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함부르크 현지취재_ 세바스티앙 마티아스의 〈조작/그루브 스페이스〉
관객을 조작하는 안무
정다슬_<객석> 유럽 통신원

 그간 공연 리뷰 등 몇 차례 <춤웹진>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 독일 함부르크의 캄프나겔 공연장은 유럽의 내로라하는 무용단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유럽 현대무용의 메카이다.
 영국의 아크람 칸, 호페쉬 섹터, 벨기에의 로사스무용단, 알랑 플라텔 등이 찾는 공연장으로, 아마 한국으로 치자면 LG아트센터나 예술의전당 정도의 공연장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큰 공연장에서 아직 채 마치지 않은 실험 단계의 작품을 만난다면 어떨까?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대한민국에서라면 가능할까?
 캄프나겔은 유럽 현대무용의 선두주자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공연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역 사회 무용가들을 길러내며 꾸준히 현대무용의 실험실이자 공작소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3월 12일 캄프나겔에서 공연된 세바스티앙 마티아스의 <조작/그루브 스페이스(Maneuvers/Groove Space)>가 그 단적인 예이다. 독일 함부르크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세바스티앙 마티아스는 뉴욕의 줄리어드 대학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수학 후 함부르크의 캄프나겔, 뒤셀도르프 탄츠하우스, 스웨덴의 쿨베르크 발레단에서 레지던스 안무가로 활약하였다. 그는 2012년부터 지금까지 함부르크의 하펜시티 대학에서 ‘안무의 모듈 시스템’이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가 진행하는 연구는 독특하게 무용단이 아닌 콜렉티브 그룹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정해진 일원이 아닌 끊임없는 예술가의 교체를 통해 다양한 자극을 받기 위한 그의 전략 중 하나이다. 세바스티앙 마티아스는 계속 변화되는 그룹과 함께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그루브 스페이스 시리즈>를 주제로 스위스 취리히, 독일의 베를린과 함부르크 등 여러 도시에서 연구 및 공연을 진행할 예정이며, 이번 캄프나켈에서 공연된 <조작/그루브 스페이스> 역시 그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필자가 관람을 위해 넓은 공연장으로 들어섰을 때 낯설게도 관객을 맞이하는 객석은 온데간데없었다. 의자는커녕 방석 하나 보이질 않았다. 관객들은 낯선 공연장의 모습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서성이거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대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객석은 어디인지, 공연자가 누구인지,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 후 공연장의 문이 닫히자 어디선가 움직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관객들 사이사이에서 일상복을 입고 신발을 착용하고 서있던 공연자들은 천천히 경계가 없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저 옆에 서있는 다른 관객인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하자 관객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비켜주거나 혹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서있었고 때로는 움츠러들기도 했다. 무용수들은 비집고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을 파고들며 움직였다. 마치 관객을 건물의 일부이자 무대 위의 오브제로 사용하기라도 하듯 공연자들은 관객들이 의도치 않게 만들어 낸 새로운 공간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또 그것을 적극 활용하였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무대를(혹은 관객석을) 유영하는 무용수들이 6명이라는 것을 파악한 것은 공연의 러닝타임이 꽤 흐른 후였다. 공연자들은 춤을 추다가 잠시 멈추어 관객이 되기도 하였고, 숨을 죽인 관객이다가도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용수가 되었다. 관객 중 한 명이 무용수인척 춤을 춘다하여도 눈치를 채기 힘든 상황이 연출되었다.
 특히 춤을 추는 동안 무용수들은 관객들과 자주 눈을 마주치며 지그시 바라보거나 미소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런 구성들은 공연자들이 관객과의 친밀감은 물론 개인적인 만남을 갖는 것처럼 느껴지게 할 정도로 가까웠고 이내 공연자와 관객과의 간격을 제로(0)로 만들어버렸다.
 어느새 모든 무용수들이 관객들 사이로 숨어 버리고 무대가 깜깜해지자 한 점의 밝은 빛을 손에 든 남성 무용수가 무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천천히 기어오기 시작하였다. 무대 끝에 도착한 그가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리고 보니 손전등이 아니라 핸드폰의 플래쉬였다. 그리고 핸드폰에는 그가 바닥을 기어오는 동안 촬영한 관객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핸드폰은 관객들이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언제든 영상을 볼 수 있도록 한쪽 벽에 설치되었고, 관객들은 촬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기도 하였다. 단순히 핸드폰에 찍힌 영상만으로 마치 관객이 작품의 일부가 된 듯한 인상을 남기게 해주는 장치였다.

 

 



 <조작/그루브 스페이스>에서 관객은 여전히 기존의 수동적인 위치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무대 위에 설치된 오브제 혹은 공연자에게 움직임의 모티브를 제시하는 공간 구성 요소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관객이 자리를 옮김과 동시에 발생되는 즉흥적인 상황과 요소들이 다양한 형태로 작품의 구조를 드러내고 있었고, 안무가 세바스티앙은 관객에게는 당혹스럽고도 익숙하지 않은 여러 상황들을 통해 관객들이 공연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안무’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있었다.
 <조작/그루브 스페이스>에서 다른 주목할 만 한 점은 스위스의 공연 예술가 니노 바움가트너의 공간 연출이었다. 무대 미술과 현대 미술을 접목시키는 작업들을 선보이는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공연 내내 다양한 구조물을 통해 독특한 장면들을 연출해 내었다.
 화분에 꽂혀있는 듯한 얇고 긴 쇠막대를 움직여 마치 쇠로 만든 것 같은 흔들리는 갈대의 숲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건물을 지지하는 철봉을 타고 천정부터 바닥까지 갑작스레 내려오거나 반대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굽혀지지 않을 듯한 두꺼운 막대를 휘어 공연장 한 쪽 벽에 공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구조물들을 급조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가 즉석에서 만들어 낸 다양한 설치물들(혹은 무대미술)은 장소와 공간을 특화시킨 조형 예술로서 눈길을 끌며 흥미로운 장면들을 연출해냈지만, 아쉽게도 소재나 형태 자체로서는 주목할 만한 특이점이 눈에 띄지 않았고 춤과 직접적인 연결고리 또한 뚜렷하게 나타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무대 위에 만들어졌다 이내 사라지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구조물들을 통하여 안무가가 작품 주제로서 언급하고자 한 요점들은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도시의 거주자로서 일상생활에서 반복적이고 일정한 안무를 춤추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무의식중에 따라가게 되는 길들이거나 혹은 우리가 거쳐 가도록 계획·설계된 길들이라고 언급하며 일상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일련의 움직임들 역시 안무가 아닐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지금까지 관객의 참여를 요구하는 많은 작품들이 있어 왔지만 <조작/그루브 스페이스>는 관객과 공연자가 만들어내는 관계와 교차점들, 그리고 관객의 참여에 대하여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바라보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안무가는 공연의 형태가 어떤 종류의 만남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전통적인 수동적 관객과 능동적 공연자로서의 만남이 아닌) 그리고 관객이 적극적인 공연자가 되지 않는 위치를 유지하면서도 안무와 작품에 어떻게 개입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영민한 연출로 제시해냈다. 또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공간들은 우리가 그 곳에 자리하고 있을 때야 비로소 완성되고 새롭게 탄생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창의적인 구성들을 통하여 존재성과 비존재성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세바스티앙 마티아스의 <그루브 스페이스 시리즈>는 향후 3년간의 연구 프로젝트로 이제 막 그 두 번째 챕터를 마쳤다. 아직 갈 길이 일 년 반이나 남은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안무가는 유럽 전역의 다양한 기관들의 협력과 지원을 통해 새로운 시도들을 안정적으로 해나가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그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통해서 신생 안무가들이 만든 작품들이 그저 몇 번의 공연 이후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경제적 요소에 방해 받지 않으면서 깊이 있는 작품과 안무에 접근 할 수 있도록 예술가들을 장기적으로 믿고 지원하는 제도들이 우리나라에서도 활성화되기를 기대해보게 하는 공연이었다. 

2016.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