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파리 현지 인터뷰_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신데렐라 박세은
11월 주역 승급 오디션에 도전하겠다

인터뷰│장지영_공연칼럼니스트




 ‘발레의 종가’ 파리오페라발레의 유일한 한국인 단원 박세은(26세)은 2014-2015시즌 비약적인 성과를 거뒀다. 2013년 11월 솔리스트에 해당하는 쉬제로 승급했던 지난해 12월 <라 수르스(샘)>에서 아시아 무용수 최초로 주역을 맡는 쾌거를 이뤘다. 그리고 지난 3월 파리오페라발레를 대표해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주역으로 나선 데 이어 파리오페라발레에서 클래식발레 최고봉인 <백조의 호수>에서도 주역으로 섰다. 지난 5월 중순 파리에서 박세은을 두 차례 만나 올 시즌에 대한 소회를 들었다.

 



장지영
올 시즌 박세은씨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보수적이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파리오페라발레에서 아시아 무용수 최초로 전막 발레의 주인공을 맡은 것은 한국 발레계에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마무리 단계에 다다른 이번 시즌에 대한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박세은 올 시즌은 제게 잊지 못할 시간들이었습니다. 파리오페라발레에서 처음 주역으로 섰으니까요. 쉬제가 되면 군무부터 주역까지 맡게 되긴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주역으로 설 기회를 얻었습니다. 솔직히 이번 시즌은 정말 힘들었지만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라 수르스>(11월 29일-12월 30일,22회)에서 나일라 역으로 12월 28일과 30일 공연을 했는데요. 처음 주역으로 무대에 섰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궁금합니다. 당시 세은씨가 출연했던 공연의 리뷰가 뉴욕 타임즈에 실렸는데, 장 기욤 바르의 안무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워했지만 세은씨에 대해선 칭찬 일색이던데요.
<라 수르스>는 원래 낭만주의 시대 발레지만 제가 춘 작품은 복원된 것이 아니라 쟝 기욤 바르 선생님이 파리오페라발레를 위해 새롭게 안무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발레단에 입단한 뒤 처음 췄던 작품이라서 언젠가는 주역으로 추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르 선생님은 ‘발레 교과서’로 불릴 만큼 발레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신데다 클래스도 담당하고 계세요. 수업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정말 엄하게 혼내시는데요. 클래스에 성실하게 임한 저를 눈여겨보고 캐스팅 하셨다고 해요. 제 재능과 진심을 알아봐주신 선생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배역에 완전히 빠져서 연습하는 등 준비 과정도 재밌었어요.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는 정말 떨렸지만 행복하고 기분 좋은 떨림이었습니다.

 



파리오페라발레 대표로 마린스키발레단에 가서 <라 바야데르>(3월 16일)의 주역을 맡았는데요. 보통은 에투왈이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쉬제인 세은씨를 발탁한 것은 이례적이었다고 봐요. 새로 온 벵자맹 밀피예 예술감독이 세은씨를 높이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파리오페라발레 무용수들이 마린스키발레단 공연에 1년에 한 번씩 게스트 주역으로 참가하는데요. 올해는 에투왈인 루드밀라 팔리에로가 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마린스키 공연이 루드밀라가 <백조의 호수> 공연하는 날짜와 겹치는 바람에 갈 수 없게 됐어요. 그때 밀피예 감독님이 제게 기회를 주셨어요. 감독님의 경우 젊은 무용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편인데요. 제가 지난번 승급시험에서 <라 바야데르>의 니키야를 했던 것과 마린스키 발레단에 계신 제 러시아 스승님들(한국예술종합학교 시절 배웠던 블라디미르 킴, 마르가리타 쿨릭) 등을 감안하셨던 것 같아요. 실제로 제가 마린스키에서 공연하는 동안 스승님들이 지켜봐 주시고 (김)기민이도 용기를 북돋아 줘서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고전발레의 최고봉이라는 <백조의 호수> 주역도 맡았는데요. <라 수르스>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솔직히 <백조의 호수>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거든요. 발레단에서 존 노이마이어의 <대지의 노래>(2월 24일-3월 12일, 14회)와 루돌프 누레예프의 <백조의 호수>(3월 11일-4월 9일, 13회) 공연이 잇따라 있었는데, 저는 원래 <대지의 노래>에만 출연할 예정이었어요. 그러다가 3월초 <백조의 호수>의 마지막 날인 4월 9일 공연에 주역으로 출연하는 것이 결정된 직후 감독님으로부터 마린스키발레단에 가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덕분에 3월 들어 <대지의 노래> 본 공연과 그에 따른 리허설을 하면서 <라 바야데르>와 <백조의 호수>를 동시에 연습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체력적으로 너무 무리가 오자 지도 선생님께서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 다녀온 후에 본격적으로 하자고 하셨어요. 그런데, <대지의 노래> 공연 끝나자마자 러시아에서 <라 바야데르>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당장 4일 뒤인 3월 24일 <백조의 호수> 공연에 서라는 거에요. 에투왈인 마티아스 에만의 파트너가 부상을 당하면서 저를 투입하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안무를 익히고 연습했는데요. 그때 너무 걱정돼서 밤에 누워도 차이콥스키 음악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첫 무대에서 큰 실수 없이 해냈지만 어떻게 끝났는지 모를 정도였어요. 그리고 3월 30일과 4월 9일 공연 역시 무난히 해냈습니다. 그런데, <백조의 호수> 준비하는 동안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공연이 끝난 뒤 근육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오더라고요.

 



군무로 무대에 서다가 주역으로 춤을 추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간혹 해외에 진출한 한국 무용수들 가운데 주역을 오랫동안 맡지 못하는 동안 자신감을 잃고 국내에서 보여줬던 카리스마를 잃어버리는 것을 봤습니다.

저도 입단 이후 군무를 많이 췄는데요. 어쩌면 올 시즌 주역을 하지 못했다면 저도 자신감을 많이 잃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다행스럽게도 제가 파리오페라발레의 지방 갈라 공연 등에서 주역 파드되를 많이 춘 덕분에 감을 잃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군무를 췄던 것도 장점이 있습니다. 일단 여러 작품을 완벽히 이해한 상태에서 주역으로 나서기 때문에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파리오페라발레에 입단한지 4년이 다 되어 가는데요.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외국 생활을 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처음에 언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발레 용어가 불어니까 연습실에선 괜찮지만 연습실만 나서면 위축되더라고요. 다행히 4년차인 지금은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어요. 언어 문제 외엔 외로움인 것 같아요. 혼자서 생활하다 보니 예민해지는데, 스스로 컨트롤 해야만 해요. 파리오페라발레가 워낙 경쟁이 치열한 곳이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되거든요. 예를 들어 오전 10시 클래스가 있어서 미리 운동도 하고 연습도 하려고 일찍 가는데, 이미 많은 단원들이 나와 있어요. 저만 열심히 하는게 아니에요. 사실 발레단에 온 이후 하루하루가 제겐 도전의 연속이라 늘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것 같아요.

 



파리오페라발레에 준단원으로 들어올 때 네덜란드국립발레단에도 솔리스트로 합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ABT2에서 활약도 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었을 것 같은데, 고생이 뻔한 파리오페라발레를 굳이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영국 로열발레단과 파리오페라발레였어요. 로열발레단은 제 롤모델인 발레리나 알리나 코조가루가 활약하는데다 드라마틱한 작품들을 레퍼토리로 많이 가지고 있어서에요. 그리고 파리오페라발레는 제가 좋아하는 누레예프 버전을 비롯해 정말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어서 늘 꿈꿔 왔죠. 특히 파리오페라발레는 한예종에서 김용걸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더욱 동경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두 발레단 모두 자신의 발레학교 출신을 선호하기 때문에 외부 무용수를 잘 뽑지 않더라고요. 마침 제가 해외 진출을 타진할 때 파리오페라발레가 단원 선발 오디션이 있었어요. 그런데 (여자 무용수 111명 가운데) 1명만 정 단원으로 뽑는 오디션에서 제가 3등을 했어요. 1등과 2등 모두 파리오페라발레 발레학교 출신이었어요. 여기 오디션에서 떨어진 뒤 네덜란드국립발레단 오디션을 치렀는데, 데트 브랜드슨 예술감독님이 저를 좋게 보시곤 솔리스트로 입단 제안을 하셨어요. 그런데, 네덜란드국립발레단과 계약까지 마친 상황에서 파리오페라발레로부터 준단원으로 오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어요. 나중에 정단원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가겠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프랑스 남부에 머물던 브랜드슨 감독님을 찾아가서 파리오페라발레에서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어요. 사실 네덜란드국립발레단이 제게 법적 책임을 물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감독님이 직접 찾아온 저를 기특하게 여기셔서 잘 해결됐어요.

파리오페라발레에서 활동하면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우선 컨템포러리부터 고전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아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동안 컨템포러리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시즌 벨기에 로사스무용단의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의 〈RAIN〉(10월 21일-11월 7일, 12회)에 출연하면서 컨템포러리에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저는 얼떨결에 이 작품 오디션을 치렀다가 붙었어요. 안무가인 안느가 저를 직접 지명했어요. 안느와의 작업은 정말 재밌었어요. 무대 위에서 무용수 10명이 1시간10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춤을 춰야 되기 때문에 공연이 끝난 뒤 멀쩡한 사람이 없었지만 창작하는 과정의 에너지나 자유로움을 잊을 수가 없어요. 또 다양한 레퍼토리 외에도 세계적인 안무가들과 직접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이 파리오페라발레에 있는 큰 즐거움이죠.
이번 시즌엔 평소 너무나 좋아했던 존 노이마이어의 <대지의 노래>에 솔리스트로 출연했는데요. 노이마이어 선생님이 2013년 말 발레단의 승급시험 심사위원으로 오셨다가 저를 좋게 보셨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발레단에 오셔서 처음 2-3주 동안은 저를 ‘수진’이라고 부르시더라구요. 노이마이어 선생님이 처음 만난 한국 발레리나가 강수진 단장님이어서 습관이 됐던 거에요. 다행히 얼마 뒤에는 제 이름을 외우셨어요.




밀피예 감독이 부임한 이후 파리오페라발레에는 어떤 변화가 있나요? 예전에 비해 발레단이 좀 더 개방적이 됐다는 평가가 들려오던데요.

밀피예 감독님 자체가 워낙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인물인데요. 젊은데다 미국에서 왔기 때문인지 예전에 비해 발레단이 개방적이 된 것은 분명해요. 예를 들어 파리오페라발레 페이스북이나 홈페이지가 예전에는 불어로만 되어 있다가 최근 영어 서비스를 시작했어요. 또 저를 비롯해 젊은 단원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시는 편이에요. 참 다음 시즌부터 윌리엄 포사이스가 협력 안무가로서 발레단에서 작품을 올리게 돼 기대가 커요. 그리고 여러 안무가들의 신작이 대거 포함돼 있는데, 무용수들에게 만만치 않은 시즌이 될 것 같아요.

지난번 승급시험에서 1위로 쉬제가 됐는데요. 당시 일본 무용 전문지인 ‘댄스 큐브’를 보면 세은씨가 아시아인 최초로 에투왈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어요.
파리오페라발레는 단원이 160여명 정도인데, 코르 드 발레(군무)-코리페(군무 리더)-쉬제(솔리스트)-프리미에 당쇠즈(주역)-에투왈(주역 중 최고 무용수)의 5단계로 나뉩니다. 프리미에 당쇠즈까지는 승급 시험을 통해 선발되지만 에투왈은 예술감독과 이사회의 논의를 거쳐 지명돼요. 저는 올해 11월에 프리미에 당쇠즈 승급 시험을 볼 예정입니다. 지정작품 하나와 자유작품 하나를 하게 되는데, 꼭 승급하고 싶어요. 그리고 에투왈은 당연히 되고 싶지만 제 의지만이 아니라 여러 주변 여건이 갖춰져야 되는 것 같아요.

 



세은씨를 직접 보고 싶어하는 한국 팬들이 많습니다. 국내 무대에 설 계획은 없나요?

그동안 몇 번 공연 제안을 받았는데요. 군무부터 주역까지 춰야 하는 쉬제이다보니 한국으로 공연을 하러 다녀올 시간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조만간 지금보다 좋은 모습으로 꼭 한국 관객과 만나고 싶어요.

2015. 0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