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표지인물 인터뷰_ 안무가 김효진
가상과 현실, 한국춤이 미디어 융합을 가능하게 했다

 



 김효진과 YMAP(Your Media Arts project)은 지난 달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프로젝트로 〈Madame Freedom〉(3월 24-2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분관 멀티프로젝트홀)을, 극장 용 개관 10주년 공연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4월 1-5일. 극장 용)를 초청받아 공연하였다.
 알려져 있듯이 <마담 프리덤>은 2013년 영국 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 14년 미국 REDCAT International Artist Presentation 공식초청작으로 선정되면서 국내에 멀티미디어 춤공연이 드문 현실 속에서 국제무대에서 먼저 예술적 입지를 확인받았으며, 공연 후에는 The Times, The herald, Guardian 등 영국 굴지의 언론에서 별 4개의 리뷰를 받는 등 그 성과 역시 예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창무회 시절 솔로와 그 후 2005년의 <춤을 추며 산을 오르다>를 추는 김효진을 지켜보았고, 2007년 동명의 미디어 퍼포먼스로 확장되어 70여분 공연 되었을 때, ‘춤공연의 지평이 확산되는’ 경험은 가히 비평의 관점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근대 이후 춤예술은 무대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의 몸 움직임의 조합이라는 재료의 범주가 깨진 적이 없는 상황에서, 숱하게 많은 공연을 보게 되는 비평가의 입장에서 과거까지 형식 재료들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어 전혀 다른 감각을 통해 춤이 input되는 경험은 뚜렷하게 춤예술이 변하고 있다는 설렘을 주었다. 게다가 그것 은 가상(virtual)과 현실(reality)의 문제를 가상을 극대화시키는 담대함으로 현실을 뒤덮어 버리면서도 가냘프게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춤이 오롯이 솟아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것이었다.
 많은 작품이 영상기술과 춤공연을 융합시키면서 대부분은 무대의 앞과 뒷막, 혹은 무용수의 몸에 영상을 투사하는 정도에서 사용수위가 정착된 상황에서, 김효진과 YMAP의 작업은 무대 공간을 바닥, 벽면, 천정까지 동적 이미지로 채워 새로운 공간을 입체적으로 창출하고 춤의 중요한 재료인 움직임 요소를 인체에 의해서 뿐 아니라 공간전체를 통해 구현하는 기술로 춤예술의 ‘형식’과 그것이 구현하는 ‘미적 차원’을 확장시키는 성과를 이루었다.
 솔로 댄서이자 안무가 그리고 현재 미디어 연출가로 활동의 폭을 넒히고 있는 김효진씨와 함께 그간의 과정, 기술적 내용과 발전 그리고 춤에 대한 새로운 생각은 무엇인지 들어본다.

 



이지현
2013 에딘버러 초청작 〈Madame Freedom〉을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김효진 이 작품의 출발은 2005년도에 <춤을 추며 산을 오르다>라는 솔로 작품을 시작하면서 입니다. 20대에는 정말 열심히 했었는데 30대에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하면서 공백기가 생겼고, 다시 춤을 추려고 했을 때 ‘왜 안춰도 되는 춤인데 계속 추려고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춤을 추며 산을 오르다>라는 작품을 하였습니다. 이 작품이 운이 좋았던 것이 초연 후 인천무용단에서 초청 공연을 하게 됐고, SPAF에도 초청 받아서 공연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작에서 좀 더 밀도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도에 남편(김형수 교수)이 미디어를 이용한 기술 테스트를 해야 했고, 그 때 <춤을 추며 산을 오르다>를 미디어 버전으로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체계적인 계획하게 했던 것은 아니고 상황이 그렇게 흘렀습니다. 미디어 버전으로 만들면서 무대 사면을 영상공간으로 만들고 그 안에 영상들을 멀티채널운영이라는 개념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그 뒤에도 여러 가지 기술들로 실험을 했었습니다. 그때는 작품이라는 개념보다는 다른 장르를 넣었다 뺐다 하는 실험에 초점이 있었죠.
그러다 2009년도에 더 업그레이드 된 버전으로 테스트를 하면서 스토리텔링을 넣었고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장기공연 하고자 9회 공연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2년 정도 실험을 해오면서 깨달았던 것은 어떤 기술을 썼다는 것보다 ‘어떤 효과를 만들어냈는지’가 중요하고 공연 중심으로 좀 더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술적 실험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춤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위해 스토리가 필요했고, 그래서 영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에딘버러 예술감독과 미팅을 했을 때 여러 가지 버전을 보여줬었는데 2009년도 <자유부인> 영화가 들어간 버전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 한 번 더 정리를 해서 기존에는 80분 정도 되던 작품을 60분으로 정리를 했죠.

6년간의 실험을 거쳐서 <춤을 추며 산을 오르다>가 <자유뷰인> 이라는 영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Madame Freedom〉으로 탄생된 거군요.
네. 에딘버러 가기 위해 처음에는 〈Dancing up the Mountain〉으로 번역을 했는데 ‘산’이 들어가면 산이 있는 곳과 없는 곳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른 문제가 있었고, 영화 <자유부인>이라는 텍스트를 가져다 썼기 때문에 〈Madame Freedom〉으로 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영화를 그대로 옮긴 것도 아니라서 영화 제목 그대로 붙이는 것에 대해 조금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영화덕분에 제가 전달하려던 주제를 일반 관객분들이 쉽게 받아들이는데 긍정적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타장르에 대한 이해와 공부가 장르 융합을 가능하게 하다

 

〈Madame Freedom〉이 에딘버러와 레트캣에서 연이어서 공식 초청되는 좋은 선례가 되었습니다. 제가 2009년도에 <춤을 추며 산을 오르다>를 봤을 때 형식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춤공연의 차원이 많이 바뀌겠구나라고 생각했었고요. 지금 들으니 그때가 이런저런 실험을 많이 할 때였군요.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초청받았을 때 보니까 그간의 실험이 정돈되고 완성도가 높아진 것이 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김형수 교수와 부부관계라는 것도 알고 예술적 협업 관계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미디어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였나요?
저는 창무회에 있을 때 오히려 춤에 더욱 집중하고 춤이 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 운이 그쪽으로 열려있었는지 제가 김매자 선생님의 춤본 재해석 작업을 했을 때 제 작품을 보고 미술 하는 사람들이 같이 작업을 하자고 연락이 많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20대 중 후반에 이윰씨하고 작업을 많이 했었는데 미술, 영상, 조각 등이 융합된 작업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98년 이미지 씨어터라고 이름 붙여서 저랑 이윰씨랑 음악하시는 김동섭씨하고 셋이서 퍼포먼스를 했었는데 후쿠오카 아트 트레날레에서 그 퍼포먼스를 샀습니다. 그래서 당시 지원 받으면서 기간 내내 체류하고 퍼포먼스를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회의를 느꼈던게 모든 작업은 이윰씨 작업으로 남고 저는 그저 한 번의 퍼포먼스로 끝나더라고요. 처음에는 새로운 작업을 하는 게 재미있었는데 계속 작업을 할수록 제가 마치 소품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후쿠오카 작업을 끝으로 이윰씨하고 결별을 했죠. 그 전에도 황신혜 밴드와 작업을 했었는데 공연이 끝나고 나니까 저는 그저 백댄서가 되어있더라고요. 왜 그런가를 고민해 보니, 파트너와 타장르에 대한 이해 부족, 그것을 핸들링 할 수 있는 역량 부족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춤에 더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협업을 위해서는 타 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영상을 하던 사람이었던 거죠. 결혼을 할 때에는 둘이서 이렇게 작업을 하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공연이나 이런 것들을 보고 오면 작품에 대한 얘기를 굉장히 많이 했었습니다. 당시 DV8영상을 보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고요. 사실 처음엔 남편이 제 작업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남편작업에 제가 들어가게 된 것이죠. 당시 아트&테크놀로지라는게 막 화두가 될 때였어요. 여러 공대 교수님들이 영상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프로젝트가 많았고, 그것을 프리젠테이션 하는 방법으로 공연을 선택하게 된 것이고 기술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면 반응이 별로 없었을 땐데 작품 위에 기술을 얹어서 하다 보니 그 뒤에 계속 프로젝트가 생기게 되어 둘 다 시너지를 많이 봤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네요.
저는 결혼하기 전에 이미 이러한 작업을 했기 때문에 사실 안하려고 했었죠. 여러 가지 요소를 넣어서 하는 것이 춤을 방해하고 셋팅에 어려움이 있고 영상을 컨트롤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안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남편 프로젝트에 들어가게 됐고, 그 프로젝트는 내 작품을 잘 만드는 것이 아닌 기술이 잘 들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라서 그 작업에 더 노력을 했었죠. 그러다가 이 작업에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춤을 중심으로 세우고 다른 미디어와 협력작업을 하면서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가 않은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결이 됐네요. 부부여서인지 갈등보다는 조화에 많은 초점이 있었고 춤 부분에 있어서는 김효진씨가 자발적으로 끊임없이 채워갔고요. 그렇다면 춤과 미디어가 어떻게 잘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한 접점은 어디서 찾았나요?
제가 생각했을 때 처음부터 다 알아서 했던 건 아닌 것 같고 경험이 쌓이면서 이루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남편이 저에게 미디어를 알려준 선생님인 셈이죠. 남편에게 저는 공연, 무대가 무엇인지 알려준 셈이고요. 만약 저희가 부부가 아니었다면 한 두 번 작업하고 끝났을 거에요. 장르 충돌이 크고, 크레딧에 예민한 부분도 있어서예요. 제가 처음 작업을 할 때는 남편 프로젝트에 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 작업이라고 생각을 안했습니다. 또 남편은 제 앞으로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저를 존중해주고 제 의견을 따라줬습니다. 서로를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죠. 제가 이윰씨하고 작업을 그만하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크레딧의 문제였거든요. 사실 콜라보레이션이라는 것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내가 한 거, 저 부분은 내가 한 거라고 나눌 수 없는 것인데 나눠야 할 상황이 오기도 하니까요.

김효진씨가 잘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미디어에 대한 지속적인 공부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리한 요구나 자기중심적인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해 계속 배워나가면서 본인의 요구가 가능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고 모르는 부분에 있어서는 도움을 요청해가는 방식이요.
〈Madame Freedom〉이 그래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제가 중심을 갖고 모든 것의 디렉션을 제가 주고, 디렉션을 주는데 있어서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중간에서 소통과 변환, 섭외를 해주는 코디네이터를 썼고요. 코디네이터의 존재가 많은 도움이 되었죠. 제가 직접 나서면 소통에 더 많은 어려움이 있고 피곤해지고 지치게 되는데 그 중간 역할을 해주는 코디네이터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전체를 핸들링 하기가 쉽더라고요. 공부도 많이 됐고요.

 




하나의 영상채널은 한명의 무용수

 

작년에 처용을 텍스트로 한 작품인 〈Dancing love〉를 미국 CalArts(The Sharon Disney Lund Dance Theatre)에 초청되었고, 올 8월 영국 Rose Theatre에서 초청공연이 예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작품에 대한 자료를 보니, 주요 컨셉에 physical reality와 media reality가 어떻게 만날 것이냐에 대한 문제, body와 media interface의 문제, life와 on screen space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의 문제가 있던데요. 이 얘기를 하면 기술 컨셉에 대한 설명이 될 거 같군요.
〈Madame Freedom〉에서 영상을 쓸 때 에딘버러에서도 그랬고 사람들이 많이 물어봐요. 화면은 너무 큰데 춤추는 너는 너무 작다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저는 “영상 채널 하나 하나가 나에겐 무용수다. 그래서 어떨 때는 전체가 조화로울 수도 있고 어떨 때는 한 무용수(영상채널)만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Madame Freedom〉처럼 영상을 back drop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가운데에 있는 무용수의 real body가 오브제 중 하나 일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남편이랑 집에서 미디어 이야기를 하다보면 리얼(real) 과 버추얼(virtual) 이야기를 안할 수 없고, 이렇게 피지컬과 버추얼이 두루 섞여 망라되는 그런 접점을 추구하게 된 거 같아요. 그리고 온스크린은 점점 우리의 현실생활에서 스크린의 개념이 커지고 있잖아요. 스마트 폰부터가 그렇고요. 그 활용 영역이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의 영상채널을 한명의 무용수로 본다”라는 얘기, 작품을 떠올려 보니 무슨 얘긴지 알 거 같군요. 다른 시도의 미디어 작품들과 다르게 보였던 연유도 바로 컨셉의 차이였군요. 동적 에너지가 인체 외의 것에서도 나오게 되고, 이미지나 에너지 뿐 아니라 리얼바디와 버추얼이 통합적으로 감각되면서 춤의 한계를 보완하는 실험이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네. 그 지점입니다. 버추얼과 리얼을 가장 빠르게 오가고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춤을 추면서 다른 정신세계에 갔다 오기도 하잖아요. 특히 한국춤이 그런데요.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으로는 다른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그것을 형상화 시키는 것이죠. 미디어의 도움을 받아서 조금 구체적으로요. 실제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과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의 모습이 서로 교감할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으로 리얼과 버추얼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작업을 하다보면 어떤 경우에는 버추얼 이미지가 너무 쎄니까 버추얼 안에 있는 리얼이 가짜 같아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런 것을 보면서 실제와 가상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고민합니다. 이것은 춤을 추는 사람으로써 끊임없이 고민해야할 문제 같습니다.
우리가 무용수를 볼 때는 무브먼트의 조화 이런 부분만 볼지 모르지만 한국무용은 형태 보다는 심상이라든지 정신적인 것을 많이 추구하다 보니까 외형동작과 내면이 그리는 것이 조화롭지 않아 보는 사람을 힘들게 할 때가 있잖아요. 심상이 매우 중요한데 심상은 생각이고 생각은 순간 내가 다른 공간을 다녀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한국춤이 예술로서의 완성도를 가지려면 그런 심상의 차원을 공간으로 형상화 시키는 도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 〈Dancing love〉에서 이 실험을 압축시킨 거군요.
네. 처용과 현대적인 사랑과 여러 관계를 다루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드러나지 않고 형태만 잡아 놓은 것입니다.

지난번 극장 용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하 앨리스)를 봤는데요, <앨리스>는 트라이얼(trial) 같았기 때문에 공연으로 보면 완성도에서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떠올린 생각은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김효진씨 작품은 초연이 다가 아니다. 꾸준히 실험하면서 차분히 완성해 나가는 힘이 있다. 그래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된다’입니다. 〈Madame Freedom〉도 이야기를 듣고 보니 5년 이상의 과정을 거쳐서 채워나갔을 때의 결과물을 보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한 순간에 안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춤 작업에 있어서 ‘느린 호흡’, ‘과정 중심’ 같습니다.
〈Dancing love〉 자료를 보고 김효진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앞으로 이 작품이 어떠한 방향으로 채워질지 감이 옵니다. 몸으로 추긴 하지만 몸의 형태나 동작에 집중하지 않고 더 깊이 있게 정신세계를 다루는 춤인 한국춤을 추면서 했던 본인의 근본적인 고민과 경험을 가장 현대적인 기술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요.
네. 맞습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을 외국인한테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Dancing love〉 할 때도 말을 많이 아꼈어요. 나중에 눈으로 보여드려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결국 한국춤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에너지인 것 같습니다. 무용수로써 온전히 정신적인 것을 체험하지 않으면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춤을 배울 때 선생님들이 강조하신 내용이죠. 그런데 영상의 힘을 빌리면 에너지와 정신 부분을 관객과 잘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Dancing love〉를 준비하면서 처용무를 다시 배웠습니다. 배워보니 춤 동작이 12개 밖에 안되더라고요. 그리고 너무 중요한 것은 춤동작이랑 처용가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 역사적 변천과 이유가 있겠지만 너무 단순화되어 있는 춤동작이 담아내지 않은 마음의 영역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부분은 처용가의 내용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로 채우려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처용이 자신의 아내 모습을 보면서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지, 시간을 갖고 초월하는 마음을 냈을 때, 그게 곧 하늘의 마음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고, 그걸 미디어와 춤으로 통합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모든 실험의 뿌리에는 김효진씨의 한국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깔려 있군요. 어떻게 춤을 추게 되었는지, 어떤 배움의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합니다.
춤을 시작하게 된 것은 마산에서 중학교 다니던 때 였습니다. 학교에 무용반이 있었는데 무용반 선생님이 저희반 부담임이셨어요. 그 때 무용반 월례회가 있는데 한 명이 전학을 가면서 부반장이었던 제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필희 선생님 학원에서 작품을 받았었는데 이필희 선생님께서 담임선생님께 무용하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필희 선생님 학원다니면서 배우고 대학은 이화여대왔는데 김매자 선생님이 저희 학년 지도교수셨어요. 다른 동기들은 거의 대학원을 갔는데 저는 춤이 더 추고 싶어서 창무회를 갔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전업작가가 멋있어 보여서 전업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창무회가 포스트 극장을 오픈할 때 였고 그것이 저에게는 행운이었던 같습니다. 항상 극장에서 연습을 할 수 있었고, 극장의 시스템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고요.

창작무용을 배우고 해오면서 전통에 대한 갈급함은 없었나요?
아니요 있었습니다. 창무회 들어가니 김매자 선생님께서 전통하시는 선생님들을 많이 초청해서 수업을 열어 주셨어요. 저에게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죠. 창무회를 나오고 나서는 박병천 선생님, 정재만 선생님, 김숙자 선생님을 따로 찾아가 배웠습니다. 굿판도 많이 다녔고요, 고성오광대도 가서 배우고, 결혼 후에는 서울교방 김경란 선생님께 열심히는 아니지만 배우고 있습니다.

 




한국춤의 현대화, 발레라는 세계적 코드로 다시 바라보다

 

〈Madame Freedom〉이나 〈Dancing love〉가 작품으로 의미를 갖는 부분은 솔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혼자서 1시간 이상 춤을 끌고 가는 저력이나 춤의 힘이 돋보였는데요, 여러 춤동작을 봤을 때 단순한 한국춤 동작이나 주먹구구식 서양춤동작 흉내내기는 아니었습니다. 1시간 이상 무대에서 춤을 위한 수련은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한국춤 동작을 현대화하는 것에 대한 실험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제1회 신진예술가 지원사업에 선정이 돼서 뉴욕에 연수를 가게됐습니다. 그때가 99년도였는데 저는 한 무용단체에 오래 있지 않고 클라스를 하면서 전시, 공연들을 많이 보러 다녔습니다. 그 때 공연 쪽보다는 미술 분야 임팩트가 너무 강했습니다. 또 LA쪽으로 가니까 La Siggraph 전시라는 시각효과 기술전시가 있었는데 거기가 너무 신세계더라구요. 99년, 2000년도 였으니까 너무 놀라웠죠. 근데 오히려 그 때 느꼈던 것이 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술로 안되는 것이 있잖아요. 결국에는 기계나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춤은 영원하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렇다면 발레보다는 한국무용이 더 유리하고 더 깊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외국인의 시각, 세계인의 시각으로 보니 한국춤의 본질을 그들이 알아 볼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한국춤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데 정신적으로 더 깊이 있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래서 생각한 것이 춤의 공통된 언어를 배우고, 그것으로 한국춤을 설명하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 춤의 공통언어는 발레잖아요. 우리가 모던댄스를 설명할 때도 발레를 중심으로 설명하잖아요. 한국춤도 발레를 기준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설명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발레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발레를 깊게 배우진 않았지만 발레는 프로시니엄 무대를 위해 몸을 최대한 확장시켜서 추는 메소드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수직과 수평을 중심으로 하는 움직임인데 반대로 한국춤은 중심이 몸 안에 있는 거에요. 그러다보니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고 발산을 하면 다시 몸 안으로 중심을 가지고 들어와야 하구요. 모든 것들이 유선형으로 둥글려져서 몸 안에 가져오는 춤이지요. 그런 춤을 수직, 수평의 구조 안에 놓아 보려고 합니다.

〈Madame Freedom〉에서 마지막에 본인이 매우 강렬하게 춤을 추잖아요. 굉장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물론 영상도 함께 가지만. 또 끝까지 끌어올렸을 때는 가장 한국적인 것, 제의적인 춤의 정수를 보는 듯 했어요. 그 춤은 어떤 춤인가요?
매번 추면서 동작을 픽스 안시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안무란 무엇이라고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합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안무자는 에너지를 디자인하는 사람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형태와 형태간의 긴장감,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에너지를 디자인 하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기의 흐름과 비슷하기는 한데 그것보다는 보다 공간적이고 시각적으로 더 드러나도록 안무를 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역시 하체가 단단하게 버텨줘야 다시 몸의 중심으로 힘을 가지고 오게 되는데, 발레식의 수직 수평의 균형과 긴장이 도움이 되더라구요. 그러면서도 고정되어 있는 동작이 아니라 기화(氣化)하는 춤이 되도록 하고자 한 부분입이다. 물론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에너지 중심으로 가야 하니까 영상과 맞춰야 하는 몇 부분만 정해놓고 거의 대부분이 즉흥입니다. 날개짓 하는 부분도 어느 날은 적게하기도 하고 많이 하기도 하고 합니다. 저에게는 날개짓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중요한 것이지 날개짓을 어떻게 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날개짓 할 때 보면 한국춤적으로 했다면 다리를 안쪽으로 모으고 조금은 엉거주춤하게 하면 되는데 조금 더 조형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다리를 발레 5번 자세를 만들어서 합니다. 그러다 보니 거기서 중심잡기가 쉽지 않아요. 에딘버러에서 비평가들이 그 부분에 대해 인상적이었다는 리뷰가 많았는데(The Scotsman, 2013. 8. 21./ The Skinny, 2013. 9. 19) 그 때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무 생각없이 춤을 췄던 거 같은데 요즘에는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는 것 같아요.(웃음)

 




춤이라는 아날로그와 최첨단의 디지털 아우르기

 

김효진씨에게서 새로움을 느끼는 부분은 미디어 기술에 대해 본인이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는 부분이예요. 2009년 인천 아트플랫폼 오프닝 공연 연출, 2011년 윤도현밴드 청춘콘서트 오프닝 미디어 파사드 연출, 2012년 한국콘텐츠진흥원 <대형공연장 맟춤형 영상, 조명, 음향 기술> R&D 프로젝트에 연출로 참여 했습니다.
네. 이번에 <엘리스>도 컨진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기술적인 실험값을 내고 보여줘야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그처럼 2012년 프로젝트도 큰 국제행사 하는 업체들에게 대형공연장에서 퍼포먼스와 미디어, 무대장치와 미디어가 어떻게 기술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저는 물론 춤이란 매체를 사용해서 가능성을 보여주었죠. YMAP로부터 기술 도움을 받으면서 제가 아이디어와 연출을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상상속에 있던 ‘전방위 현대예술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미디어를 통합해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과 그러면서 본인이 끊임없이 고민했던 한국춤에 대한 생각 또한 놓치지 않는 균형적인 모습, 그리고 그것을 동작으로 실험하고 추는 과정까지, 극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의 최첨단까지 아우르는 힘이 대단합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이유가 되겠지요. 오늘 인터뷰는 여기서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