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외선 탄생 100주년 기념공연 출연 남정호
“무용가가 되기 전에 우선 참된 인간이 되도록”





어머니의 세상
      
             -마종기-
1
낮잠 드신 어머니의 침상 옆에 앉으니
많이 늙으셨어도 아직 고운 모습이신데
몽롱하게 잠에서 깨어 나를 올려다 보시더니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셨는지
여보오, 참 오랜만이네요, 하신다.
어디 감추어두셨던 부끄러운 목소리,
내 얼굴 조심해 만지시며 여보오, 여기까지....
희미한 미소가 마른 목을 메이게 한다.
어머니는 어디를 헤매며 사시는 것인지,
제발 그 길만은 평탄하고 아름답기를.
2
결국 하나씩 놓는 것이군요, 어머니.
멋도 예술도 인연도 하나씩 놓으시고
후회 없이 날아갈 준비를 하시는 건지,
빈 손과 빈 뼈를 털며 가벼워지시는군요.
간편하게 일어나실 준비도 끝나셨는지
맑은 날의 푸른 허공만 만지시네요.
이승의 모든 벚꽃이 꽃잎을 날립니다.
당신이 남기신 시야가 내 앞길이 됩니다.
외로운 밤 다 땅에 내리시고, 어머니
오랜 기다림 끝내시고 일어나세요.


수요일 수업을 마치고 처음으로 남정호 교수님 연구실을 찾았다. 언제부턴가 공연장에서 뵐 때마다 공연에 대한 가벼운 코멘트를 교환하게 되었지만, 사실 전공도 같은 13년 위의 대학 선배님이셨다는 걸 체감하지 못하고 한 편안한 행동이었던 듯싶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이화여대 무용과를 기억하며 박외선 선생님(1915-2011)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방금 수업을 마치고 나오셔서 아직 바람이 묻은 모습이지만 반갑게 맞으신다. 그리고 앉아마자 마종기 시인의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에서 이 시를 펼쳐 주신다.

남정호 : 참 좋지요? 시인의 어머니이신 박외선 선생님에 관한 시라 더 깊이 와 닿습니다.
이지현 : 네, 어머니에 대한 참 따뜻한 마음이 녹아 있는 시네요. 노후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도 하고요. 마종기 시인과는 친분이 있으셨나 보죠?
: 2011년 96세로 미국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당시 제자들이 당신을 기리기 위해 파주 출판단지에 시인의 특강이 있어서 모였는데 그 때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마종기 시인께서 올해가 100세라고 하셨고 제자들이 기념잔치라도 하자했던 것이 어느 덧 시간이 흘러 이번 행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네요. 동기인 부산대 정귀인교수와 제가 선생님 작품을 재구성, 재안무를 맡아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 제자들이 돌아가신 스승님을 기억하며 선생님의 유작을 올리는 공연이 흔치 않아 더욱 뜻 깊어 보입니다.
: 박외선 선생님의 공연은 좀 각별합니다. 74년 12월 제가 대학 4학년 때 올렸던 <박외선 현대무용 공연>(1974년 12월 21일 국립극장)은 1935년 해방 전 일본청년공관에서 올린 공연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선생님이 올린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 한 번의 공연이었습니다. 그해 봄에 캐스팅이 되었고 여름부터 본격적인 공연연습이 시작되었는데, 1, 2부로 나뉘어 돌아가신 부군을 기리는 <고별>과 김수영의 시 ‘풀’이 낭송되는 장면이 중심인 <대지의 무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번 기념공연에서는 이화여대 신상미 교수와 무용학연구소가 준비한 영상과 선생님의 두 작품의 일부를 재연할 예정이며, 마지막으로 선생님으로부터 무용을 배운 제자들이 육완순 선생님부터 모두 출연해서 선생님의 춤을 기억하면서 추는 ‘열린 즉흥’(총감독 하정애, 총연출 미나유)도 있을 예정입니다.

 



: 공연연습을 거의 4계절을 하신 건데,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겠네요.
: 돌아가신 후 제가 쓴 글(2011년 10월호 몸지)에도 담겨있는데, 선생님께서 업적을 위해 공연을 자주하시는 스타일이 아니셨고, 본인의 글(1971년 문예진흥원 발행 ‘무용’지 수록)에도 나타나는 것처럼 교육에 더 많은 힘을 기울이신 분이셨죠. 또 조용하고 신중하고 까다로운 스타일이라 공연에 공을 많이 들이셨어요. 방과 후와 주말에도 연습을 하다 보니 지방 학생들은 기숙사 저녁을 놓치기 일쑤였고, 한창 나이에 주말 개인시간을 가질 수 없는 걸 많이 힘들어 했었죠. 어쩌다 그런 친구들의 뜻을 모아 제가 대표로 가서 불만을 말씀드렸는데 그때 제가 “사생활도 없고...”이런 표현을 썼나 봐요. 그 담에 두고두고 저를 부르실 때 “사생활”하고 놀리면서 부르셨어요. (웃음)

: 팜플렛을 아직 간직하고 계시네요. 몇몇 선생님들의 젊고 예쁜 20대 모습이 있습니다. 수록된 사진을 보니 그냥 시간에 쫓겨 만드신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에요. 장면사진도 연습이 오래되고 준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엔 어땠나요?
: 4월부터 연습이 시작됐는데 진도는 그렇게 잘 나가지 않았어요. 동작 하나 가지고 오랫동안 이리저리 해보시면서 오래 숙고하셨지요. 어떤 날은 진도가 하나도 못나간 날도 있구요. 귀한 공연을 하다보니까 최고의 퀼리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사진에도 있지만 이운철, 서진은 선생님이 <고별>에서 박외선 선생님 부부의 사랑을 표현하셨어요. 그 듀엣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어린 저희들이 보기에도 그 듀엣은 참 볼 때 마다 좋았던 것 같아요. 발레 말고 현대무용으로 남녀 듀엣은 처음 봤는데, 그것도 아다지오 듀엣이라 침을 꼴깍 삼키면서 황홀하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두 분이 참 잘 하셨고요. 돌아가신 부군에 대한 정이 담긴 작품이라 더 진한 감정을 담으셔서 그랬을 수 도 있구요.
마종기 시인의 친구셨던 김영태 시인께서 자주 오셔서 김수영의 시 ‘풀’도 낭송도 봐주시고 작품에 대한 의견도 많이 나누셨어요. 작품 음악도 그 당시에 비해 수준이 높으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어렵지 않은 음악이었어요. 비틀즈의 ‘헤이 쥬드’를 썼으니까요. 아주 젊은 감각이었죠.
팜플렛에 나와 있듯이 조동화 선생께서 축사를 써주시고, 김경옥 평론가가 리뷰도 써주셨죠. 저는 공연을 통해 참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한 거 같아요. 많은 스타일의 춤을 경험하기도 했고, 선생님의 몇 십년간 응집된 것을 담아내는 작품이다 보니 그 경험이 더 진하게 남네요.

 



: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박선생님의 국내 유일한 공연이었네요.
: 네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었죠. 본인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학생들과 학교에서 하는 공연은 하셨지만 개인공연은 유일한 공연이라고...

: 당시 이화여대 교수면 상당한 지위와 주목을 받는 자리였을 텐데 그렇게 굵고 짧은 공연활동을 하신 것이 드문 경우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경쟁사회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좀 상상이 안되는데요. 요즘은 채 익지도 않은 공연을 급하게 올리는 것에 비교해보면 1년 가까운 연습시간과 안무가의 충분한 숙고과정, 무용수들이 학생이긴 합니다만 작품에 자신을 충분히 담고 경험하는 것들이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할 것들이 아닌가 싶네요.
: 네 그렇죠.

: 작품 경험도 얘기해 주시죠.
: <고별>은 지상과 천상에 대한 묘사를 흰색과 검은색 의상으로 나누어 장면을 표현하신 좀 무거운 작품이었고, <대지의 무리들> 중 ‘풀’은 좀 가벼운 작품이었어요. 풀처럼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움직임을 반복했는데 이상한 쾌감이 있었어요. 무겁지 않고 상당히 즐거운 기분이 드는 작품이었죠. 황홀했던 느낌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이번 공연에서도 ‘풀’은 제가 하고, <고별>은 정교수가 하는 데 정귀인 교수와 저의 개인적인 성향하고도 잘 맞는 선택인 듯 하네요.

 



: 이번 공연에서는 일부만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음악은 어떻게 사용하시나요?
: 당시에 <풀>은 시 낭송만으로 음악없이 공연되었어요. 이번에는 현재의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제가 대학 4학년때 좋아했던 노스탈지아가 있는 재즈음악을 사용합니다. 물론 시도 낭송하구요. 당시에는 여자 8명의 작품이었는데 이번에는 남자 무용수 4명과 여자 무용수 4명이 출연합니다.

: 연습 분위기는 어땠나요?
: 연습할 때는 수업할 때도 그랬지만 긴장이나 스트레스가 많지 않았어요. 추는 사람의 감정을 편안하게 해주시고 그에 따른 동작의 느낌을 인정해 주셨어요. 제가 발레에서 전공을 옮기면서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 문하에서의 무용생활이 전반적으로 자유롭고, 개인의 느낌과 감정을 존중해주시는 분위기에다가 테크닉이나 훈련에 대해서 그것만 분리해서 기계적으로 연습을 강요하신 적이 없어서였던 거 같아요. 그런 경험이 유학 가서나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저의 춤에 대한 기본 태도에 영향을 미친 거 같습니다.

 



: 제가 82학번이니까 박선생님이 퇴직을 하신지 5년 뒤에 대학을 들어갔네요. 시간상으로는 짧은 기간인데 왠지 굉장히 옛날 얘기를 듣는 듯 많이 다른 걸 느낍니다. 저희는 자유롭게 춤을 탐색했다기 보다는 마사 그라함 테크닉을 중심으로 기능인이 되기 위해 목표 지향적으로 살았던 거 같아요. 좀 씩씩하게 살았지요. 새벽 레슨이 필수였구요. 그러다 보니 정신적인 자유 같은 건 가치를 가질 수 없었고, 자유보다는 틀에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니 당연히 자유, 예술, 인문학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죠. 그걸 가르쳐 주는 선생님도 없었고요. 저는 그것이 대학생활 내내 고민이었습니다. 대학교육이 교육이라 하기에는 다양함과 깊이가 너무 빈약했고, 예술이라 하기에는 멋과 품위가 없었죠. 어쨌든 80년대 보다는 70년대가 훨씬 부드럽고 낭만적이고 예술적인 시대였던 거 같네요. 수업 내용은 어떤 것이었나요?
: 그것도 참 재미있어요. 선생님은 패션감각이 남다르셨는데 아주 예쁘게 입으시고, 화장을 곱게 하시고 준비된 모습으로 그날의 날씨, 기분을 고려하신 주제와 느낌을 가지고 수업을 하셨어요. 나의 감성도 덩달아 숨을 쉬고 드러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죠. 동작을 반복하기보다는 variation 위주의 자유로운 즉흥수업 같은 것이었죠. 대단한 걸 하진 않았지만 춤을 즐겼던 기억이 납니다. 본인의 스타일이나 테크닉을 전수한다기 보다는 다양한 움직임을 맛보게 하셨죠. 거기에 선생님의 춤에 대한 철학이 담긴 것이 아닐까 싶어요. 당시 다른 교수님들이 매년 공연을 하셨는데 선생님께서는 개인공연을 안하셨으니까 상대적으로 저희들은 시간 여유가 많았죠. 그래서 저는 프랑스문화원에 가서 영화도 많이 보고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 박선생님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연구가 된 것이 아니어서 저희는 책에서 간단하고 건조한 내용들을 접한 것 밖에 없는데요. 박선생님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주시죠.
: 선생님은 초등학교 때부터 무용, 글쓰기, 도화에 재능을 보이셨다고 해요. 마산여고 3학년 때 최승희 공연에 감명을 받아 그녀의 단성사 공연에 출연하시고 31년 최승희의 권유로 일본으로 건너가셨어요. 그 후에 타카다 세이코 무용단의 무용수 활동을 하시는데, 타카다 세이코는 석정막과는 달리 미국에서 이태리 발레를 배운 후 도리스 험프리, 테드 쇼운 등으로부터 현대무용을 배웁니다. 그 후 독일에 가서 라반이나 뷔그만을 만나기도 했다고 해요. 타카다 세이코 무용단에서 오래 활동을 하셔서인지 발레에 기본을 둔 현대무용이 선생님 춤의 기반이 되었죠. 53년 이화여대 체육과에서 강의를 시작하셨을 때 발레수업을 맡으셨고 그 후 62년 동경 현대무용 강습회에서 마사 그레이엄 기본 테크닉을 배우고 63년 무용과가 생기면서(김활란 총장을 설득하여 국내 최초 무용과 신설을 주도함) 현대무용 교육을 최초로 시작하셨지요. 그 후에는 매년 외국에 나가 현대무용의 새로운 흐름을 배워 오셔서 학생들에게 설명해주시고 가르쳐 주셨어요.

: 무용사 공부할 때 중요하게 나오는 1963년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에 무용과 설립과 발전이 박선생님의 노고가 묻어 있는 부분이었군요. 그럼 53년부터 이대에서 강사를 하시고 77년까지 24년간 이대 무용과에서 재직을 하셨네요. 학교에서 가까이 서 뵌 박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 선생님께 원고 청탁이 많이 들어 왔었어요. 원고를 정리하는 걸 제가 많이 해드렸는데 문장력도 뛰어 나셨어요. ‘무용가가 되기 전에 참 인간이 되자’라는 원고를 정리해 드린 적이 있는데 선생님의 첫 강의시간에 칠판에 크게 ‘무용가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자’라고 쓰신 것이 기억이 나서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어른이 아니라는 믿음이 생겼던 기억이 납니다. ‘폭넓은 교양’과 ‘겸손한 마음’을 강조하셨죠. 무용을 기술로만 보고 써먹으려는 사람은 기계에 불과하다고 경계 하셨어요. 무용은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기에 먼저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어요. 아직도 그 문장이 제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선생님의 교육은 성공하신거지요. 또 학생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셔서인지 그렇게 다감하게 표현을 하시는 건 아니셨지만 선생님이 학교에 계시면 뭔가 마음이 든든했어요. 지방사는 학생들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의 어려움에 대해 잘 들어주시고 해결해주시고 그러셨죠.

 



: 박선생님이 정념퇴임을 3년 앞두고 1977년 퇴직을 하면서 퇴직금을 무용과에 기부하시고 미국으로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 부군이 68년 돌아가시고 학생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대학생활도 그 흐름 속에 있는 거구요. 가족이 모두 미국에 계셨고 연세가 있으신데다가 한국에 혼자 계시면서 외롭고 적적하셨을 거예요. 마종기 시인이 미국에 들어오시라고 여러 차례 부르셨다고 합니다. 모든 거 다 놓고 들어오시라고 하셨다는 얘기도 있구요. 선생님도 평생 그렇게 넉넉한 생활을 한 게 아니셨고, 본인이 가장역할을 해야 하는 시간도 길었는데 이화여대 무용과에 전액을 쾌척하셨고, ‘박외선 장학금’으로 IMF때까지 무용과 학생들에게 수여되어 다 사용됐다고 합니다.

: 그런 행동도 참 다르시네요. 무용인 모두 본받아야 할 행동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이후에 교류는 하셨나요?
: 저 하고는 남달리 개인적 인연이 많았어요. 1992년 UCLA에 객원교수로 가 있었는데 그때 마침 선생님께서도 LA에 계셨고, 같은 동네에 사시는 선생님을 모시고 한 학기동안 매주 미사를 함께 보러 다니고 저희 부부와 식사도 함께 하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지요. 천주교인이고, 문학을 좋아하셔서인지 저와는 각별한 공감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에 자주 뵐 기회는 없었는데 갑자기 부고 소식을 듣고는 많이 아쉬웠지요.

: 현재의 저희와 멀지 않은 시간임에도 많은 단절이 있어서인지 박외선 선생님을 기억하는 이번 공연에 많은 기대가 됩니다. 과장된 포장이나 영웅화 없는 담백한 접근으로 보여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번 공연 제목이 “참 인간, 참 춤”인데요.
: 네, 앞에 말씀드린 대로 박선생님이 주신 가르침을 기억해 보니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무용가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도 담아보려고 했고요.

 



: 요즘 아카이브 공연이나 춤인생 기념공연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 오히려 팩트를 위협할 정도로 주관적이고 관점 없이 소란스럽기만 하죠. 제대로 된 역사인식은 현재에 새롭게 영향을 미치는 역사 감각을 깨우기 마련인데 무용계의 역사인식에는 많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무용창작을 해서 그런지 역사도 창작하려는 경향도 강하구요. 그런 상황에서 좋은 뜻으로 만들어진 반가운 공연이라 많은 기대가 됩니다. 자신의 계보를 만들기 보다는 학생 개인의 발전을 더 중시했던 교수님이셨던 박외선 성생님을 기억하며 마음에서 잔잔한 울림으로 남는 그런 공연이 되길 바라구요. 이 공연을 계기로 박외선 선생님에 대한 연구와 조망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으면 합니다. 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