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표지_ 김기인춤문화재단 ‘춤사랑 열린마당’
스스로춤,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생명의 춤
장광열_<춤웹진> 편집위원

 
 공연이 난무하는 가을 춤판. 9월 3일 서강대메리홀소극장에서 본 ‘2015 춤사랑 열린마당’ 공연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박성율의 독무 <돔>에서 무용가 김기인이 생전에 보여주었던 ‘스스로 춤’의 실체를 다시 만났을 때 ‘전율’이 일었다.
 2011년 출범한 김기인춤문화재단이 마련한 이날 공연은 자신의 춤의 바탕을 ‘기의 회전력’이라고 규정한 김기인의 춤 유산이 사장되지 않고 아카이빙(archiving)되고 있는 진솔한 ‘현장’이었다.
 1990년 <객석> 7월호에 나는 김기인에 대해 ‘아류를 거부하는 고집스러운 몸짓’, ‘순수한, 전혀 꾸밈이 없는 것 같은 멋’이라고 적었다. 1993년 <객석> 4월호 김기인의 10번째 스스로춤 공연을 보고는 “요란스럽지 않게 일찍부터 새로운 현대무용에 눈을 돌린 김기인의 작업은 서양식의 흉내내기에 익숙한 국내 무용가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적었다.
 1996년 <객석> 1월호에 김말복 이화여대 교수는 김기인의 춤을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가는 꾸밈없는 춤’이라고 평했다.
 이날 공연을 ‘김기인 스스로춤 후학들의 헌무(獻舞)’라고 적은 예술감독 양정현(전 서울예술대학교 학장)은 “천계(天界)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초무인(超舞人, Ubertanzerin) 김기인 교수에게 조금 더 다가가려는 마음이 담겨진 무대’’라고 밝혔다.
 <춤웹진>에서는 10월호 표지로 외향적으로 크고 화려한 공연 대신 작지만 의미있는 춤판을 선택했다. 동생인 김기인의 이름을 단 김기인춤문화재단을 이끌고 있는 김기선 대표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김기인의 예술세계도 함께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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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김기인춤문화재단 김기선 대표이사






장광열
9월 3일과 4일에 열린 <춤사랑 열린마당> 공연은 무엇보다 젊은 무용인들의 작품이 질적으로도 뛰어났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김기인 선생의 제자인 김금광의 춤(씨앗)도 오랜만에 보았고, 김설진 김봉수 김기수 남성 무용수 3인이 춤춘 <오름>, 이형우 박성율 신현아 3인의 무용수가 춤춘 <모움>도 신선했습니다. 박성율의 독무 <돔>은 김기인 선생의 <무>에서 보았던 에너지의 수축과 팽창을 통한, 스스로춤 김기인 움직임의 환생을 보는 듯 했습니다. 이번 공연이 이루어진 배경이 궁금합니다.
김기선 2011년 8월 25일 재단이 설립된 이래 <춤사랑 열린마당>이라는 명칭 하에 열린 것으로, 재단 행사로는 세 번째가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춤’이라는 표제를 내걸고 시도한 최초 공연이 되고요.

처음 공연은 언제 있었나요?
창단 직후인 9월 17일 공간사옥에서 공연이라기보다는 설립을 기념하는 성격의 행사로 치러졌는데, 그 당시에는 재단 운영과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었지요. 그때는 김기인을 주인공으로 한 김의석 감독님의 80년대 초 단편영화 <뫼비우스의 딸>을 상영(초연)했고, 장은정 씨가 후배로서 <헌무>라는 표제아래 춤을 헌정했어요.
두 번째 공연은 2013년 12월 4일에 남산예술센터에서 있었습니다. 3주기 추모제로 마련한 이 공연에서는 이 행사를 위해 윤미나 씨가 제작한, 김기인의 춤을 다룬 짧은 동영상을 상영했고, 그 해 장은정 씨가 김기인의 1984년작 <하나>를 재해석해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했던 <하나(One)>도 무대에 올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섭외한 김기인의 제자들이 스스로춤으로 창작한 작품 <원(願)>을 올렸고요. 사실 이 두 번째 공연은 본격적인 스스로춤 공연으로 기획되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그런 공연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그럴 단계에 이르지 못했던 거지요. 내공이 쌓여 이미 완숙 단계에 있었던 장은정 씨의 <하나>를 논외로 하고 스스로춤만을 생각한다면, 이 공연은 제자들이 마음을 내어 스스로춤이라는 표제 하에 최선을 다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의미 있었던 공연이었어요. 실제로 그날 공연장의 열띤 기운을 끝까지 이끌어갔던 건 김기인 춤 영상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좌중을 사로잡는 압도적인 흡인력이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죠.

네. 그때는 저도 참석해 모두 보았습니다. 영상에 담긴 김기인 선생의 춤을 보면서 더욱 추모의 정이 더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2014년 3월 경 제주 돌문화공원 측으로부터 5월 중순에 열릴 예정인 설문대할망제 참가 제의를 받았습니다. 저희 측에서는 전해에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올렸던 스스로춤 <원>을 좀 더 다듬어 이 행사에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세월호 사태로 모든 일정들이 취소되면서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었지요.
그 이후 2014년 12월에 다시 공연을 기획했었는데 일부 출연진의 사정상 급히 계획을 변경하게 되면서 김기인춤문화재단만의 색깔을 가진 공연에 대해 전면적으로 검토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신중한 고려 끝에 임박해있던 공연을 파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른 춤들과 함께 스스로춤 한 꼭지를 무대에 올릴 계획이었는데 공연은 무산되었지만 그간 축적된 연습 과정을 바탕으로 올해 5월 제주도 돌문화공원에서 다시 열린 설문대할망제 무대에 스스로춤 <모움>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탄생한 스스로춤 <모움>은 다시금 이번 공연의 밑거름이 되었구요.

 



이번 공연에 솔로를 선보인 제자 김금광과 박성율은 스스로춤의 두 기둥이 되어 열성을 다해 공연에 임해주었습니다.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꺼져가고 있던 스스로춤의 불씨를 살려놓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된 배경에는 저희 재단 운영진을 비롯한 무용계 여러 지인들과의 지속적인 대화와 논의에서 도출된 의견들이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재단운영의 핵심 사안이 무엇보다도 “춤” 자체여야 하고, 또 춤이라면 다름 아닌 스스로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김기인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도무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하나 둘 모여 조심스레 공연을 열게 되면서 그 해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들이 이어져 하나의 흐름을 형성해 나아간다면 장차 이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도약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김기인춤문화재단은 세 차례의 <춤사랑 열린마당> 공연 외에도 지난 몇 년 동안 소리 소문 없이 꾸준히 활동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궁금합니다.

재단 설립 초창기에는 주로 다른 단체들에서 주최하는 행사를 후원했습니다. 2012년에는 한국춤예술센터에서 주최하는 “2인무페스티벌”을 후원했고, 같은 한국춤예술센터에 기획을 맡겨 세미나 “현대 한국춤의 경향과 전망”을 주최하기도 했습니다. 또 육완순 선생님의 제안으로 SCF(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에 김기인춤예술상을 제정하여 상금을 수여했으며 그밖에 경희대, 서울예대, 한예종, 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에서 추천한 무용전공 학생들을 지원했습니다.
2013년에는 KDF(국제하계현대무용페스티벌) 추천 해외연수 장학생 및 경희대, 서울예대, 한예종, 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 무용전공 학생들을 지원했고 SCF 제정 김기인무용예술상 수여도 지속했습니다.
2014년에는 예술치료 박사과정에 있는 재미 유학생을 비롯하여 KDF 추천 해외연수 장학생을 지원했으며 서울예대와 안산디고의 후원을 이어나갔습니다. 이 해부터는 SCF에 제정했던 김기인춤예술상의 명칭은 폐지하고 후원만을 하기로 했는데, 김기인춤예술상은 저희 재단에서 자체적으로 수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운영위원회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였습니다. 어떤 춤에 이 상을 수여한다는 것은 춤 조류를 형성하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2015년에는 제주 설문대할망페스티벌에서 스스로춤 <모움>과 함께 장은정 외 3인이 이끌어가는 관객참여형 공연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2014년 이래 무용가 지망생 후원은 서울예대와 안산디고에 국한하기로 했습니다. 또 2013년부터 지금까지 총 5회에 걸쳐 (한예종 김채현 선생님 주관 하에) 춤 포럼 ‘김기인과 그 시대’를 개최했고 2회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재단의 성격이 수동적인 후원재단이었던 초창기와 비교해 재단 주도의 적극적인 방향으로 변모해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초창기 때만 해도 저 역시 이 재단을 후원재단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한국 현대 춤계에서 김기인의 춤이 가진 의미를 알기에는 저로서는 역부족이었어요. 동생의 가장 왕성했던 활동기간 동안 내내 저는 해외에 있었으니까요. 그 춤과 예술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동생의 춤을 아끼는 이곳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제 귀에 전해진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해도 동생의 춤에 대한 근본적인 평가가 제게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공연 현장에는 거의 없었지만 제가 참관한 몇몇 작품이나 자료들을 통해 저 나름의 평가를 내릴 수는 있었지요. “이것은 예술의 궁극이다. 이 춤이야말로 모든 춤의 중심축을 이루는 춤이다“라는 평가 말입니다. 이런 저의 평가가 바탕에 있었기에 춤 자체를, 그것도 스스로춤을 중심에 놓는 기획재단으로의 변모를 이끌어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아가 이것은 제가 의도했다기보다는 여러 관계자들과 대화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흐름을 따르면서 이루어진 변화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기인과 그 시대’란 제목으로 그동안 모두 일곱 차례의 춤 포럼을 진행해 왔더군요.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고 어떤 내용들이 논의되었는지요?

2013년 8월 첫 번째로 열린 포럼에서는 남정호, 안애순 씨를 모셨습니다. 김기인의 대학시절과 인생, 컨템포러리 춤을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어요. 안신희 씨를 비롯해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에서도 참석해주어 풍성한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였습니다. 2014년 1월 두 번째 포럼에서는 김금광, 하혜석, 안재은 씨가 참석해주었습니다. 김금광 씨는 열정적으로 긴 시간동안 춤을 춰온 후배이고, 하혜석 씨는 김기인의 가장 오래된 친구같은 제자로 현재 재단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재단 감사로 있는 안재은 씨는 하혜석 씨 다음으로 오랜 제자인데 김기인과 함께 스스로춤을 많이 췄어요. 2회 포럼에서는 스스로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지요.
그해 4월에 열린 포럼에서는 김기인과 사회의 문제, 무대 밖 예술세계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김기인이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문학평화포럼 축제에서 스스로춤을 선보였을 당시 포럼의 회장이었던 홍일선 시인과 사무총장이었던 이승철 시인을 모셨었습니다. 모두 김기인과 매우 각별한 인연이었던 분들이셨지요.
네 번째 포럼은 두 달 뒤인 6월에 열렸습니다. 양정현, 박숙자 씨를 모시고 동료 교수들이 본 김기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박숙자 교수님은 김기인의 서울예대 임기기간 내내 같은 방을 썼던 분이셔서 매우 가까운 사이였지요. 김기인에 대해 족집게 같은 표현을 해주셨던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올해 5월 10일에는 박일규, 오은희 씨를 모시고 다섯 번째 포럼을 열었습니다. 박일규 선생님께서 김기인을 인정하는 부분에 인색하지 않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같은 달 23일에 기미양, 김나영 씨를 모셨어요. 기미양 씨는 김기인의 팬이었어요. 어떤 무대에서 45분 동안 독무를 췄던 김기인의 모습에 매료되었다는 그 분은 현재 아리랑연합회의 사무국장으로서 굉장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김기인은 아리랑연합회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아리랑을 바탕으로 한 현대무용을 펼쳤었지요. 풀뿌리 삶, 민중의 삶에 대해 공감하고 공유한 춤들이 당시에 선보여졌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어요.
마지막으로 7월 24일에 있었던 일곱 번째 포럼에서는 홍신자 씨와 붓다락키따 스님을 모셨어요. 김기인의 예술혼과 영적인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포럼에서 오고간 내용을 충실히 기록해두었다가 책으로 발간하는 것도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네요. 한 예술가가 작고하고 난 후 그의 이름을 딴 문화재단이 만들어지는 것은 드문 일이고 더구나 무용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예술가가 남긴 업적이 있을 경우, 그밖에도 재단설립을 위한 재정적 여건이라든지 가족의 용기있는 결정 등이 있어야 실현될 수 있지요. 김기인춤문화재단의 설립 배경에 대해서도 들려주시지요.

동생의 죽음은 저희 형제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기인이는 저희 오남매 중 한가운데 자매였습니다. 맨 위가 오빠, 막내가 남동생, 그리고 중간에 딸 셋 중 가운데였죠. 저는 그때 마침 독일에 가있어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지요. 동생은 저의 한 달간의 독일체류의 꼭 한가운데가 되는 날 떠났어요. 제게 연락이 닿지 않아 이곳 친구들이 천신만고 수소문한 끝에 제가 그곳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건 사흘 후였으니 아마 장례를 치르는 날이 아니었는가 합니다.
야릇하게도 제가 부고를 받은 곳이 오래 전 동생이 제 유학시절 독일에 들러 같이 방문을 한 일이 있었던, 그 당시 시골에 갓 이사를 가 살고 있는 제 친구 부부의 은적한 고성이었습니다. 그 고성의 큰 홀에서 동생은 그 부부가 새로 마련한 페르시아 카펫 위에서 라벨의 ‘볼레로’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었지요. 더욱 야릇한 것은 하필이면 제가 그 친구부부를 방문하기로 예정된 바로 그날 아침에 그 집에 전화로 부고가 와있었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그로부터 저의 독일 체류는 하염없는 눈물과 이별의 대화로 점철되었고, 귀국하자 형제들은 모두 황망하여 정신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춤재단 설립의 말을 처음 꺼낸 건 막내였던 것 같은데, 이 동생이 이미 장례식장에서 무용계 관련 몇몇 분들에게 그런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도 들었습니다. 저희에겐 이 제안이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아마 춤과 고인을 분리하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져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김기인과 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어요. 죽어서도 춤은 동생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느낌 같은 게 있었습니다. 막내가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다른 형제나 자매가 그리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사진들의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재원은 어떻게 조성되었는지요?
저희 선친께서 2008년 1월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동생이 타계한 시기가 2010년 9월이었으니 선친의 유산엔 물론 동생의 몫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그것은 당연히 기인이를 위해 쓰여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네 형제가 무조건 동의했습니다. 그 당시 저희는 아직도 선친의 유산 상속과정에 있었는데, 모두가 춤재단 설립 제안에 두말없이 동의하자 선친의 유산이 포함된 동생의 유산의 일부를 상속받으신 어머니께서는 저희 의견에 무조건 따르시면서 당신이 딸로부터 상속 받으신 유산 일체를 재단에 기증하셨습니다.
세부 상속과정이 끝나기까지는 동생 타계 후 한 반년의 세월이 더 소요되었습니다. 그 과정이 마무리되자 저희는 재단 설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창립 절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육완순 선생님께 자문을 받아 제1기 한국컨템퍼러리 무용단원 중 박명숙, 안애순 두 분, 그리고 저희 선친께서 설립하신 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 교감이셨던 양재천 선생님과 함께 저의 오랜 친구인 미술평론가이자 그 당시 한국미학협회 부회장이었던 장미진을 이사로 영입하게 되었습니다. 대표를 맡을 사람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저밖에 없었기에 조직운영에 전혀 어울리지 않으면서 경험도 전무한 제가 그 역할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이 초대 이사진 체제로 3년을 운영한 후 좀 더 실제 운영에 힘을 보탤 여건이 되는 실무팀을 새로 구성했습니다. 그래서 전 서울예대 학장이며 현 서울종합예술학교 명예학장이신 양정현 선생님(<틈.터.틀.> 무대를 구성해주셨다), 그리고 이분의 추천으로 거문고의 대가이자 서울예대 교수이신 하주화 선생님(동생과 한 번 같이 작업하자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동생의 후배이자 서울예대에 출강중인 무용가 장은정 씨, 그리고 상명대, 성신여대 등에 출강하고 있는 제자 하혜석 씨를 2기 이사진으로 영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재단을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도 있을 텐데요.

네,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단체와 관련된 일을 접해본 일이 전혀 없는데다가 은둔적 성향의 삶에 익숙해있는 터라 많은 사람들과 교류해야 하는 이 일이 그리 녹녹치 않습니다. 이즈음 재단 일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경로들을 통해 저의 이런 성향들이 변모해가고 있긴 하지만 재단을 활기차고 역동적으로 이끌어가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신경이 쓰이는 일은 같이 일을 꾸려나가는 이웃들과의 원활한 협동과 조화입니다. 가능하면 장점을 보면서 같이 가되 전체를 생각해서 가지를 치는 용단을 내려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또 기본 자산이 있다고는 하지만 수익률이 낮은 현 금융투자의 상황 상 수입은 줄어드는데 갈수록 지출의 수요는 늘어나는 것도 고민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 수요에 대비해 재단의 효율적인 운영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춤을 핵심 사업으로 하고자 하는데 이에 대한 자료들이 아직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데다가 이를 이끌어나갈 중심역할을 할 본인이 없다는 점인데, 이것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박성율 씨 같은 제자들이 역량을 쌓아가면서 서서히 해결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재단에서 구상하고 있는 사업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나요?
저희 재단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춤이고, 특히 스스로춤의 계승과 발전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춤의 요체를 확립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것은 이론과 실제 두 측면 모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스스로춤을 접한 후배, 제자들의 참여하에 연구팀을 결성해 집담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지금까지 글로 쓰이거나 이야기된 스스로춤의 자료들을 결집, 정리하고 보완해서 이론을 구축하는 한편, 고인의 생존 시 이미 의도되었던바 스스로춤 동작의 다양한 초식을 발굴, 재현하고 이를 체계화하여 춤의 방법론을 구축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 과제와 병행해서 스스로춤과의 자연스런 연결선상에서 거론될 수 있는 커뮤니티댄스로 영역을 확장하여 관객을 무대로 불러들인다든지 무용수가 무대에서 관객에게 내려와 춤으로 초대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 안에서 잠자는 춤을 인간과 우주의 중심을 향해 깨우는 일련의 작품들로 제작할 구상 또한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역시 스스로춤과의 연결선상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무용치유의 이론과 방법론을 구축해서 다방면으로 이를 실용화하는 방안도 모색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을 비롯해서 제주 돌문화공원에서 펼치게 될 다양한 행사들은 이러한 모든 구상들이 싹트고 자랄 수 있는 온상이 될 것입니다. 제주에서 열리는 설문대할망제는 생태, 모성, 영성, 치유를 모토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주적 생명을 기반으로 영성을 지향하는 저희 재단의 취지와도 잘 어울립니다.
그밖에 예술가로서의 김기인의 삶과 인간을 조명하는 책자의 발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우선 사진 자료들과 함께 몇 꼭지의 글이 수록될 단행본, 그런 다음 평전 형식의 책자 또한 발간할 계획입니다. 가능하다면 평전은 김기인에 국한하지 않고 일종의 시리즈 형식으로 일련의 무용가들을 하나하나 다루어나갈 것도 생각하고 있는데 저희가 그럴 만한 역량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대표님께서 가까이에서 본 예술가 김기인의 일상은 어떠했나요?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동생이 한시도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밥상에서 밥을 먹을 때나 아마 잘 때와 같은 그런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지요. 식사 후에도 상을 물리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후식으로 과일을 먹거나 담소를 나누거나 할 때면 앉은 채로 늘 스트레칭을 하든지 팔이나 몸통을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춤추는 것 같은 동작을 했어요.
제가 1982년 잠시 귀국했을 때 일인데 동생과 같이 백운대를 올라갔던 일이 있었어요. 물론 험하고 가파른 산길을 오를 땐 그럴 수 없지만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며 찻길 옆 일반 보도며 그런 데서는 걸음걸음이 춤이었어요. 누가 보든 말든 상관치 않고 그렇게 자신의 춤을 만끽했어요.
나중에 제가 귀국해서(1998년) 한 동안 동생 집에 기거하면서 같이 자주 산에 가곤 했는데 그때도 산을 오르내리다가 손바닥만큼의 평지라도 나오면 당장 춤을 추든지 네 발로 걷는 호랑이 걸음을 걷든지 하면서 그곳에 오래 머무르곤 했지요. 물론 저에게도 늘 그리 하라고 시켰구요. 몸에 늘 춤이 붙어있었지요.
타계하기 한두 해 전부터는 그런 동작들이 점점 맥이 빠지더니 어느 때부턴가는 아주 사라져버렸어요. 눕는 일이 많아졌구요. 그때 저한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 불길한 예감 같은 것들이 스쳐갔는데 세상을 뜨리라고 까지는 상상도 못했어요.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빨래를 너는 장면을 종종 자신의 미래로 그리곤 하면서 자기는 장수할거라 늘 장담했고, 건강식에 관한 온갖 정보며 조리법을 늘어놓으면서 식단이며 운동이며 몸의 건강을 위해 자기가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를 자랑하곤 했으니까요.
그 애는 단연 저희 가족 중에서 유일한 활력소였어요. 주로 근엄한 풍의 집안 분위기가 그 애로 인해 휘저어지는 일이 다반사였지요. 식구 중 진정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기인이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모두 그녀를 조금 미친 존재쯤으로 여겼던 것 같아요. 또 야단법석이네, 그런 식으로 말이죠.
집안 살림은 다소 정갈했어요. 늘 걸레질을 했고(대걸레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어요), 필요 없는 물건은 잘 버리는 편이었지요. 식사에 매우 신경을 썼고, 거의 본능적으로, 동작을 하던지 산에 가든 산책을 하든, 늘 움직이면서 건강을 챙겼지요.

 



제가 귀국해서 한 2년 그 당시 직장이 있었던 대전을 오가며 동생과 함께 살았는데 동생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새벽같이 일어나 명상과 몸 풀기 동작으로 하루를 시작했지요. 그리곤 아침마다 저를 산에 끌고 다녔어요. 그 당시 수유동의 은적한 빌라에 살았는데 바로 뒤가 북한산이었으니까요. 산에 갈 때는 으레 개구멍으로 들어가거나 철제 울타리를 넘거나 했고(그 당시엔 국립공원 입장료가 있어 지정된 입구를 통해서만 등산이 가능했지요), 주로 길 아닌 길을 택하는 게 동생의 장기였어요. 위태로워 보이는 큰 바위라도 나오면 본인 스스로 시범을 보이면서 나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가 위험한 동작을 하게 하면서 일종의 극기훈련을 시키기도 했구요. 갈 때마다 평평한 장소가 나오면 춤을 추거나 호랑이 걸음을 하거나 하는 건 물론이었구요.
길 아닌 길로 가는 것, 그것은 동생의 천성이었던 것 같아요. 동생은 어떤 틀에도 매이지 않는 천성의 소유자였지요. 그 애의 주위엔 사막의 광풍과 같은 신선하면서도 거친 일종의 야성의 기운이 감돌곤 했지요. 좀 전에 산에 갈 때면 길 아닌 길을 가는 게 장기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건 그녀의 춤의 경향에서도 드러났어요. 동생은 늘 새로움을 추구했습니다. 현대무용가로서 얼마간의 인정을 받고 있긴 했으나 기존 현대무용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법을 모색하며 무용계의 인정이 따르든 않든 자신의 추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학교라는 조직에 그토록 오래 몸담고 그 모든 규제와 의무 가운데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다는 건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었어요. 많이 힘들어했죠. 특히 학과장의 직책을 떠맡아야 할 때는 더했고, 또 일례로 박사논문을 제출해야 하는 등 학교에서 요구하는 교수승진 조건과 관련해서도 그랬구요. 그러면서도 그 틀을 박차고 나올 만큼의 용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아니면 그 틀을 깨는 데 의미를 두지도 않은 듯 결국 생을 마감하도록 그 안에 머무른 결과가 되었지요. 어찌 보면 이건 저희 집안 내력과 관계되는 성향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저도 그렇지만 저희 아버님 역시 이를테면 문 안과 문밖을 넘나드는 경계인의 기질을 가졌거든요.
동생의 이런 성향과 관련해 또 하나 특색 있는 점은 사람을 대할 때 사회적 지위나 학벌 같은 것이 그 애한테는 아무런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에요. 그건 동생이 그런 가치관을 초월한 고원한 지혜나 인격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어서지요. 가까운 예로 그 애는 아버지가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지위에 있으며 하는 등등의 외면적 신상에 대해 무심했어요. 어쨌든 그런 때문인지 동생의 대인관계는 매우 넓고 다채로웠어요. 그런 식으로 어떤 선입견도 기대도 없는 열린 마음에서 비로소 가능한, 다양한 교류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지인들이 생기고 떠나고 하는 식이었어요.
그렇게 사회적 요구에 대해 무개념이고 무심했지만 그것을 초월한 자유인의 경지에 가 있던 건 아니었어요. 그러한 요구조건들에 부대끼면서 고단한 하루하루를 이어갔던 거죠. 특히 자신의 지적 능력이 보잘것없다는, 무식하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렸어요. 그리고 그런 콤플렉스의 이면에는 예술가로서의 대단한 긍지와 확신, 자부심이 있었구요. 아마도 이런 엄청난 괴리가 그 어떤 걸림도 막힘도 없는 자유로운 경지를 추구하고자 하는 구도심으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해요.
그리고 끝까지 그 괴리와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아요. 현정선원이라고 거사님이 법문하시는 조사선(祖師禪) 도량을 다니면서 많이 닦고 했었지만, 실제로는 늘 의무와 틀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고단한 삶을 보냈던 거죠.

 



생전에 김기인 선생은 자신의 춤을 ‘스스로춤’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만의 독창적인 메소드를 구축했던 무용가였습니다. 대표님께서 보는 ‘스스로춤’의 핵심이나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여느 다른 춤들보다 스스로춤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각각 그 사람의 관점에서 가능한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춤입니다. 그것은 스스로춤이 근본적으로 모든 다른 춤들에도 본래적으로 공통되는 핵심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모든 다른 춤에서도 표현될 수 있는 기법을 공유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다른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방금 언급한 공통의 핵심요소가 그러한 것으로서 의식되든 않든 말이죠.
‘스스로’란 모든 현상의 원래의 그러한 성품을 드러내는 수식어입니다. 근원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은 다만 그저 스스로 있는 그대로 순간순간 변전하며 존재할 따름이에요. 거기에는 잡을 수 있는 정형의 형체도 지속하는 실체도 없습니다. 그것은 늘 거기에서 작용하면서 만유를 내는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과 같은 것이어서, 만유를 통해 그것의 작용을 인식하지만 그 자체 현상적으로는 숨겨진 어떤 것, 아니 어떤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수식하는 말이라는 거지요. 만물의 원천인 샘은 만물을 뿜어 올려 바다를 이룹니다. 우주만유라는 망망대해는 그 또한 남김없이 이 원천에서 유래한 한 큰 스스로춤의 현장입니다. 본원의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춤은 샘과 같고 드러난 무한한 형상의 세계에서 보면 그것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어떤 춤이 스스로춤이냐 아니냐 하는 시금석은 그 춤에 이 스스로의 빛이 어떤 식으로든 광휘를 발하느냐 아니냐. 다시 말해서 춤추는 사람의 주관적 관념이 얼마만큼 녹아내려 스스로 그러함의 신비가 흘러들게 하느냐 아니냐에 달린 거라는 말이지요. 여기에는 개성을 드러낸다든가 명성을 추구한다든가 거장의 예술을 창작한다든가 하는 의도 같은 건 발을 붙일 수가 없어요. (물론 개성이 드러나고 명성이 찾아올 수도 있지만 그건 다만 예상치 않은 결과물로 애초부터 안중엔 없는 방해물들인 거지요.) 여기에는 다만 끊임없는 찰나의 비움과 늘 다시금 새로운 채움이 있지요. 날숨과 들숨, 생명이 있어요.
생명이 있는 춤, 그래서 조화를 가져오고 치유를 가져오는 춤, 그게 스스로춤이에요. 지난 2013년 저희 재단 남산예술센터 공연을 마치고 박성율이 하던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었어요. 그때 스스로춤 팀이 <원>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는데, 여러 모로 연습도 부족하고 아직 많이 미숙한 상태로 공연을 마쳤었지요. 그런데 관객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었어요. “감동을 받았다”는 평이 자주 들려왔는데 성율 씨의 이야기를 듣고 그럴 만하다 공감을 할 수 있었지요. 그의 말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다른 공연을 하고 나면 허탈감, 무기력감, 그리고 에너지가 소진되었다는 우울한 기분에 휩싸여 그 상태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한동안을 허우적거리게 되는데 스스로춤의 경우는 다르다는 거예요. 행복하고 조화롭다는 느낌, 치유 받았다는 느낌에 휩싸인다는 거지요.
다른 춤을 출 때는 같이 춤추는 동료 간의 경쟁과 갈등,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중심적 욕구 같은 감정들로 피폐해지는데, 스스로춤을 추면 중심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모두를 포함한 보이지 않는 중심을 지향하면서 그리로 온 정성을 모으는 방식의 춤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기다려주고 보완해가며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자기를 비우면서 그로 하여 결국 자기가 채워지는 충만감을 경험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스스로춤이 그냥 별 진통 없이 저절로 스리슬쩍 편하게 이루어지는, 혼자든 여럿이 어우러지든 누구나 준비 없이 추어도 좋은 막춤 같은 건 아닌가 하는 오해가 일어날 수도 있겠는데요. 오히려 정 반대라고 말할 수 있어요. 사실 우리의 삶은, 가치관이 되었든 이념이 되었든 개인적 집단적 관념이 되었든, 겹겹의 덧씌움과 왜곡과 온갖 종류의 환영들로 가득한 난무장이지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상념들이 사슬을 이루는 끝 모를 행진에서 그 질기디 질긴 사슬을 끊고 ‘스스로’가 현현하는 본원의 자리에 선다는 건 숙연하리만큼 경이로운 일이지요.
스스로춤은 춤을 비로소 춤이게 하는 빛을 던지는 춤, 춤에 생명을 불어넣는 춤이라고 생각해요. 춤이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스스로춤은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핵심을 간직한 춤이며, 그러므로 모든 춤이 지향해야 하는 춤, 춤의 궁극, 최고의 춤이라고 생각합니다.

 



향후 ‘스스로춤‘이 어떤 형태로 무용계와 소통하길 원하시는지요?

스스로춤은 모든 무용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춤이라고 봅니다. 위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스스로춤은 샘이자 바다, 모든 춤이 유래하는 곳이자 모든 춤이 한 자리에 모여 대향연을 벌이는 춤이에요. 그것은 스스로춤이 만상을 관통하는 무형의 근원의 빛에 닿아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다른 형태의 모든 무용들에게 지향점을 제시하고 그들 고유의 각각의 위치와 한계를 명백히 해서 예술 본연의 사명 ―근원적으로 하나인 생명을 지향하고 구현하는 사명― 을 밝히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예술은 단지 병증의 표출인 데 그치는 경우도 있지요. 물론 병증이 병증임을 알면 그 병증에서 해방되는 첫걸음을 떼는 것이긴 하지만 중심을 향한 지향점이 없이는 그것은 끊임없는 병증들의 변주에 그치고 말게 될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모든 춤들의 고향이자 목적지로 중심이 되는 춤, 모든 춤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치유의 춤, 모두 함께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축성하는 '스스로춤'으로 답을 얻어 나아갔으면 합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한 예술가가 남긴 춤의 유산이 건강한 춤 문화 발전에 쓰여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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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선이 본 김기인의 춤세계

생명의 地上的 영원성에 헌신하는 춤

 



 김기인이 타계한 지 어언 3년. 생존해 있다면 지난 달 27일 환갑을 맞이했을 것이다.
 후배들에 의한 그녀의 춤 재안무와 제자들의 공연이 어우러지는 이번 3주기 행사를 앞두고 미진하게나마 그녀의 춤세계를 조망해본다.

 



 김기인의 춤은 대략 세 시기에서 네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제1기는 한국 현대무용 50년의 기반을 구축하고 성장시킨 육완순 선생님의 제자들로 구성된 초기 컨템퍼러리 무용단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시절, 즉 1970년대 후기에서 80년대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춤들로 대표되는 시기로, 이 춤들은 그 당시 발레가 고수해오던 전통적 몸의 언어의 고전적 문법의 틀을 깨고 몸을 주관적 표현의 극대화의 도구로 확장시키면서 춤계에 혁명적인 돌풍을 일으킨, 현대무용이라는 세계적 조류의 영향 하에 그 새로운 기법들을 토대로 환희와 고뇌가 교차하는 젊은 내면의 다양한 정서를 표현한 작품들이다.
 제2기는 그녀가 30대에 들어선 80년대 중기 작품들로 대변되는 시기로, 정치사회적으로도 암울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집안문제와 관련한 마음 아픈 시련 속에서 일종의 巫病이라고도 여겨질 수 있는 폐병을 앓게 되면서, 그녀는 첨단 현대무용의 기법들을 내면화한 가운데 무속이라는 한국적 전통과의 우연찮은 조우를 계기로 당시의 그녀에겐 새로운, 그러나 내면에서 이미 은밀히 싹을 틔우던 세계에 눈뜨면서 통상적 현대무용의 주류를 벗어나 자신 고유의 춤의 언어를 추구·구사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그녀의 작품들은 주관의 객관화, 내지 관념의 표출이라는 서구적 춤예술의 통상적인 행태를 지양하고 주관의 피안을 지향하기 시작한다. 이때 춤을 추는 주체는 춤을 통해 자신의 내면이나 사회적 문제성 등을 표현해내면서 세상과 교류하는 한 개인이나 사회의 일원이라기보다는, 바로 춤추는 자 자신을 있게 하고 그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는, 그 자신을 포함한 만유의 근거에 녹아든다.
 이렇듯 제1기가 해방된 몸의 언어를 통해 개인이나 다수 내지 집단의 주관적 내면을 표출하고자 하는, 서구와 미국 현대 무용예술의 대체적 흐름에 동참하는 일련의 작품이 기조를 이루는 시기였다면, 제2기는 그와 같은 방식의 주관성을 벗어나 생사와 주객 너머 우주자연을 관통하는 만유의 원천적 생명력을 내면화하면서 한국무속의 맥과도 닿아 있는 이 원천과의 합일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다양한 작품들을 시도하는 시기였다.
 합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84년 그녀가 안무한 하나(One)가 있다. 주관의 온갖 지껄임들은 숨을 죽이고 대우주의 흡인하는 생명력 속으로 모두가 하나되어 녹아든다. 이는 비유하자면 심장박동의 수축에 해당하는 생명의 한 계기이다.
 생명은 역동성이다. 하나는 여럿으로 하여 비로소 하나일 수 있다. 하나만이 있을 때 생명은 그 풍요로운 다양성을 개시할 수 없다. 하나가 있으면 여럿이 있고, 여럿이 하나로 역동적으로 포섭되면서 일체를 이룬다. 一卽多, 多卽一이요, 一卽一切, 一切卽一이다. 一로의 회귀는 필연적으로 多로의 확산을 부르고, 多로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一로의 회귀를 부른다.
 우주만유 일체를 상징하는 圓의 형상이 그녀의 춤에 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이 시기다. 중심에서 시작하여 퍼져나가 원을 그리며 회전하다가 다시 중심으로 회귀하는 일련의 작품들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만유에 깃든 생명력을 다양한 주제를 통해 보여주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주관의 시야에 갇힌 개체로서의 그녀가 죽고 만유의 근원과 일체가 된 상태에서 하나하나의 사물들과 소통하면서 그것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춤들이다. 그와 같은 변모의 궤적을 제3기로 이전하는 80년대 중기에서 후반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주관적 표현의 극대화로 치닫는 현대무용의 조류에서 벗어나 주관이라는 시야로 제한된 폐쇄적 능동성을 뒤로하고 주관의 내맡김을 지향하면서, 제3기를 여는 그녀의 예술혼은 주객의 이분법 너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와 일체가 되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춤과 함께 수동성의 극을 관통한 진정한 능동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주관의 숨죽임이라는 수동성의 극은 스스로(自) 그러함(然)이라는 자연의 자발적 능동성으로 전변되면서 無爲之爲를 체현한다. 이것은 動中靜으로부터 靜中動으로의 전변이다. 이 춤을 그녀는 ‘스스로춤’이라 명명한다.
 이와 함께 80년대 후반 그녀는 “김기인과 스스로춤 모임”이라는 소규모 무용단을 설립하고 매년 후배, 제자들을 이끌고 자신의 독무와 함께 일련의 앙상블 작품들을 선보이게 된다. 스스로춤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 시기 작품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로는 1988년의 <틈·터·틀><0의 길>을 비롯하여 1989년의 <씨앗><돔>, 1990년의 <든>, <무>, <온>, 1991년의 <건>, <곤>, <중>, <옴>, 1992년의 <자리>, <중>, <태>, 1993년의 <주>, <성>, <운명>, <유>, <여명>, <둥지>, 1994년의 <자유>, <모움>, <밈>, <지도>, 1995년의 <우리들>, <생명>, <모> 등이 있다.

 



 이렇듯 왕성한 작품활동과 함께 무용인으로서의 생애의 절정에 도달했던 1990년대 초·중반 그녀는 생의 극심한 시련기를 거치게 된다. 스스로춤 이후의 그녀의 예술의 멘토이자 동반자였던 한 사람으로부터 받게 되는 뼈아픈 상처와 이로 인한 이별은 그녀를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며 홀로서기의 혹독한 시련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이 시련은 그녀의 춤에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다.
 지금까지의 스스로춤은 우주만물을 존재케 하고 지탱하고 자양을 주고 성장시키는 생생력을 체화하면서 이를테면 우주자연의 영매로서 그 생동하는 생명의 기운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우주혼의 여사제의 모습을 구현하는, 생명의 地上的 영원성에 헌신하는 춤이었다. 이것이 “氣춤” 또는 생명 내지 날것의 의미가 깃들인 “생춤”이란 명칭에 어울리는 춤이었다면, 제4기에 해당하는 90년대 중·후반의 춤들은 현상계의 그 무성한 온갖 생명의 축제들을 뒤로하고 모든 현상 너머 현상의 본원인 여여한 마음밭에 발을 들이고 이를 일구는 영적 깨어남의 춤으로 이전된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1997년 몸을 사리지 않는 그녀 특유의 투혼을 불사르며 연습에 매진한 끝에 거의 서있을 수조차도 없이 혹사당한 무릎에 침을 맞아가며 기적적으로 공연을 마칠 수 있었던 <마음의 빛>을 비롯하여 1998년의 <피안노정>, “高銀 詩의 밤” 행사의 찬조출연작 <돌아오는 길>, 1999년의 <대화>를 거쳐 2002년 “羅”, “결결如如”에 이르기까지 명상의 춤, 구도의 춤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일련의 춤이 이 시기를 거치며 거듭난 그녀의 예술혼이 토해낸 작품들이다.
 그녀가 독자적으로 추구한 춤의 언어가 서구적 현대무용의 그것과 대비되는 점은 그녀의 춤이 주관적 관념의 外化가 아니라 오히려 주관의 소리를 잠재우고 우주자연의 생명력이 되었든, 신성 내지 불성이 되었든 만유의 근거로 녹아들어가면서 그 근거가 작용하는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는 마음가짐을 전제한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중·후반 이후 그녀는 어떤 “경지”에 들어섰다고 평가될 수 있는 춤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녀는 후일 제3기의 작품들에 언급하면서 무대 위에서의 절정의 몰아체험에 대해 말하곤 했는데, 이때 그녀는, 마치 무당이 접신된 혼령의 영매이듯, 우주적 동력, 생명의 원천과 하나된 우주원리의 영매였다고 할 수 있다. 춤추는 자는 흐름 속으로 녹아들어 주관이 침묵하는 가운데 몰아지경에 이르고, 이와 동시에 ‘그것’ 자체가 춤추는 자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춤추는 자로 하여금 춤추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성을 간직한 한 인격체로서의 예술가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예술가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의 반납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술이 예술인 소이연은 바로 예술이 예술이기를 멈추는 곳에 있고, 예술가가 예술가인 소이연은 예술가가 예술가이기를 그만 두는 곳, 개성을 간직한 한 개인으로서의 예술가가 죽고 우주혼과, 신성과 하나되어 그것의 영매가 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1 마치 에고의 무명으로 속박된 小我가 죽어서야 大我의 탄생이 이루어지고, 원죄에 속박된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예수께 귀의할 때 신성에 충만한 내 안의 예수를 잉태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김기인의 춤은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즉 예술을 통해 예술이 자신의 존재근거로 무화하면서 그 존재의미를 완성하는 것을 보여주는 경계선상에 위치한 예술, 일종의 메타예술의 구현이라고도 보여진다. 실상 예술은 엄밀한 의미에서 메타예술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예술은, 그것이 제아무리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해도, 다만 방황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끝없이 이어지는 넋두리 내지는 현란한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어떤 문제나 상념의 객관화를 통해 기존의 틀을 인식하면서 벗어나게 하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혹은 숭고하거나 진취적인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면서 삶을 고양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주관의 숨통이 끊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다만 하나의 상념 대신 다른 상념을 불러들이면서 끝내 상념의 유희에 머물게 할 뿐인 영원한 쳇바퀴놀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후기의 왕성한 활동을 얼마간 뒤로했던 시기, 90년대 중반 언제부턴가 그녀는 입버릇처럼 나는 이제 춤의 업을 다해 마쳤다, 원 없이 춤을 추었으니 춤에 관한 한 여한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더 이상 춤을 추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는 것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을 바친 자의 평온과 함께 허탈함이 전해오기도 하는 말들이었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 남다른 열정으로 온몸을 던져 춤에 바치고 이제 기운이 소진해가는 한 춤꾼의 절규였을까? 아니면 그것은 춤이라는 예술이 제시하는 길을 끝까지 간 영혼이 예술가적 삶의 방식에서 탈피하면서 예술에 고하는 은밀한 작별의 말이었을까? 아마도 이제 그녀에겐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춤이 되어야 할 차례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무언가를 구하던 예술이 그 소임을 완수하고 이젠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시점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실상 제4기 이후 그녀의 작품활동의 일정 부분이 무대 밖에서 이루어진다. 그녀의 춤이 대략 제4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90년대 중반 즈음부터 타계할 때까지 그녀는 아리랑연합회 및 한국문학평화포럼과 연관을 가지고 전국 각지를 돌며 해마다 거행되는 이들 단체의 행사의 현장에서 제자들과 함께 춤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다만 이들 단체와 관련된 몇몇 인물들과의 친분으로 인한 우연한 행보였을까? 아니면 그녀가 걸어온 예술의 길이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녀를 새로운 소통의 장으로 인도했던 것일까? 어쨌든 그렇게 그녀의 춤은 종종 무대를 떠나 사회현실적 삶과 역사의 현장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렇다고 그녀가 춤을 통해 위 두 단체와 연관된 그 어떤 이념이나 가치관의 기치를 내걸게 된 것은 아니다. 그녀가 생애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상당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이 두 단체의 노선이나 색갈이 어떤 면에서 대립되는 성향을 보여준다는 점은 그 어떤 이념이나 가치관과도 무관하게 그 모든 것들 너머 작용하는 우주적 영적 원천의 힘에 뿌리를 내린 기반 위에서 세상과 교류하는 그녀 특유의 무심함을 보여준다.
 나이 50을 훌쩍 넘기도록 독신이었던 그녀는 늘 결혼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58세가 되면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예언을 늘 들었다고 거듭 말하면서 기대에 부풀곤 했다. 그러던 그녀가 55세 즈음 결혼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 예측이 조금 빗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나이로 바로 58세 되던 해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결국 이것이 그녀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외로움 속에서 평생 꿈꾸던 결혼이었을까?
 우주만유를 품고 자양하는 지모신의 여사제로 지상적 풍요로움과 무성함의 영원을 구가하며 춤추던 시기를 뒤로하고 생의 한 큰 시련기를 거치며 그 모든 것의 근원적 무상함을 사무치면서 그녀는 형상 너머 형상을 있게 하는 무형의 빛 속으로 잠겨든다. 그렇게 제3기 춤의 지상적 수평적 여성적 영원이 영적 수직적 영원과 교차하는 가운데 제4기의 작품들이 탄생한다. 그리고 수평과 수직의 교차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의 온전성의 빛 속에서 매 순간 죽고 새로이 태어나면서 그 자체로 축성된다. 이러한 그녀의 춤의 궤적은 58세에 이르러 이루어진 결혼, 그녀가 은밀히 꿈꾸던 하늘과의 결혼에 대한 준비이자 예고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90년대 말 그녀는 조사선 설법도량에 발을 들여놓는다. 스승은 그녀에게 그녀 자신의 무명으로 인해 스스로 갇히게 된 외로움의 감옥을 부수고 하늘에서 유희하는 구름처럼 진정한 독존의 자유로 비상하라는 뜻으로 孤雲이라는 법명을 준다.
 그녀가 예술을 통해 도달했던 합일의 체험은 다만 무대 위의 것이었다. 삶의 매순간 합일을 살아가는 일은, 생의 현장을 누비며 삶과 교감하는 그녀의 이러저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요원한 일이었다. 그것은 의식의 근본적인 전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예술의 길을 떠나 영의 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그녀는 서성였다. 그 즈음 무용인으로서의 명성의 절정에서 무대를 떠나 미얀마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승려가 되어 돌아온, 그녀와는 한 동안 동료로서 막역한 사이이기도 했던 강송원의 삶의 모습은 더욱더 그녀를 부추겼다. 그 이후로부터 타계하기까지 10년여를 그녀는 그런 서성임의 상태에서 보냈다. 그녀가 실존의 영적인 갈증을 해소하고 거듭난 모습으로 다시 춤의 세계로 회귀하기까지에는 아마 단 몇 년의 세월만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타계한 지 3년, 이제 그녀는 저세상에서 환갑을 맞이했다. 춤을 추면서는 몇 번이고 그리고 또 그렸던 圓, 그러면서 아직 이생의 나이로는 마무리하지 못한 圓이 이곳 너머 저곳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녀가 지금 이곳에 있어 춤을 춘다면 어떤 춤을 출까? 그 춤은 하나(one)로의 합일을 이루고 圓으로 퍼져나가면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내면에 깃든 춤을 일깨우고자 하는 願을 담은 춤이 아닐까?

 


모든 것은 스스로 존엄하고 아름답고 생명에 넘치는 축복.
그 모든 문명과 문화의 굴레와 틀이며
때로는 빛으로 찬란하고 때로는 암울하고 잔인한 삶의 온갖 모습들은
다만 생성과 소멸, 창조와 파괴,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유전하는
생명의 유희라는 끊이지 않는 우주적 춤의 의상일 뿐,
언젠가 거기 그곳은 바로 지금 여기 춤의 원향,
끊임없는 찰나멸을 투과하여 춤이 일어나는 곳.
그곳에 발 디디고 네 안의 춤이 살아나게 하라.
존재를 축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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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禪의 역설적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은 예술이 아님으로 하여 예술이고,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님으로 하여 예술가다.

* 2013 춤사랑 열린마당 팸플릿 게재 

2015. 10.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