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춤을 바라보는 ‘경계 없는’ 시선
이순열 선생 춤비평에 대해
김태원 _ 춤비평

 이순열 선생(1935년생)을 뵙기 시작한 것이 1987년 즈음인 것 같다. 당시는 1982년에 첫 조직된 ‘무용펜클럽’이 이름을 바꿔 ‘한국무용평론가회’로 개칭되면서 채희완 회장·김채현 간사를 축으로 춤평론가 모임이 정례화, 또 재조직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그때 동료 이종호·김채현과 함께 신입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 선생은 『음악동아』에 편집장으로 몸담고 있어서 사실 1년에 한두 번 볼 수 있는 정도였다. 1988년인가,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음악동아』에서 그곳 예술비평란의 편집을 맡고 있는 작고한 김광협 시인이 내게 매회당 원고지 50매 분량으로 총6회 정도로 한국무용계와 춤예술의 문제점을 에세이 형식으로 게재해달라고 해서 『음악동아』를 두세 번 들리게 되었을 때, 나는 선생을 잠깐씩 뵐 수 있었다.
 그 이후 선생과 여러 번 얼굴을 마주하게 된 때는 1992년 ‘춤의 해’ 때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춤의 해’의 행사 진행을 둘러싸고 한국무용협회/비협회권(圈)의 대립이 심했을 때, 춤평론가회 회원 전원은 비협회권에 속해서 이순열·김현자 선생을 중심으로 협회권과 ‘춤의 해’의 행사를 조율하고 진행시키기 위한 모임을 여러 차례 가졌다.〔사실 이 모임의 수장(首長)은 원로 현대무용가 육완순 선생이었다. 그러나 당시 육 선생은 이화여대 입시부정사건과 연류,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때 나는 운영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생을 비교적 자주 만났던 것 같다. 그때 선생은 협회권의 조흥동 이사장과 그 행사의 공동위원장을 맡아 그 두 계열은 물론 범 춤계의 단결과 화해를 도모하자는 뜻에서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어 ‘춤의 해’ 캐치프레이즈를 매우 시적(詩的)으로 정했다. ‘온누리를 춤의 꽃밭으로’가 그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던 영국시인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가 일찍이 표현한 ‘잔인한 삶의 대결’을 지양한, 춤이 주는 생명감과 환희에 흠뻑 취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허나 극광(極光)으로 빚어진 오로라의 춤이 얼마나 눈부신 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춤추고 날아오르자. 손에 손을 맞잡고, 온세계를 춤의 화환(花環)으로 엮어 가자.
                       ―연속 수상(3) 「춤의 화환(花環) 속에 온세계를」 중에서

 그 이후 ‘춤의 해’를 치른 비협회권이었던 이들과 우리춤의 학술적·국제 교류의 수준 향상을 위해 1993년 한국미래춤학회를 결성하면서(송수남·최청자·하정애·김현자·국수호·김정수·김채현·김경애 그리고 나 등 참가) 선생과의 만남이 더 이어지게 되었다.
 한 사람의 춤평론가로 이순열 선생의 존재성(存在性)에 대해 당시 원로 춤평론가요 『춤』지 발행인이기도 했던 조동화 선생은 1980년도까지 한국무용평론계를 개관한 한 글에서, “1970년대 후반 들어 시인 김영태가 현대무용의 비평적 기록에 크게 이바지했다면, 이순열의 등장으로 춤의 현장과 평론 사이에 ‘새로운 긴장관계’가 성립되었다”고 짧게 언급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당시의 선생의 평론과 대담(좌담)이 적지 않게 실린 『춤』지 등을 살펴보면, 선생의 발언과 평문은 기존 질서에 상당히 ‘파괴적’이다할까, 그리고 그때까지 자신들의 예술적 전문성에 대한 반성 없이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 나름대로 견고한 아성(牙城)을 쌓고 있었던 무용계에 대해 가차 없는 ‘비평적 힐난(詰難)’이 퍼부어짐을 여러 지면에서 발견하게 된다. 특히 춤 전문지 월간 『춤』이 창간(1976년 3월)되면서부터 그 지면의 ‘젊은 대표 평자(評者)’로서 80년대 초반까지, 곧 5~6년간 그러했는데, 2001년 한국춤평론가회의 경주세미나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발표한 한 글 「낙오자의 변」에서 자신의 ‘혹평(酷評)’이 무용가들이나 무용계에 대해 파괴를 위한 파괴, 혹은 자신이 일종의 파괴전문가(destruction specialist)로서 그렇게 행한 일이 아니고, 춤의 순수한 환희와 성전(聖殿) 속에서 그들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랐던 자신의 아픈 인간적 절규와 원망(願望)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본의 아니게 혹평의 대상이 된 무용가들이 입었을 심적(心的) 상처를 상쇄하기 위해서 근 20년 가까이 춤에 대해 평론 활동을 할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가운데 내가 생각키로 선생의 두 가지 춤비평적 지론은 먼저 춤이란 사심(私心) 없는 영혼의 예술 활동이란 것(따라서 거기에 어떤 경계와 아성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어떤 특정한(서구를 포함) 춤의 어떤 흐름이나 스타일이 절대적이 아닐 수 있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선(視線)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전자의 관점에서 선생은 당시 한국무용계의 불건강한 징후들─이른바 특정의 학맥이나 예술 인맥, 그리고 사제관계에 얽매인 특정 개인의 우상화─에 대해 사심 없이 질타했고, 이어 후자의 관점에서는 무엇인가 서구 추종적이 아닌, 한국적인 새로운 춤예술의 시도가 있을 수 있다는 상대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이 맥락에서 특별히 후자와 관련, 선생은 배정혜 안무의 <타고 남은 재>(1977)에 대한 평문(『춤』지 1978년 1월에 발표한 「어둠 속을 비치는 새로운 불빛―우리 무용의 신기원」)에서라든지, 80년대 초 김매자 주도하의 창무회나 문일지 리드하의 서울시립무용단이 시도한 우리 민속무나 전통무용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한국무용의 현대화 작업’에 대해 비평적 관점에 있어서 매우 호의적이었고, 더불어 불완전하지만 당시 임성남이 리드한 국립발레단이나 이화여대와 같은 대학권 발레(홍정희와 발레 블랑)가 시도하기 시작한 ‘한국적 발레’에 대해서도 퍽 관심을 가지고 긍정적이었던 평을 썼다(물론 그들이 기술적으로는 많이 모자랐지만).
 그런 중에 선생이 1970년대 후반 이후 오늘날 ‘한국창작무용’으로 지칭되고 있는 한국무용의 현대화에 대해 시기적으로 매우 앞서 지지를 표했던 것(채희완 교수의 이론적 지지는 1980년도 이후다)은, 이후 그 흐름의 춤이 우리 예술춤의 한 흐름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나는 본다.
 그 같은 선생의 열린 시각은 1980년도 중반 들어 거의 고착화되었던 한국무용/현대무용/발레의 3분법화된 춤전공의 인위적 분화(分化)에 대해서도 자주 제도적 비판을 하게끔 했다. 곧 ‘춤’이란 그 속에 모든 것이 함께 있는 것이고, 형식과 스타일이 다르더라도 경계를 넘나들며 상호 교류하는 것이지, 어떤 인공적인 칸막이(춤 制度)에 의해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폭넓은 관점을 선생은 일찍부터 드러내었고,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강조했던 것 같다. 그와 함께 창작무용 즉 한국무용의 새로운 현대적 창작 작업도 ‘우리의 현대무용’이 될 수 있음을 밝혔다. 그런 춤예술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창무회 소속의 최은희가 1982년 발표한 「하지제(夏至祭)」(제4회 대한민국무용제 대상 수상작)나 「넋들임」에 대해 선생이 『문학사상』에 쓴 글 「한국무용의 공동과제」 속에서나, 80년대 후반에 발표한 것으로 생각되는 「우리의 현행 춤분류 방식 문제 있다」란 논쟁적인 글 속에서 현대무용을 곧 서구의 모던 댄스라고만 등식화시키는 무용계를 비판하며, 그 개념을 보다 문화주체적으로 또 열린 춤예술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한국의 창작무용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컨템포러리 댄스’로 볼 것을 선생은 제안하기도 했다. 그 부분을 좀 길게 옮겨보면 이렇다.

 “〔현재 우리 무용의 혼란은〕 무용을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로 구분하고 있는 궁여지책의 분류방법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어 이것을 바꾸어 보자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분류는 한국무용은 현대무용일 수 없으며 현대무용은 한국무용일 수가 없고 발레는 한국적이지도 현대적일 수도 없다는 오해를 낳을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해되는 이 세 유형의 어휘를 정의하자면, 많은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고 또 사람마다 견해도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한국무용이라 치부하고 있는 것처럼 애매모호한 것은 없다. 우선 그 모호성은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의 혼돈에서 비롯한다. 일부에서는 한국무용을 전통적인 민속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범주에서 1920-30년대식의 춤이라야 한국무용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창작무용과 전통 민속무용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나면, 그리고 무대예술이란 끊임없이 창조되는 우리 시대의 무용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혼란은 사그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무용을 굳이 한국무용과 외국무용으로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외국에서 도입한 수입가공품만 현대무용이고, 한국적인 정서와 한국적인 춤사위를 바탕으로 하는 오늘의 우리 춤은 현대무용일 수 없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중략. 그러므로〕현대무용이 모던 댄스에 상응하는 우리말이라 하기는 어렵다. 차라리 현대무용이란 컨템포러리 댄스(Contemporary Dance)의 개념을 끌어들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무용은 모던 댄스의 몇 가지 틀을 동냥해다가 그것을 답습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우리의 현행 춤분류 방식 문제 있다」 중에서

 사실 이 같은 문제제기적 논점은 이후 더 발전될 소지가 있었지만, 선생의 절필(絶筆)로 그 같은 생각은 더 구체화되지는 못했다.
 그런 중에 1년에 한두 번 있는 춤평론가회의 제주도 등 지방 세미나에서 보게 되는 선생의 모습이란 진흙탕 속에서 아웅다웅하며 싸우는 무용계의 모든 지상적(地上的) 모습에서 떠난, 질퍽한 늪이나 수렁 위로 부는 ‘막힘없는 한줄기 서늘한 바람’의 모습과 같았다. 그 늪과 수렁 속에 빠져 싸우고 있는 무용가들이나 후배 평론가들이 보기에 종종 선생의 낭만성이 섞인 초연함은 마치 다른 세계를 살다온 립 반 윙클이나, 미국의 초자연주의자들인 에머슨이나 소로우 같아도 보였지만, 사실 ‘춤예술’의 참다운 모습은 더러운 늪이나 수렁 속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선생의 그 같은 태도는 지극히 당연하고, 또 그만큼 신선했다 보겠다. 달리 말해 그저 ‘춤’에만 목매달고 살고 있는 다수 무용인들의 외눈박이식 삶의 방식에 대해 선생은 ‘그저 춤이란 하나의 화살로 춤의 과녁을 꿰뚫으려는 어리석음’의 몸짓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근자 자주 존 단, 코울리지, 키이츠 등 영국 고전 내지 낭만주의 시 등을 인용, 스스로의 예술적 안목이나 자신의 미적 기준을 그 속의 시구(詩句)에 즐겨 환치시키고 있는 선생의 태도는, 춤이란 거듭 인위적 경계를 넘는 순수 영혼과 미적 이념의 산물임을 에둘러 말하고 있는 듯싶다. 선생의 한 뛰어난 에세이인 건축과 발레 예술의 상관성에 대한 글(1995년도 『무용저널』 10호에 실린 「건축과 무용의 비상」)은 춤만이 꿈꿀 수 있는 그 같은 타협 없는 수직(垂直)의 시선과 영혼에 대한 그의 공감과 지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 그런 중에 매우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예술의 빛’이란 서양에서 보를레르가, 동양에서 『문심조룡』의 저자 유협(465~521)이나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그의 시 「비파행」에서 보여준 ‘은밀한 보여줌’―선생은 그것을 『문심조룡』 속의 ‘은수(隱秀)의 미학’으로, 혹은 중국시 속의 ‘성성적적(惺惺寂寂)의 미학’으로, 또 볼타모르는 엑스타시스(ecstasis)가 아닌, 침잠하는 ‘엔스타시스(enstasis)의 미학’으로 칭했다―에 있다고 했다. 따라서 한 사람의 비평가는 그런 수직의 시선과 은밀함의 미(美)를 감지하는 이로서 끊임없이 그렇지 못한 ‘대중의 〔조악한〕 취미를 교정(T.S. 엘리엇이 말하는 correctness of taste)시켜가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취미의 교정’이란 개념은 「무용과 비평의 기능」 등 선생의 글 속에 몇 번 쓰여지고 있다.)
 알다시피, 오늘의 춤계에서 누구나 깨끗이 살기는 힘들다. 거의 모두 스스로 예술인임을 잊고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 너무나 작고 사사로운 덫이나 인간적인 연(緣)에 얽매여 살고 있다. 그런 속에 이른바 예술혼을 고취시켜야 할 여러 계층의 춤의 지도자들은 나름대로의 생존과 계파 유지를 위해 제 식구 혹은 제 연줄 감싸고 챙기기에 바쁘다. 그런 뜻에서 선생은 그런 인위적 그물〔網〕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자유롭고 초탈하게 현재를 살고 있는 분이 아닌가 한다. 2000년대 들어 『음악동아』를 퇴임 후 경기도 퇴촌(退村)에 거주하게 되면서, 그 지명대로 자신의 생활철학에 있어서 일찍 ‘거리둠과 물러섬의 생활 태도’를 실천하고 있는 탓이라고 보고 싶다.
 나로서는 거듭 지금 병들지 않고 자연인(自然人) 그대로의 삶을 소탈하게 살고 있는 선생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정신적 힘이 되고 귀감이 된다. ‘온갖 지저분하며, 뒤뚱거리는 가금(家禽)의 발자국이 난무(亂舞)하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 끝으로 선생의 대표적 비평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과 무용의 비상」 중 한 대목을 읽어보자. 글 속에서 내용은 주로 발레의 예술적 아름다움과 연관되지만, 오히려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춤의 ‘한 메타포’로 보면 좋겠다.

 “무용이 갖는 고양(高揚, Elévation)과 비상의 꿈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은 무용가들이 적지 않듯이, 건축에 내재하는 상승의지를 외면해버린 건축가들은 없는지 나는 이따금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상승의지야말로 건축의 다이내믹한 에너지의 분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건축의 모든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은 건축물에는 날아오르려는 꿈이 담겨있다. 우리나라의 집은 거개가 단층이다. 그러나 기와집 지붕을 보라. 아래로 처지는 듯하고 처마가 별안간 하강을 멈추고 그 끝이 날렵하게 치솟아 오르는 그 상승곡선의 아름다움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모든 건축물 중에서 가장 치열한 상승의지의 표출이 아닌가?
 (중략)치솟아 오르려는 의지가 마침내 〔발레에서〕 발가락 끝을 곤두 세워 그 끝만으로 서게 하는 쁘엥뜨(sur la pointe)를 가능케 했고, 거기서 다시 공중으로 상승하는 수많은 도약의 동작(jetée, sautée 등)을 가능케 했다.
 ‘어디든 지구 밖으로(Anywhere out of The world)’라는 보들레르의 절규로 표상되는 로맨티시즘의 시대에 누구보다도 먼저 발끝으로 서는 쁘엥뜨 동작을 시도했던 마리 탈리오니는 공기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춤으로 관중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상승의지의 참다운 승리는 발롱(ballon)에서 구현되었다.”

 


* 이 글은 처음 선생의 (재)‘덕원의 숲’(이사장·이윤자) 제2회 ‘아름다운 삶 추대상’ 수상 기념(2012년 10월 5일)으로 펴낸 한국춤비평가협회 간행의 이순열 춤비평집 『더욱 아름다운 춤으로』(비매품)에 부쳐 써졌다. 이후 상기 비평서의 출간은 내게 거칠게나마 선생의 글을 일별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글의 내용이 많이 보완되었다. 글 속에 인용된 비평문의 전체 내용은 위 비평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2013.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