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추모기획_ 한국에서 15년, 프랑스 무용가 셀린 바케
스스로 여행자로 불리기 원했던 독립예술가
장광열_춤비평가

 대한민국과 그곳의 춤과 무용가들을 사랑했던 푸른 눈의 순수예술가. 서울은 물론이고 부산 제주 등 대한민국 곳곳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태생의 무용가 셀린 바케가 지난 5월 갑자기 타계했다.
 유명을 달리하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제주국제즉흥춤축제에서 국내외 무용수들과 함께 춤추었고, 뒤풀이 자리에서도 옥돔구이 등 제주음식을 즐기며 프랑스와 한국의 아티스트들과 수다를 떨던 모습. 이튿날 아침 일찍 호텔 앞 바닷가에서 “이제 버스를 타고 거주하고 있는 우도 쪽으로 갈 것”이라던, “며칠 있다가는 워크숍을 위해 타이완으로 떠날 것”이라며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어깨에 올리며 환하게 웃던 그 모습이 너무도 생생했기에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은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셀린의 타계 소식을 들은 지인들 역시 “믿기지 않는다”, “며칠째 멘붕 상태에 빠져 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라며 하나같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셀린의 한국에서의 춤 활동은 전방위적이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춤을 배웠고 즉흥을 중심으로 공연과 워크숍 등을 활발하게 펼쳤다. 무용수이자 교육자 그리고 안무가로서 셀린은 국내 뿐 아니라 캄보디아 타이완 일본 홍콩 등 아시아권 무용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네트워킹을 쌓았고, 그런 네트워킹을 한국의 무용가들과 공유했다. 그 기간이 15년이나 되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프랑스에서 온 이방인이 아니라 한국으로 귀화한 듯, 우리나라 무용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즉흥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갖고 있던 그녀는 즉흥이 아직 우리나라 무용계에 생소하던 때부터 컨택 즉흥 공연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였고, 서울과 부산국제즉흥춤축제에 초청되어 무용수로, 때론 워크숍 강사로 활동했었다. 아시아 즉흥 아티스트들과의 네크워킹을 확장하기 위해 별도의 모임과 공연을 주선하기도 했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숫자가 100만 명을 훨씬 넘어섰고, 무용예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 프로그램이 별도로 만들어지기도 하는 등 국내무용계와 외국인 아티스트들의 소통이 활발해지고 있는 시점이기에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의 활동을 통한 국제교류에 일찍부터 앞장서 왔던 그녀의 죽음에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다
 무용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 자체를 즐기며 따뜻한 인간애를 나누었던 셀린은, 독립예술가이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휴머니스트였다. 아마도 셀린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특유의 환한 웃음으로 살풀이 수건을 들고 즉흥춤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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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한국의 전통춤이 아니라 나의 춤입니다”

 


김봉호_즉흥아티스트. Et aussi, AIAE member


선생님 김봉호입니다.
오늘은 셀린의 폰을 말소하러 광화문에 갔었지요. 한 시간을 서성이다 이내 돌아왔습니다.
도저히 아직 저로선 놓을 수 없더군요.
아시다시피 그녀가 짧은 삶을 걸으며 15년간 사랑하고 아낀 곳은 한국이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곳은 한국이었으니까요.
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등록이 되어있기도 하지요.
정신없는 와중에 한참을 고민을 했더랍니다. 셀린과 제가 추구하며 살아왔던 길이 명예욕과 거리를 두고 순수한 예술가의 삶을 실천하는데 의의를 두었기에 먼저 나서서 부고소식을 전해달라고 하기엔 제가 너무 고집스러운 것 아닌가도 생각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셔서 그 고민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아직 저는 스스로 정리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늦춘다는 것이 의미 없음을 알기에 부족하지만 정리하여 보내드립니다.

 



 셀린 바케(Céline Bacqué)는 한국에서 활동한 프랑스무용가로 기억되겠지요.
 1979년에 태어났고 한국에서의 활동 시기는 2001년부터 2016년까지였습니다.
 그녀는 프랑스남부에서 태어나 세살 때부터 무용을 시작하였고, 모든 전문예술학교과정과 CNSMDP를 수료하고 뉴욕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그 이후 그녀는 전 세계를 다니며 인디펜던트 Artist로 활동하게 됩니다.
 한국은 2001년 처음 알았으며 점점 빠져들게 되고 마음의 고향으로서 한국 전통춤과 자신의 춤을 연계해 지속적인 연구를 하였습니다. 또한 2003년에는 다국적 그룹 Change Faces를 결성해 활동하였고, 2007년부터 2013년까지는 Et Aussi무용단을 무용가 김봉호와 창단하여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2013년부터 201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AIAE창단멤버로 아시아의 즉흥예술교류 및 발전에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한국, 대만, 홍콩, 일본에 각 I Dance 페스티벌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서로 간 지원 및 발전시켜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2008년부터 2014년까지 I Dance Korea- Asia Improvisation Art Exchange 프로그램의 예술감독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여행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 했으며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역동적으로 살았습니다.

 



 셀린 바케의 예술활동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즉흥예술 연구 및 작업(Et Aussi, AIAE를 중심으로 2007년 -2016년)
 둘째, 한국의 전통춤을 배우고 자신의 춤으로 만들어나가는 작업(2001년 -2016년)
 셋째, 해외 소외지역 예술봉사 활동(2007년-2016년), 캄보디아의 예술학교 공동설립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


 오랜 기간 같이 활동하며 지켜봐 온 파트너로서 바라본 셀린의 죽음은 한국으로선 안타까워해야 할 일입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알려고 노력했던 그녀였지만 오랜 시간 가슴앓이를 해야 했습니다.
 한국의 전통을(춤 이외의 것까지) 그녀의 춤으로 소화하기까지 늘 해왔던 말이 “이건 전통춤이 아니라 나의 춤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토록 한국이란 나라는 다른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면을 보여줍니다.
 20살 예술이라는 굴레에 들어온 저로서도 지금까지 가슴으로 ‘한’을 깊이 받아들이는 춤꾼은 이곳에서조차 많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예술가로서 순수함과 열정으로 마음껏 살다 떠난 이로 기억되어지길 바랍니다.

 



 그녀가 타계한 날은 2016년 5월 9일입니다. 사인은 진드기에 의한 ‘쯔쯔가무시’(사후 6일후 의학결과 나옴). 대만에서 지방도시 몇 곳의 워크샵 스케줄을 다 소화하고 타이페이로 올라왔지만 너무 늦게 병원에 실려 갔고 3일 만에 세상과 고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녀의 사후 5월 17일 대만, 일본, 홍콩에서 ‘Memorial for Céline Bacqué’을 진행했고, 5월 18일 화장 장례식후 유골은 가족과 상의하여 한국에 보관하기로 했습니다. 6월 2일 서울 인근에서 ‘Memorial for Céline Bacqué (셀린~같이~)’를 진행하였고 약 68명이 다녀갔습니다. 남아있는 그녀의 유품은 모아지는 대로 프랑스의 가족에게 전달될 정입니다. 현재 그녀의 예술활동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 문의 및 보내실 곳
AIAE Member(sulkiwoo@hanmail.net)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중고개길83-65 AIAE 

2016. 0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