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아키타 현지취재_ Odoru. Akita(2) 다이라쿠다칸 부토무용단
충격적이고 육감적인, 그리고 폭력적인
남정호_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이시이 바쿠와 히지카타 타츠미의 고향인 아키타에서 올해 처음으로 개최한 국제 무용제 ‘오도루 아키타’(춤추는 아키타)의 마지막 공연은 다이라쿠다칸 부토무용단의 〈무시노 호시〉(곤충의 별)가 장식했다.
 나는 80년대 초반 파리에서 다나카 민의 솔로를 보고 이 특별한 춤, 부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오노 가츠오, 산카이 주쿠, 코 무로부시의 부토공연을 꾸준하게 보아왔지만 다이라쿠다칸의 공연은 마츠리를 보는 듯한 집단적 광폭함의 기세에 질려 좀 피해 온 것은 사실이다.
 작년에 동경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에서 본 〈파라다이스〉의 산만함에 좀 당황한 입장에서 이번 작품에는 별다른 기대 없이 관람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 최첨단 현대예술의 전시장과 같은 동경에서 보는 부토와 부토의 창시자 히지카타 타츠미를 탄생시킨 아키타에서 보는 부토는 다르다. 극장도 다르고 관객도 다르고 아마 춤추는 이들의 마음도 호흡도 다를 것이니 다르게 느낄 수밖에.
 낯설고 기괴한 부토가 담백하고 순박한 동북지방의 정서와 어울려서 민속적 향취를 품어내며 친근하게 다가 왔으니 공연예술은 공연현장에서 완성이 된다는 믿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다이라쿠다칸(大駱駝艦)’은 ‘큰 낙타함선’이라는 뜻이다. 무용단 이름에 최면에 걸렸는지 이 무용단의 공연을 보면 내내 곳곳에서 옮겨 다니는 거대한 배-낙타에 탄 많은 유목민들의 행렬을 연상하게 된다.
 아키타의 관객들은 매년 방문하는 이 무용단의 공연을 매번 보면서 같은 그림을 다시 보아도 지루하지 않은 것처럼 볼 때마다 계속 친근함과 새로움을 주는 살아있는 공연예술의 매력을 알아차린 것 같다.
 다이라쿠다칸 배에 탄 이들은 무용수라기보다 크루로 간주해야할 것 같다. 그들은 일꾼 못지않게 직접 세트도 세우고 의상도 제작하고 서로의 몸에 칠도 해주는 호흡이 잘 맞는 특별한 가족집단들이며 그들이 춤 출 때는 개별성보다는 광기어린 그 무엇인가를 함께 이루는 힘이 있어 볼 때마다 과거의 작품들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
 이 무용단의 대표이며 이 작품을 연출하고 안무한 마로 아카치(麿 赤兒)는 일본에서는 배우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마력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로 아카치가 소녀복색을 하고 무대중앙 앞에 솟아나온 작은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든 그림 같은 자세로 이 작품이 시작된다. 시선을 들어 저 멀리 객석너머 하늘을 보는 소녀. 73세의 남자가 해 맑고 낭만적인 눈을 가진 소녀가 되어 하늘의 별을 보고 꿈을 꾸고 싶은 것일까? 이 모순된 상황이 황당하면서도 공감이 간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바쇼[1644~94]라는 이름을 가진 17세기 하이쿠의 명인을 암시하는 삿갓을 쓴 나그네가 화자로 등장한다. 방랑 시인, 나그네 시인은 간간히 하이쿠 속의 단어들을 불러낸다.
 ‘조용한 여름에 바위에 젖어드는 매미의 소리.’
 이런 멋진 하이쿠를 음미하는 태도로 이 작품을 보면 안무자 마로 아카지가 추구하는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모습, 불교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무대에는 몇 개의 방과 같은 공간이 나누어지는데 그곳에서는 곤충들의 교배를 보는 일차적 감상으로부터 그 장면과 교차되는 인간세계의 풍경을 불러일으키게도 되는데 희한하게도 이렇듯 육감적 장면에도 남녀유별에 대한 내숭을 감지한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알 몸 같은 전신에 은색 칠을 한 무용수 24명의 몸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여름 벌레 중 어떤 종류를 닮았으면서도 독자적이다. 이들은 몸에서 빛을 발하며 나르는 반디 불처럼 또는 깜깜한 밤에 낮게 떠다니는 별처럼 무리를 지어 배회한다. 이 별들에 홀려 따라 가다보면 내가 별이 된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몸의 중심을 낮춘 부토의 미학에 끌린 나에게는 무용수들, 특히 남자무용수들의 다리가 너무 길다는 것에 불만이 생긴다. 안타깝게도 과거보다 몸의 중심이 땅에서 멀어졌다고 할까.
 마로는 마지막에 무대에 혼자 남는다. 〈파라다이스〉 때도 그랬고 또 다른 작품에서도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 본인이 시작했으니 본인이 마무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인가.
 그리고 언제나처럼 화려한 커튼콜이 있다. 수차례 연이어 이어지는 이 인사는 그 전에 있었던 충격적 장면을 뒤집어 버린다. 이 장면은 철저하게 관객을 여흥적으로 만족시키기에 손색이 없다. 상투적이지만 구조가 잘 짜여 있어 여기에 초대받은 관객은 박수를 거절할 수 없다. 그러다보면 엉겁결에 혼이 빠져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부토의 창시자 히치카타 타츠미와 오노 가츠오가 세상을 떠났고 코 무로부시도 객사했다. 산카이 주쿠의 우시오 아마가츠, 다나카 민, 카사이 아키라는 단체를 거두는 것보다 거의 혼자서 개별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이런 중에 다이라쿠다칸이라는 단체가 몇 십 년 전처럼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놀랄만하다. 거기에는 대가족의 가장노릇을 감당하는 마로 아까치의 관대한 인간적 풍모가 있다.
 부토는 구경거리로서의 모든 흥미로운 요소를 갖고 있다. 그로테스크하고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고 육감적이고 폭력적이다. 이런 외향을 가지고 있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정신적이고 허무적이고 따라서 신비하다.
 부토평론가 이찌가와 미야비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탈근대라면 부토는 전 근대의 환류이고 동양적인 심신 일원론을 기반으로 하였다”고 말했다.
 서양의 형태로부터의 일본적 반항!
 반세기 전에 세계의 예술계에 홀연히 나타나서 소수파의 감각으로 놀라운 반향을 일으킨 그 힘의 원천을 더 알고 싶고, 더 자주 만나고 싶다. 

2016. 12.
사진제공_'Odoru. Akita’ Intenational Dance Festival 201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