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2012 신춘포럼
한국 춤의 소통확대 방안 : 새로운 시대의 춤을 그리다
권옥희_본 협회 회원 / 춤비평

 소통, 막히지 않고 서로 통하는 것, 이 말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다. 정치 분야에서는 정치가와 국민 사이, 경제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소통이 되지 않아 불신의 벽이 높아지고, 예술분야에서는 생산자와 향수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아 상호 단절되고 고립되어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통이야말로 우리들의 가장 절실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 춤에서도 피해갈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이다. 춤이 언어보다 더 근원적인 소통방식이란 의미에서 소통의 문제는 반드시 깊이 고민하고 함께 해결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안이 된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세분화된 관심의 틀, 다양한 욕구 속에서 춤을 만드는 이들은 늘 누군가와 소통을 꿈꾸고 있다. 춤을 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통을 희구하는 몸의 자기실현이다. 그것은 춤추는 이의 고립된 몸짓이 아니라 춤을 바라보는 이들의 감성의 문을 열고 들어가 삶과 죽음을 함께 하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의 춤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춤의 작가(안무자)는 춤추는 이(무용가)의 춤을 통해서 춤의 향수자(관객)와 가장 근본적인 소통을 이룩하는 자이다.

 안무자들은 자신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의 공통분모 내에서 자신의 작품을 예술적으로 정제해 무대에 올린다. 이때 안무자의 도발과 관객의 인정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여기서 도발이란 익숙한 것에 대한 반발이고, 인정은 도발적으로 나타나는 새로움을 수용하는 것으로서, 이 두 가지는 춤이 춤으로 완성되는 두 개의 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발과 인정은 서로에게 봉사하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도발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신선한 빛을 잃어 소멸하고, 인정은 어떤 의미에서 수동성에 머물면서 타성화된다. 그러므로 이 양자는 항상 팽팽한 긴장의 공간을 만들고 서로 존중하고 함께 공감의 장을 이루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긴장이 사라진, 그래서 관습화되고 타성화된 무대에서 춤추는 이와 관객이 적당히 만난다는 것은 춤(예술)에 대한 모독이고 각자의 자기기만이다.

 요즘 우리 춤이 여러 가지로 매도당하고 외면 받는 이유는 춤의 생산자가 춤의 향수자인 관객을 도발과 인정이라는 대등한 긴장관계의 동반자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관객을 수동인 수용자로만 머물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그 점에서 소통부재가 야기되는 것이고, 그것은 소통부재를 넘어 관객을 기만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솔직하게 우리 춤계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부끄러운 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지원금 등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수 있지만, 춤의 생산자가 춤을 무대에 올리면서 (스스로 그 춤이 자랑스럽지 못해) 춤을 잘 아는 관객을 두려워하여 위축되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작품조차 잘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작품의도가 빈약한 것도 있는 게 현실이다. 그 빈약한 작품을 지원하는 빈약한 구조의 지원금제도가 우리 대부분을 급속히 전락시키고 있으며, 우리를 사회 체계의 논리에 억지로 짜 맞춰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선생들이라고 일컫는 우리 역시 또 다른 침묵의 문화 속에 침잠해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소통>은 절대로 <부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소통은 원래 상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춤은 공연자와 관객의 상호적인 소통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공연의 주체는 안무자와 춤추는 자이지만 그것을 향수하는 관객이 상호적으로 자리할 때 비로소 춤이 완성된다. 따라서 모든 공연의 책임은 안무자와 관객 모두에게 있다. 몸 움직임의 시적인 조화나 음악적인 작업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러나 춤의 생산자는 즉각적으로 몸에 생기를 불어넣듯이 작품에 의미부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안무가가 춤의 주제와 무대 위 실제 공연 사이, 또는 작업에의 충실함과 창조적인 진통 사이에 처해진 것처럼, 관객은 가담과 유보적 태도 사이에서 적극적이며 단호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만 한다. 이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이룩되는 것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소통은 생명의 기운이 통하는 일이다. 단절과 불통이 파멸의 길이라면 분명히 소통은 막힌 곳을 뚫어 생기가 흐르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소통의 길이고, 포커스를 우리의 주제인 춤에 맞춘다면, 춤은 그 자체가 몸의 언어로서 소통의 수단이다. 이 때 소통의 내용이 허망하거나 무의미한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소통부재이다. 다시 말해서 춤의 내용이 빈약하고 새롭지 못하고 도발이 되지 못한다면 관객은 그것을 인정할 것이 없고 수용할 것이 없으므로 본질적으로 소통부재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무내용한' 것들을 보는 일은 허망하다. 현실적인 상황이나 제한 속에서 어려움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이 진정한 춤이 될 때 춤은 바로 소통을 이루게 되어 생명의 기운이 되고 삶의 즐거움과 힘이 되는 것이다.




소통을 위한 비판의식

 프렉탈구조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작은 스케일에서 들여다봐도 미세한 부분들이 전체구조와 유사한 구조를 무한히 되풀이하고 있는 양상을 말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무용계의 양상이 이와 같다. 예를 들어 무용계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면 그 문제점은 어느 특정한 곳, 특정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앙의 문제점이 지역에서 나타나고, 그 지역의 문제점은 좀 더 작은 조직에서 나타나고, 그 하부조직의 하부조직 이런 식으로 그 양상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전체패턴이 하나의 악절 안에서 유사한 구조로 되풀이 되는 바흐의 음악처럼(근데 바흐의 음악은 아름답다) 자기복제(자기유사성)의 반복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서울과 지역, 지역과 지역 간의 춤사회(무용계)는 '소통'이 '부재' 한다고 모두 입을 모은다. 그것이 춤계 조직의 문제이든 춤추는 방법의 문제이든 유사한 조직으로 모두들 서로 유사한 춤을 추고 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따라서 춤의(무용인들의) 소통부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렉탈구조를 띄고 있는 우리 춤계의 '자기 유사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이 문제는 역설적으로 중앙조직에서 하부조직으로 내려오든, 그 반대이든 이러한 '자기 유사성' 원리가 어느 한 곳에서 긍정적으로 변혁되기만 하면 프렉탈 구조이론은 또 다르게 작동되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바흐의 음악과 잭슨 폴록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자기 유사성'의 치밀하고 과학적인 구조처럼, 우리 춤사회와 춤이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구조를 가지려면 유사하면서도 서로 다른 독창적인 세계관이 그(춤과 조직) 안에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를 이런 지경으로 몰고 가는 춤 사회의 구조는 동시에 작금의 사태를 새로이 인식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의식이 있는 무용인들 사이에서 낡은 권위의식을 침식시키고, 새로운 정보와 춤의 지식들로 새로운 유대감을 자각케 하는 길을 모색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를 자신의 언어(춤의 몸)로 말하고 요구할 수 있는 당당함과 자유로운 영혼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배권력의 입장이 아니라 다수의 무용인들과 그들 속에 존재하고 있을 인재들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이들의 관점으로 볼 때, 특별하고 뛰어난 이들에게 주목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춤계의 또 다른 주체로서 새롭게 대두될 인재들을 발굴하여 키워낼 수 있다.

 새롭게 대두될 이들이란 어떤 표준, 일률적 질서, 척도에 포획되지 않는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은 양적으로 계량하고 집합할 수 있는 무용인들이 아니라 새로운 개성을 가진 존재다. 소통은 이들이 편협된 권력구조를 거부하고 오히려 다양한 스펙트럼을 나타낼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구성, 구축하지만 질적으로 새로운 것의 구성으로 나간다는 의미에서 새롭고 특이한 이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춤의 지식과 정보에 관한 호기심, 춤사회 현황에 대한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무용인들의 적극적인 의지와 개방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새로운 춤의 탄생을 위해 기존의 춤계에 참여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창작과 이론의 통일을 주장하는 것처럼 참여를 위한 실천의지 또한 필요하다. 그 통일을 위해서는 춤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적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측면을 바탕으로 소통을 위해서는 비판과 자기변화가 필요하고 새롭고 질적인 것을 구성하는 적극적인 방법 또한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무용계는 새로운 것으로의 자기 재구성을 위해 감각을 열고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논제를 피력함에 나는 이도 좋고 저도 괜찮다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이러한 논의는 젊은 세대를 기존 체계의 논리에 통합시키고 따르도록 만드는 도구로 기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유의 실천'으로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대응하고 춤사회의 변화에 참여하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방법의 제시는 불가피하게 춤 사회 내에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새로운 무용인들의 대두와 참여에 기여할 것이며, 춤의 역사에 새시대를 열어줄 것이다.

2012. 0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