개인들이 이처럼 복잡한 무용수를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왔다. 회의 발표자료, 석박사 학위 논문, 학술지 논문 및 다양한 언어로 책이 출판되었으며, 최승희 춤을 다시 공연하기도 했다. 그 결과 최승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이들의 통찰력이 최승희와 궁극적으로 한국 무용을 깊이 이해하는데 있어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승희에 대한 연구 결과를 다양한 회의를 통해 발표했으며 세 권의 책을 출판했다.첫 번째는 2001년에 출판된 Perspectives on Korean Dance의 한 장(CHAPTER)에 실렸다. 이 연구는 최승희의 미국 순회 공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그가 대중에게 어떻게 비쳐졌는가, 최승희 공연의 본질은 무엇인가, 언론은 최승희를 어떻게 조명했는가” 등을 살펴보고자 했다. (Van Zile 2001:185)
 본 연구는 일부 분석 및 해석을 시도했으나, 전반적으로 묘사적인 작업이었다. 즉 최승희공연 이전에 신문에서 다뤄진 보도와 공연 이후의 공연평을 비교했으며, 공연 날짜, 장소, 공연 담당 회사, 공연 후원자 등을 살펴보았다. 또한 춤에 대한 인쇄 프로그램을 통해 춤에 대한 기술을 취합하고 미국내의 공연을 위해 최승희가 작성한 계약서 등에 대한 미국 총영사 (American Consulate General)의 서신 등 기타 주요한 자료를 분석했다. (1937년 3월)
 이어지는 연구를 통해 최승희의 무용에 대해 좀 더 광범위한 맥락을 구성하고자 했다. 다양한 무용 이론을 도입하고 그가 생존했던 시대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론적 접근을 활용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회의 등을 통해 몇 차례 발표했으며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첫 번째는 Dance Research Society (대만)에서 후원한 2006년 “Dancing Under the Rising Sun” 회의였다. 이 회의는 일본 점령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춤에 미친 영향을 다뤘으며, 나의 논문(We Must Be Unique, We Must Be Modern: Dancing in Korea During Japanese Colonization)을 비롯해 일부 발표 논문은 2008년 Taiwan Dance Research Journal에 게재되었다. 이 논문은 식민주의, 민족주의 및 근대성 (Modernity)의 상호 관계를 모색하는 역사학자들의 모델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를 최승희와 그의 무용과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적용했다.
 가장 최근의 출판물은 “Blurring Tradition and Modernity: The Impact of Japanese Colonization and Choe Sung-hui on Dance in South Korea Today”로 Laurel Kendall이 편집해 올해 초 출판한 Consuming Korean Tradition in Early and Late Modernity. Commodification, Tourism, and Performance에 게재되었다. 이 연구는 대만의 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을 확장한 것으로 “전통적(traditional)” 춤의 정의와 한국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춤의 진화에 대해 문제 의식을 제기했다.
 오늘 발표를 통해 기존의 세 편의 연구에서 제기한 부분을 선택해 자세히 기술하고, 이들이 공동으로 내포하는 문제 의식을 요약하며, 이어서 현재 진행 중인 연구와 최승희에 대한 고찰의 방향을 설명하고자 한다.

 최승희의 미국 순회 공연에 대한 자료를 연구하던 중, 몇 가지를 발견했다. 먼저, 3년에 걸쳐 미국 순회 공연을 하는 동안 프로그램의 레파토리가 바뀌었으며 최승희는 개별 춤의 안무를 변경했을 가능성이 크다.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로스앤젤레스, 뉴욕으로 이동하면서 최승희는 뉴욕에서 시간을 보냈고 이어서 유럽으로 건너간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공연을 한 후,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및 라틴아메리카에서 공연을 했다. 신문 평론과 인쇄된 프로그램들을 보면, 최승희가 자신의 프로그램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비판적인 평론에 주목하고 있었으며, 이를 향후 프로그램에 반영해 해외 관객의 취향에 맞도록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관객을 즐겁게 하고 국제적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최승희 자신이 언급한 목표와도 일맥 상통한다. (최상철 1996:6 인용)
 한 신문에 따르면 최승희가 마지막 미국 공연을 앞두고 그녀의 초기 공연들이 그다지 “한국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 프로그램은 완전히 한국적일 것이다. 나는 2년 전 이곳에서의 공연을 통해 많은 경험을 했고, 프로그램을 바꾸어 좀 더 동양적인 느낌을 싣고자 했다 (Anonymous 1940에 인용).” 비록 한국에 돌아온 후 최승희는 해외 순회 공연 중 20개의 새로운 작품을 안무했다고 말했지만 (최승희 1941, Choe 1990), 그가 미국 무대에 올린 작품의 제목과 상세한 설명 (description)을 보면, 해외 순회 공연을 떠나기 전 일본과 한국에서 올린 원작의 안무를 단순히 재구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첫 번째 연구를 통해,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서 최승희가 해외에서 공연한 많은 춤의 버전이 한국의 상징과 같이 자리매김했으며, “new dance (신무용)”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동시에 “전통” 한국 춤 (한국전통무용)으로 종종 간주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해외 공연의 인기는 한국 내의 인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승무(Monk’s Dance), 북춤 (Drum Dance), 무녀춤 (Seoul Fortune Teller) 등은 미국 무대에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한국 무대에서도 인기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 번째 연구의 또 다른 핵심은 최승희의 보살춤(Bodhisattva dance)과 미국 무용수인 Ruth St. Denis의 안무 간의 유사성이다. St Denis의 춤은 다양한 버전들이 있으며 관음 (Kuan Yin, Kwannon)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 스틸 사진, St. Denis 안무에 대한 구두 설명 및 최승희 보살춤에 대해 남아 있는 짧은 영상 둥을 통해 최승희와 St. Denis 춤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Ruth St. Denis와 Ted Shawn이 설립한 Denishawn Company는 1925년, 1926년에 일본에서 공연을 했으며, 인쇄된 프로그램에 따르면 St Denis는 춤을 무대에 올렸다. Denishawn 무용수인 Jane Sherman과 St Denis의 파트너인 Ted Shawn에 따르면 이들 무용단이 1926년 일본 공연을 위해 돌아왔을 때 (이는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따라 도일한 직후 임), 자신들이 1925년 일본 공연에서 선보인 춤의 사진이 들어간 엽서를 발견했으며, 일본 무용수들이 음악, 움직임, 의상 등을 Denishawn 무용으로부터 모방해 공연하고 있었다. (Van Zile 2001:215)
 이러한 고찰을 통해 과연 최승희의 보살춤이 St. Denis 춤의 모방이었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최승희가 St. Denis의 공연을 보았으며, 그의 무용을 모방하려 했을까, 최승희가 St. Denis의 춤을 모방한 일본 무용수의 공연을 보고 일본 무용을 모방하려 한 것인가? 이어서 최승희 춤의 하나가 한국, 일본 및 해외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미국에서 매우 “동양적”으로 기술되었던 최승희의 춤이 사실은 미국인이 창조한 “동양”춤에 기원을 두고 있을 수 있다는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최승희의 미국 순회공연과 관련된 나의 마지막 고찰은 이시이 바쿠의 발언 등을 포함하는 복잡하고 때로는 상충되는 정치적 문제이다. 이시이 바쿠는 “두 민족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한국에서 뛰어난 무용수를 초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히라바야시 히사에 인용 1977:189)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꿔야 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최승희는 사이 쇼키로 알려졌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은 아마도 “미국과 일본의 오랜 우호 관계를 증진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익명 1937) 또한 최승희의 일부 미국 공연을 둘러싼 정치적 데모에 대해 작가나 최승희 자신이 언급한 말은 대부분의 미국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Van Zile 2001:217-218). 미군 대외비에서 해제된 문서를 보면 최승희는 남미 등의 공연으로 인해 국제 스파이로 분류되어 있다 (육군무관 보고서/Military Attache Report: 1942).
 다음으로 두 번째 출판물인 “We Must Be Unique, We Must Be Modern: Dance in Korea During Japanese Colonization,”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전 출판물의 한 장(chapter)를 통해 일반적으로 언급한 정치적 문제를 좀 더 심도 있게 다루고자 했다. 즉 일본 식민지하에서 삶의 복잡성, 최승희에게 영향을 준 요소 등을 강조하고자 했다 (Van Zile 2008:116).
 이를 위해 한국 문제 전문가인 신기욱과 마이클 로빈슨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한다 (1999:5). 이들은 식민지 시대의 역사 연구는 일본의 억압과 한국의 민족주의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나누고 있으며, 이러한 이분법은 시대의 삶을 정확하게 대변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이들은 식민주의, 민족주의, 근대성(modernity)라는 세 힘이 상호 작용하는 삼각형 모델을 제시하며, 이러한 작용이 식민시대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설명한다.
 나는 이 모델을 한 단계 확장해 그 중앙에 “정체성”을 두며, 신기욱과 마이클 로빈슨이 제시하는 세가지 힘이 최승희 개인의 정체성과 그의 춤 정체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았으며, 이러한 관계가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고유하면서도 모던한 긴장(tension)에 영향을 주었음을 보이고자 했다.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 일제 식민시기 동안 검열, 금지, 모욕 및 기타 많은 억압적 행위들이 일어났음을 주지하는 동시에 역사학자들로부터 이 시기의 복잡한 정책노선 변화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 일본 제국은 새로운 정책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과 통제를 행사하고자 했으므로 일본의 정책은 수시로 바뀌었다. 일본의 정책은 대부분 한국문화 말살에 기여하는 것으로 비췄지만 어떤 경우에는 한국 문화를 양성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치적 또는 예술적 동인이 있었는가를 알 수 없지만) 최승희의 첫 스승이었던 이시이 바쿠는 초기에 최승희에게 독일의 영향을 받은 모던 댄스 스타일(ausdruckstanz)을 버릴 것을 촉구했다. 그는 최승희를 교육시켜 스스로의 문화적 뿌리인 춤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한국에서 온 무용수와 작업하는 것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발언을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두 민족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것) (히라바야시 1977:189). 동시에 최승희는 신속하게 ‘신여성’의 일원이 되었다. 신여성이란 한국 여성 중 정식 교육을 받고,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서양식 옷을 입은 일련의 여성을 일컫는다.
 최승희는 독일의 영향을 받은 모던 댄스에서 자신의 뿌리로 회귀하는 동시에 신체를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모던 댄스의 사상(idea)을 유지했으며, 정형화된 궁정의 춤이나 일반 마을의 즉흥적인 춤보다도 더욱 급진적인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상(ideology)을 견지했다. 비록 정치적 동기는 없었을지라도 최승희가 과거를 창조적인 방식으로 활용한 것은 일부 학자들이 민족주의의 한 형태라고 해석하는 전통과 근대성(modernity)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일본 정책이 더욱 억압적으로 변하던 시기 동안 벌어진 세 가지 흥미로운 점을 지적했다. 첫째 1936년 최승희는 반도의 무희 (The Dancing Princess of the Peninsula)라는 영화에 출현했으며 이는 배우 겸 무용가로서 그녀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둘째, 같은 해 일본에서 최승희의 자서전이 출판되었다. 셋째, 최승희는 1937년 말 해외 공연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개별 해석은 최승희를 식민지적 관점에서만 이해했거나 또는 오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최승희를 한국 정신의 민족주의적인 발현으로 해석하거나 (식민지적 해석) 또는 한국의 젊은이가 신여성이 되는 모험 등으로 오역한 것이다. 최승희는 단순히 주체적 선택을 한 것인가? 스스로 선택을 내리고 자신과 자신의 미적 선호에 대해 주체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인가?
 해당 연구를 마무리 지으면서, 정책이 지속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있어 동인(motivation)을 결정하는 것이 어려움을 언급하며, 한국이 일본 점령을 받지 않았다면 최승희의 삶과 작품이 달랐을 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모든 일상이 정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이라는 일부 역사학자의 견해를 언급하기도 했다 (Wells:1999, Eckert:1999).
 또한 한성준 (1874-1941), 조택원 (1907-1976), 배구자 (1908-2003), 김천흥 (1909-2007), 한영숙 (1920-1989), 할라 배 함 (1922-1994), 김백봉 (1927-), 이매방 (1927-) 등 동시대를 살아간 한국 무용수들의 삶과 춤을 비교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들 무용수의 삶, 춤의 길, 이들의 선택은 최승희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최승희의 선택은 고유함과 모던함 간의 긴장의 발로라 생각한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최승희 관련 논문에서도 나는 고유함과 모던함을 동시에 추구하는 긴장에 대해 전개한 바 있으며, 고유한 한국적인 방식의 모던함을 통해 과거와 현재간의 표면적인 이분법을 조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고찰했다. 또한 ‘전통(tradition)’ 또는 ‘전통적인(traditional)’을 정의 및 재정의하는데 있어서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며, 최승희의 춤이 20세기 중반에 생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다수가 최승희의 춤을 “전통적”이라고 간주하는 점을 주목했다. “근대성 (modernity)이 무용의 전통을 정의하는데 어떻게 기여했는가 및 근대화된 전통이 어떻게 한국의 전통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는가에 대한 모순”을 지적했다. (Van Zile 2011:170)
 이 연구를 통해 또한 근대성(modernity)라는 개념을 좀 더 깊게 살펴보았다. 모던한 무언가를 창조하는데 있어 최승희는 명백히 우려를 표현한 바 있다. 최승희가 해외 공연을 떠나기 전까지 그에게 있어 ‘모던한 춤’의 구성 요소는 이시이 바쿠나 최승희가 본 일본 무용수 및 다수의 방문 무용수, 그리고 일본에서 공연한 무용단 등을 통해 걸러진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해외 공연을 떠난 후, 최승희는 다양한 국가의 여러 무용수들의 공연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최승희에 대한 나의 연구가 게재된 책의 목적에 맞도록 논문을 다듬는 과정에서, 문화의 소비라는 측면을 재조명했다. 최승희의 삶과 작품은 ‘그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문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주며 다양한 문화와 정부들이 최승희와 그의 춤을 여러 방식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Van Zile 2011:188). 이어서 그녀에게 영향을 준 식민주의, 민족주의 및 근대성이라는 세 가지 세력뿐 아니라, 최승희 자신이 한국인과 외국인 관객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개인의 미적 선호를 만족시키고자 했던 욕망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ibid).
 사람들은 최승희와 그의 춤을 다양한 방법으로 연관 지었다.
 일부 한국인은 일본에 의해 많은 것을 강탈당한 후 자아감을 유지하는데 도움을할 수 주는 아이콘이 필요했다. 일본인 일부는 일본이 한국인을 많은 측면에서 억압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한국인을 지원하고 있음을 보이기를 원했다. 일부 서구인들은 ‘신비한 동양’에 대한 예술적인 표현을 찾았다. 한국과 일본이 근대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식민시대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보다는 좀 더 부담 없이 수용될 수 있는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를 추구하는 편이 더 쉬웠다..” (ibid)
 해당 연구의 결론을 통해 나는 춤의 용어 및 분류법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전통적’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한국의(Korean)’는 무엇인가? 이렇게 분류되는 부분을 누가 정의하고 사용하는가? 전통은 종종 낡은 것 또는 토착적인 것과 연결되지만, 어느 정도 낡아야만 ‘낡은’ 것이며, ‘토착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제기했다. (ibid:189)
 최승희에 대해 발표했던 회의 논문 가운데 출판되지 않은 일부 논문은 아직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부터 이러한 원고로부터 주요한 두 가지 측면을 설명하고자 한다.
 앞서 연구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바와 같이, 먼저 초기 독일 스타일 모던 댄스는 최승희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2009년에 독일에서 개최된 European Association of Dance Historians 회의는 독일이 기타 지역의 춤에 미친 영향력을 조명했다. 이 회의에서 나는 이시이 바쿠의 ausdruckstanz 스타일 모던 댄스가 최승희에게 미친 영향과 그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그 영향이 간과되는 이유는 최승희가 비교적 신속하게 ausdruckstanz 스타일을 과도하게 닮은 안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또한 ausdruckstanz에 있어 창의성의 중요성과 최승희의 예술적인 성장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신체를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함을 언급했다. 즉 최승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것은 이러한 스타일의 전형적인 안무적 표현이 아니라 ausdruckstanz의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이었다.
 두 번째 요점은 최승희의 작품을 그가 춤을 추었던 시대의 사회문화적,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2010년 Corporeal Nationalisms, 캘리포니아 주립대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의 ‘동아시아의 춤과 국가’에서 발표되었으며, 2011년 하와이에서 아시아학회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와 아시아학 세계총회 (International Convention of Asia Scholars)가 공동 주최한 회의에서 토론자로 참여해 이러한 견해를 확대했다. 앞서 신기욱과 로빈슨의 삼각 모델을 통해 식민주의, 민족주의, 근대성을 최승희의 초창기에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핵심 요소로 정의했으며 여기에 ‘정체성’을 추가함으로써 이들 요소가 최승희 개인과 그의 춤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언급했다. 2010년, 2011년 회의에서 최승희와 그의 춤에 관련된 이해 당사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심미적, 개인적 및 국가 정체성을 분리했으며, 최승희와 그의 춤이 식민시대와 오늘날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를 언급했다.

 다음으로 지금까지 진행했던 최승희 연구의 핵심 요점을 서술하고자 한다. 특히 관심을두고 있는 질문은 사람들이 어떻게 (how) 춤을 추는가와 왜 그러한 방식으로 춤을 추는가에 대해 아래 다섯 항목을 강조한다.
 최승희가 과거(heritage)의 춤으로 회귀함으로써 그가 받은 서구 스타일 모던 댄스 교육은 가려졌지만, 이러한 교육이 미친 사상적인 영향을 고려해 볼 때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일본의 한국 점령, 수시로 변하는 일본의 대한정책, 해외 순회공연을 통해 최승희에게 주어진 기회 등을 그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며 그가 지닌 주체성 (personal agency)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은 그가 대면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받으며 지속적으로 진화한다. 최승희는 대단히 복잡한 시대를 살았으며 많은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결단을 내렸던 그 자신의 역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식민지화, 최승희가 해외 공연 시 일본식 발음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미국에서 최승희는 한국인 무용수로써, 그의 춤은 한국 춤으로 알려졌다.
 최승희는 다양한 지역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 무용을 소개했으나, 이러한 과정에서 최승희 자신이 정의한 바에 따른 한국 춤을 소개한 것이다.
 최승희는 오늘날 ‘한국 춤 (Korean dance)’으로 정의되는 부분과 한국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부분을 구성하는데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다음 연구 단계는 무엇인가? 현재 천착하고 있는 질문은 무엇인가? 내년 2월 하와이대의 한국학 센터 (Center for Korean Studies)는 “Tapestry of Korean Modernity: Urban Cultural Landscapes of Colonial Korea, 1920s-1930s.”를 개최하며, 이 자리에 초청 연자로써 최승희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회의 제안서에 따르면 근대성이라는 문제는 동아시아 국가의 아카데믹한 담론에서 가장 빈번히 토론된 주제였다. ‘근대성에 대한 면밀한 고찰’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Kim 2011:11)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나는 근대성(modernity)를 다뤘으며, 근대성에 대한 최승희 자신의 우려를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영향을 받은 ausdruckstanz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넘어 ‘춤의 근대성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다뤄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현재 진행하는 연구의 시야를 확대해 다양한 지역을 춤을 살펴보고 있다.
 최승희의 작품과 성장은 동시대를 살던 외국인 무용수들의 활동과 어떠한 관계가 있으며 관계가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있다. 이는 현재 특정한 형태의 무용이나 장르를 넘어서, 현재 ‘모던 댄스’로 지칭되는 것에 대해 20세기 중반 동안 ‘근대성’은 어떠한 의미를 지녔으며, 이러한 정의가 생겨난 이유 등을 한층 가깝게 이해하고자 한다.
 이어서 설명할 부분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연구이며 정형화되지 않은 아이디어이지만, 향후 최승희와 한국 춤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있어 유용할 것으로 사료된다.
 나는 최근에 20세기 초반의 글로벌한 사건과 이 시기 동안 여러 나라에 존재한 춤에 대해 책을 읽고 있다. 이를 통해 이들 간의 동향 (트랜드)로 볼 수 있는 프레임워크를 구성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궁극적으로 다양한 장소로부터 사례를 발굴해 논의하고자 하는데, 본 발표에서는 이 시대의 3대 주요 동향을 보여주는 무용단에 대해 일부 설명하고자 한다. 향후 이들 동향은 나의 연구에 있어 분석적인 틀이 될 것이며, (1) 이국적인 타아(exotic other)에 대한 강한 호기심 (2) 이국적인 타아에 대한 춤을 안무하는 과정에서 교육과 상상력 (3) 발레에 대한 반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 동향이 이 시대의 춤에 있어 ‘모던’이라는 개념을 구성한다고 보며, 최승희가 자신의 춤의 미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미국출신 무용수인 Ted Shawn과 Ruth St. Denis는 1915년 Denishwan company를 결성했다. 1925년부터 1926년까지 이들은 아시아 전역에서 다양한 공연을 펼쳤다. 일본 순회공연을 시작으로 인도, 버마,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 등을 거쳐 다시 일본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2년에 걸친 이들의 공연 레파토리는 앞서 언급한 이들 3대 동향을 반영하고 있다.

 첫 번째 예는 이국적인 타아(exotic other)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대표하는 St. Denis의 동인도 스타일의 나우치 (nautch) 춤이다. 또 다른 예는 앞서 언급한 관음 (Kuan Yin)으로 이 작품의 의상, 안무, 제목 등은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인도와 중국에서 각각 영감을 얻은 이들 춤은 St. Denis가 해당 지역에 매료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비록 이들 지역이 St. Denis와 지리적, 경험적으로 먼 곳이었지만 그가 큰 관심을 두고 있는 문화권이었다.

 최승희의 인도의 연가 (Indian Lament), 보살춤, 집시 (Group of Gypsies), 달밤에 이집트 풍경 (Egyptian Landscape) 등은 이국적인 타아에 대해 최승희가 유사하게 매료되었음을 보여준다.
 Denishawn의 또 다른 춤은 조금 다른 이국적인 타아를 보여준다. Ted Shawn은 1924년Boston Fancy 1854를 안무했다. 이를 통해 그는 1854년 자신의 할머니가 결혼하던 당시 미국 북동부지역 (뉴잉글랜드)에서 열린 파티를 재연하고자 했다. (Sherman 2005:116). 그러나 Shawn은 미국의 중서부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할머니의 결혼식은 그가 태어나기 30년 전에 거행되었기 때문에, Shawn은 결혼식에서 선보인 춤을 파악하기 위해 상당한 조사를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안무를 구성했다. 당시의 춤과 장소는 Shawn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춤 역시 이국적인 타아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전통 춤에 근간을 두고 있는 최승희의 안무는 그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에 기초하고 잇는 것은 아니다. 최승희는 이를 배우기 위해 의식적으로 과거로 회귀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 춤 역시 최승희의 이국적인 타아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국적인 타아에 대한 Denishawn 춤의 상당부분은 교육과 안무적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졌다. St.Denis는 중국이나 인도의 춤에 대해 전혀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관음(Kuan Yin)이나 나우치(nautch)를 창조할 때 책과 사진 이미지를 참조했으며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했다. 그가 이 시대의 춤을 재창조하는 것에 대해 큰 걱정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상당한 영감을 얻었다.
 Denishawn의 Cuadro Flamenco, Burmese Yein Pwe는 다시 한번 이국적인 타아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반영하는 춤이지만, 무용단에 있던 개인들로부터 실제로 배운 것을 반영하기도 했다. 1923년, Ted Shawn은 바르셀로나와 세빌리아에서 두 달간 공부를 한 후, 자신이 만들 작품을 위한 의상을 구입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발레의 전막공연으로 묘사되는 Cuadro Flamenco의 안무를 완성했으며 이를 통해 플라멩고 무용수들이 공연하는 스페인의 나이트클럽 장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ibid:87-101).
 Burmese Yein Pwe는 Ruth St. Denis와 Doris Humphrey가 1926년에 안무한 작품으로 Denishawn의 아시아 공연 후반부에 무대에 올려졌으며, 이 시기는 Denishawn이 버마에서 공연을 한 이후였다. 버마에 체류하는 동안 St.Denis와 Shawn은 다수의 yein pwe (무용극의 일종으로 음악, 대화, 노래, 무용이 어우러지는 형식) 공연을 보았으며, 버마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무용수 U Po Sein의 집을 방문해 리허설을 관람하거나 수업을 들었다. Denishawn의 무용수인 Jane Sherman에 따르면 U Po Sin은 무용수들의 역량에 큰 감동을 받아서 자신의 의상제작사들에게 무용단원을 위해 의상을 제작하도록 했다. 버마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Denishawn은 1926년 7월 싱가포르 공연에서 이 작품을 처음 무대에 올렸다 (ibid:142-145).
 앞서 최승희 춤의 상당 부분이 그가 지닌 이국적인 타아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최승희 자신의 전통(heritage)에 대비되는 이국적 타아라 할 수 있으며, 교육과 상상력을 동원해 이를 안무에 반영한 결과라 생각한다.
 Denishawn의 아시아 공연은 ‘이국적인’에 대한 해석일 뿐 아니라 소위 말하는 ‘인종성(ethnicity)’ 또는 ‘인종적 측면에서 영감을 얻은(ethnically-inspired)’춤이라고 일컫는 이도 있다. . Ruth St. Denis와 Doris Humphrey가 1920년 안무한 Soaring은 주제, 아이디어, 움직임 등의 측면에서 발레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는 춤 가운데 하나이다. 1924년 Doris Humphrey의 Hoop Dance, Ruth St. Denis의 Brahms Waltz, Liebestraum 등도 비슷한 예로써 이들은 미국에서 당시 싹트고 있던 모던 댄스를 대표한다. 독일의 ausdruckstanz와 일부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으며 발레에 대한 거부에 기반을 두고 있다.
 Denishawn과 마찬가지로 최승희도 그의 첫 스승인 이시이 바쿠가 안무한 작품들을 공연했으며, 발레와 결별한 자신만의 춤인 With No Path to Follow와 Etude 등을 안무했다.

 전 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상기 언급한 이국적인 타아에 대한 매료를 보여주는 춤, 상상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안무, 간략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안무, 발레의 전형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이탈하고자 하는 춤 등이 만들어지고 무대에 올려졌으며, 최승희의 안무는 명백히 이러한 동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안무가 20세기 전반부에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고자 하며, 자세한 부분은 토론을 통해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시기에는 많은 지역에서 식민지화 및 타 문화권의 정부로부터 개입을 겪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자신의 문화나 타 문화와 근접하거나 이탈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둘째, 이 시기에는 다양한 여행 수단이 확대되면서 타 문화와 접촉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시장이 형성되었다.
 셋째, 다양한 세계 축제와 전시회가 개최됨으로써 타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사람들은 자국 이외의 외부 세계에 대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독서를 통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자신의 문화가 고유하며 모던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에 기여했다.

 발표의 모두로 다시 돌아가,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은 일종의 이국적인 타아에 대한 나의 강한 호기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호기심은 점점 깊어졌으며, ‘최승희는 어떻게(how) 춤을 추었으며, 왜 그러한 방식으로 춤을 추었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이 맴돌았다. 이에 대해 답을 찾는 과정에서 역사적 연대기부터 시작해 다분히 감정적인 작품 평론, 최승희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도, 페미니즘, 민족주의, 식민주의, 포스트 식민주의 등 서구의 영향을 받은 포스트 모던 이론 모델을 통해 그의 춤을 분석하려는 시도 (상기 언급한 참고 자료 외에도 Kim Young hoon, Park Sang Mi, Yu Mi hee 등 참조) 등 다양한 연구를 참조했으며, 이 외에도 최승희 연구 방법은 무수히 다양할 것이다.
 최승희에 대한 나의 연구가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하기를 바라며 나아가 영어권 독자들이 최승희와 한국 춤에 대해 인식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최승희 춤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여러 연구와 정보들을 취합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최승희와 한국의 춤 발달에 대한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토론문 1>



닥터 주디 반 자일의 “최승희 연구에 대한 고찰”에 대한 질의문



김채원_한양대 강사



 최승희 무용을 10여 년간 연구해 온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비평가협회 주최로 국제포럼이 개최될 수 있어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최승희는 한국의 무용사에 있어 창작춤 계보를 개척한 선두주자로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무용가이며, 한국을 세계에 알린 선구적인 한류스타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친일인사’라는 명목으로 그녀의 업적마저 논의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현 한국의 실태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늘의 이 귀한 시간에 발언의 기회를 주신 주최 측에 감사를 전한다.
 주디 반 자일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본인이 연구해 왔던 부분을 재검토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의 문화지킴이들이 고통과 좌절의 쓴 맛을 보고 있을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용가로 설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최승희가 너무나 신격화되어 있었다는 것, 본인은 이러한 점에 의문을 갖고 최승희 연구를 시작했다. 석사논문(1996)에서는 일제시기의 최승희 춤사상, 한국춤사에 남긴 근대성, 한국춤사에서의 자리매김, 최승희 자신의 인스피레이션에 의한 창작 등에 대한 고찰을 시도했으며, 박사논문(2003)과 그 외의 연구물에서는 월북이후에 초점을 맞춰 그녀의 활동, 춤양식, 북한춤에의 영향, 기법분석, 이데올로기와 춤의 관계 등을 발표해 왔다. 그런 과정을 통해 최승희의 춤에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국제주의, 모더니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 테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그녀의 춤메소드는 195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확립되었음을 고찰하였다. 즉, 그녀는 사회, 정치, 문화,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그녀만의 독자적인 해석으로 조선춤, 동양춤, 북한춤을 창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녀의 춤에 대한 논의는 그녀가 춤활동을 펼친 전생애를 관찰하면서 진행되어져야 하지만 지금의 한국이나 타 국가에서의 그녀에 대한 연구는 주로 동양춤을 표방했던 시기에 집중되어 있어 학문적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주디 반 자일 선생의 글 역시 바로 그 시기, 즉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펼친 시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그녀의 동양주의적 작품과 한국적 작품에 대한 언급은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녀가 지녔던 주체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언급은 전적으로 동감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을 갖게 한 부분이 있어 질문을 드리는 바 이다.
 우선, 최승희 춤을 한국의 ‘전통춤’으로 간주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는데, 엄연히 최승희의 춤은 한국의 전통춤이 아니다. 그녀로부터 시작된 신무용이란 개념 역시 60, 70년대를 거치면서 언급된 것이며, 신무용이란 용어는 시대 흐름 속에서 개념이 변했고, 현재는 한국 춤 중에서 차별적인 스타일을 지칭하는 춤이다. 때문에 신무용이 한국의 무용사에서 ‘전통’의 하나로 취급되어져야 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최승희의 춤을 한국의 전통춤이라고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렇게 기술하고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두 번째는, 최승희의 동양적 춤이 사실은 미국인이 창조한 “동양”춤에 기원을 두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최승희가 동양주의를 내세운 것은 분명 세계순회공연 이후이며, 당시 일본에서 많은 무용가들이 그러한 춤을 추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매란방의 일본공연도 있었고, 예술인들은 일본의 ‘대동아공연제국건설’이 강제되던 상황에서 동양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소재를 모색할 수 밖에 없었다. 최승희는 1935년 일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시작으로 중국의 역사서, 벽화, 사찰, 불교관련 서적 등을 관람하고 탐구하면서 많은 동양적 작품들을 창작했다. 이러한 기록과 사실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 언급을 하자면, 최승희 춤이 전통춤으로 자리매김 되어있는 것은 오히려 북한에서이다. 북한에서는 전통이라는 용어구분이 없으나 최승희춤은 현재 혁명적 명무용과 함께 민속계열의 전통춤으로 계승되고 있다.


 

 


 

 

<토론문 2>



최승희 연구에 대한 고찰 토론문



유미희_경인교육대학교 교수



 쥬디 반자일 교수의 발제는 외부 관찰자적인 시각에서 한국의 무용가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과 평가를 제공함으로써 자칫 내부자적인 시각에서 일기 쉬운 한계를 벗어나게 한다는데 상당히 의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승희의 보살춤(Bodhisattiva dance)과 루스 세인트 데니스 안무간의 유사성은 타문화와의 접촉이 활발히 일기 시작한 시대적 정황과 세계무용의 역사적 흐름을 감안해 본다면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974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쥬디 반자일 교수의 연구성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서구 스타일의 모던댄스, 즉 표현무용이 지향하고 있는 새로운 예술에 대한 모토가 최승희 무용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2. 격동의 시대에 최승희는 다양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여러 가지 색깔을 띠면서 주체적으로 살아 왔다.
 3. 중국, 일본, 구라파 등 다양한 활동무대와 이력으로 한국의 무용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했다.
 4. 오늘날 '한국춤( korean dance)'의 일정부분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의 일련의 연구결과는 그간에 진행된 국내 학자들의 연구동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외부자적인 시각에서 특징적인 것은 일본의 정책이 대부분의 한국문화를 말살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한국문화를 양성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최승희에게 영향을 준 독일 모던댄스의 급진적인 창의성은 스승인 이시이 바꾸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는 최승희로 하여금 판박이 같은 전통무용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춤을 창조하는 통로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최승희의 춤에는 동시대의 무용가가 추구했던 방식과는 다른 고유함과 모던함 사이에 일고 있는 긴장을 엿볼 수 있으며 ‘한국 춤(korean dance)', '한국의 상징(symbol of korea)'으로서의 최승희의 역할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1. 최승희의 춤에서 ‘한국의 상징’ 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어떤 것이며 과연 ‘한국 춤’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외부 관찰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최승희춤, 한국춤에 대한 발제자의 견해는 20세기 초 한국의 춤을 다각도로 규명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 최근 진행되는 연구분석의 틀이 20세기 초반기의 시대적 동향, 즉 이국적인 ‘타자’에 대한 호기심이라 했으며 발제자의 최승희 연구의 발단 역시 여기서 출발했다고 했다. 최승희의 춤 작업에서 이런 흔적은 몇 년 전 발표된 필자의 연구(2004)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데 이는 전형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컨셉이 필요했던 문화적 환경에 연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고민을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장르적 의미에서의 한국 무용을 볼 때 발제자는 최승희 춤에서 보여지는 창작과 현재 한국무용에서 행해지는 창작에 어떤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유사성이나 차이점을 찾아 볼 수 있는가?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위 논문은 한국춤비평가협회와 한국춤정책연구소가 공동 주관하는 2011년 심포지엄의 발표문이며 발표문의 원저자는 주디 반 자일임. 저자의 승인 없이 인용 및 복제할 수 없음.

2011. 1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