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계소식

참으로 털어놓기 쉽지 않으셨을텐데…
정병호 선생님을 추모하며
2011.8.1



고 정병호 교수

선생님께서 거주하시던 대치동 미도아파트는 회사가 있던 서대문구 충정로에서는 꽤 멀었다. 기자로 몸담고 있던 <객석>에 게재될 원고를 받기 위해, 재학 중이던 대학원 석사 논문을 위해, 또 춤비평가들의 글을 모은 <춤저널>의 편집을 의논하기 위해 난 자주 선생님 댁을 방문했었다.

나를 만나면 선생님은 으레 최승희 이야기부터 꺼냈다. 최승희를 연구하는 것 자체를 무척이나 즐기는 듯보였다. 며칠 전 꿈속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얘기를 할때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학창 시절 부모님 몰래 쌀을 팔아 보았다던 최승희 공연, 그녀의 춤추는 모습을 이야기하며 스스로 흥분했고, 최승희는 절대 담배를 안피웠다(후에 중국 제자들의 증언에 의해 이것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며 그녀의 사생활에 관해서도 이것저것 많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한참 후에 최승희 연구와 관련, 내가 국내 연구진들이 그녀의 모든 것을 지나치게 신화시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했을 때 그 대상에는 선생님도 포함되었었다.

2002년 최승희탄생 90주년 축제를 기획했을 때 몽골과 중국에 있던 제자들과 미국에서 최승희를 연구하는 학자가 내한, 증언과 발표를 통해 최승희의 또 다른 면모들이 밝혀졌을 때 선생님은 새로운 사실에 적지 않게 당황해 하셨다.

2001년 중국 연변대학에서 있었던 최승희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가했을 때 선생님은 최승희를 연구하는 한국의 대표 학자로, 당당히 학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만찬이 끝날 때 쯤 여러 차례의 술잔이 오간 뒤 분위기가 무르익자 선생님은 즉석에서 흥에 겨워 춤을 추셨다. 그날 노학자의 독무 공연은 금세 판을 휘잡아 버렸다. 기자가 수년간 지켜본 무용학자 정병호의 일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날 본 선생님은 여지없는 무용가였다. 그후 지방에서 있었던 춤 비평가들의 심포지움 뒷풀이 모임에서도 선생님은 한번 더 그 춤을 보여주셨다. 저 끼를 어찌 누르며 살아오셨을까?

선생님은 나에게 가끔 당신의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중에는 무형문화재 보유자 지정에 관한 것도 있었다. 보유자로 지정해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지정한 일, 보유대상 종목에 지정하기는 턱없이 자료가 부족한데도 지정한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그 내막을 토로했다. 선생님은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 종목과 보유자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선심성 공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라며…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에 대한 괴로운 심정을 고해성사하듯 토로했다.

오랫동안 한국의 춤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무용 전문지에 대해서도 섭섭한 감정, 잘못된 행태에 대해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제자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생색내기 위한, 자신이 연구한 자료를 더 탐내 하는 진정성이 결여된, 얄팍한 제자들의 속내도 선생은 훤히 뚫고 계셨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자신의 저서 <농악>을 출간 했을 때 가장 즐거워했던 것 같다. 성취감으로 가득했던 얼굴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은 자신이 연구하고 수집한 자료에 대해서는 엄청난 집착과 자부심으로 가득찬 깐깐한 학자였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며, 속죄하려했던 인간적인 면모의 소유자였다.

투병 중이시던 재작년 12월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처음에는 엉뚱한 말만 하시더니 이제 가야한다며 작별 인사를 하자 눈물을 보였었다.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아 보신건가….”

그렇게 춤과 한평생을 살아온 학자의 말년을 보고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를 생각했다. 가뜩이나 존경할 만한 원로가 없는 우리 춤계에 선생님은 또 어떻게 기록되고 기억될까?

하늘나라에서는 선생님께서 그리도 사모했던 최승희와 재회, 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고 정병호 교수를 추념하는 뜻에서
춤웹진에서는 이번 호 심층기획 란에
관련 기사 3가지를 게재하였다- 편집자)

2011.8.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