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특별기획_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김채현_춤비평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이를 토대로 검열이 진행되었다는 증언들이 국정을 뒤흔들고 있다. 헌법과 법치에 위배되는 블랙리스트와 검열이 표현의 자유를 압살하고 개인의 예술 활동을 저해하는 위험은 결국 국가와 사회의 피해로 이어진다. 국가와 사회의 경제적 지원마저 이를 구현할 표현의 자유가 실종되면 무의미해진다. 블랙리스트로 상징되는 문화예술의 억압과 검열 관련 해외 사례들이 국내에 반면교사가 되기를 기대한다. (필자 주)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 마오 시대의 야만

  

 블랙리스트가 있으니 화이트리스트(잘 쓰이지 않지만)도 있을 것이다. 전자는 기피·배제 명단(목록)으로 널리 쓰이는 중이고, 후자는 우대명단 정도로 번역된다. 서비스 업종에서는 기피고객(진상고객 포함), 우대고객 명단으로 불림직하다. 문화예술 통제 또는 검열 차원에서도 블랙리스트만 아니라 화이트리스트도 있다. 이를 공식적으로 작성한 나라가 사회주의국가들을 비롯해서 한두 곳이 아닐 테지만(나치 독일도 여기에 포함된다)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도 그 대표적 나라로 꼽아진다.
 1949년 중국 대륙을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공산당이 장악해서 집권한 이후 중국은 1954년에 발레와 중국 전통춤을 전공하는 북경무도학원을 설립하고 1959년에는 실험발레단(지금 중국국립발레단의 전신)을 창설하였다. 그로부터 5년 지난 1964년 중국국립발레단이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 붉은 여성 군대)을 창작하였고, 그 다음해에 상하이무도학원이 〈백발의 처녀〉(白毛女·백모녀)를 창작하였다. 두 작품의 수준으로 미루어 당시 중국 발레가 상당히 빠르게 진척된 것으로 보인다.

 



 〈홍색낭자군〉과 〈백발의 처녀〉 모두 1930년대 일본의 침략을 당한 중국이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나뉜 현실에서 있었던 실화를 발레로 구성하였다. 〈홍색낭자군〉은 지주의 높은 소작료를 갚지 못한 집안을 대신해서 지주의 성노리개로 끌려간 처녀가 공산군에 구출되어 여성 전사들의 선봉으로 뽑히고 모두들 민중해방전쟁에 나서는 과정이 줄거리이다. 〈백발의 처녀〉 역시 지주의 손아귀를 벗어난 처녀의 사연을 그렸다. 처녀는 심산유곡의 동굴로 피신해서 사찰 공양을 동냥해 먹고 들짐승들에 시달리며 생활한 탓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게 되나 거기서 약혼자와 재회해서 항일군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두 작품은 악덕 지주(地主)의 폭압에 나날을 지새우던 숱한 중국인들의 적나라한 현실을 정의감을 축으로 재현한 때문에 대중성이 매우 높았다. 소작료나 빚을 갚지 못하는 가정의 딸을 성노리개로 삼던 청나라 시대의 지독한 봉건악습을 도마에 올리고 이를 이겨나가는 처녀들의 활약상을 그려서 대단한 공감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작품들의 저변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각에서 대중의 각성과 의식변화에 초점을 맞춘 제작의도가 강하게 깔렸고, 서구 고전발레의 움직임을 취하되 중국 경극의 움직임을 섞고 줄거리는 물론 소도구, 복색 등의 측면에서 고전발레의 금기사항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특히 〈홍색낭자군〉의 초연 직후에 마오쩌둥 주석은 올바른 방향을 취한 작품으로서 혁명을 그리는 데 성공하고 예술적으로도 만족스럽다는 찬사를 보냈다. 공산당 주석의 찬사는 말할 것 없이 국가와 공산당 차원의 공인을 의미했으며, 유사한 내용과 수준의 〈홍색낭자군〉과 〈백발의 처녀〉는 중국에서 곧 살벌하게 진행될 문화대혁명 시기에 혁명이념에 부합하는 모범작으로 선정되었다. 그리하여 두 작품은 문화대혁명 시기 문화예술 화이트리스트에서 무용과 발레 분야를 통틀어 최정상의 작품들로 군림하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과거로부터 전래해온 모든 무용전통 그리고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시기의 모든 무용신작까지 송두리째 부정한 문화대혁명에 의해 그런 무용전통과 무용신작은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것으로 생각된다. 왕케펜이 저술한 중국무용사(국내 번역본)에서도 문화대혁명 시기는 과거 춤 역사를 전면 부정한 시기로 서술되고 그 당시의 무용 활동은 일체 언급되지 않는다.
 현대 중국의 대재앙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문화대혁명은 1966년에 발단되어 1976년에 종막을 고했다. 그러면 문화대혁명의 화이트리스트에 속했던 〈홍색낭자군〉과 〈백발의 처녀〉도 1976년 이후 자연히 퇴조했을 것으로 추측될지 모르겠으나, 정반대로 지금까지 각각 4000회, 1700회 넘게 공연되었고 아직도 간간이 유럽과 미국 등 중국 바깥에서 공연되곤 한다. 〈홍색낭자군〉은 아마도 중국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었고, 발레 역사에서도 공연 회수로는 손꼽을 작품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 반증하려는 듯이, 2007년 베이징에서 중국이 야심차게 개관한 초대형 그랜드 공연장 ‘국가대극원’(國家大劇院, 일테면 중국의 예술의전당) 개관 프로그램으로 〈홍색낭자군〉이 선정된 바 있다.
 〈홍색낭자군〉과 〈백발의 처녀〉는 공연 자체를 영화로도 제작해서 중국 전역에서 상영되었다. 영화로 제작한 목적은 물론 문화대혁명의 성취에 있었다. 이런 사실이 있었더라도 문화대혁명은 그 말과는 전혀 무관하게 문화(예술) 분야에 국한된 혁명이 아니다. 우선 이 혁명의 와중에 희생당한 사망자 수치만 봐도 문화(예술)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직감하게 된다. 희생당한 사망자 수는 무려 적게는 40만 명, 많게는 200만 명으로 추정되고 심지어 1천만 명으로까지 늘어나기도 한다(당시 중국 인구는 8억 정도였다). 한 마디로, 그것은 정치적 투쟁으로서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다시 옹립하기 위한 대사건이었고, 그만한 희생자를 버젓이 초래한 투쟁의 광기는 1966년~76년 사이에 중국이 선뜻 납득하기 힘든 전란(戰亂) 속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1966년 5월 베이징대학에 대학 당국을 비판하는 대자보(大字報)가 게재되었다. 베이징대학이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 사상을 반대하는 수정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요지의 대자보 주장을 마오쩌둥은 즉각 지지하고 새 형태의 국가권력이 출현해야 할 것을 주창하였다. 이를 기화로 공산당은 대중 동원에 나서며 대학생 및 중고등학생들이 지지 활동에 대대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그 직후 학생들은 ‘홍위병’(紅衛兵; 붉은 공산당 정권을 보위하는 병사)이라 적힌 붉은 완장을 차고 이를테면 ‘중국 개조’를 앞장서 외쳤다. 동시에 베이징 등 중국 도처에서 여느 직장, 농촌 가릴 것 없이 학생들뿐 아니라 마오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중국 개조의 폭풍을 천지개벽할 듯이 일으켰다. 10년 동안의 전란 아닌 전란, 문화대혁명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1960년대 중반 당시에 마오의 권력 기반이 공고하였더라면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1949년 주석 취임 이래 마오는 1950년대에 과도한 중공업 진흥책과 농업 증산 등을 중심으로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등을 펼쳤으나 실패한 데 몰려 1959년에 실권을 부주석들에게 넘긴 바 있다. 부주석들의 실용주의 위주의 일부 자본주의적 정책으로 경제가 회복하는 기미가 보일수록 마오는 자기 권력의 위기를 의식한다. 이에 그는 부르주아 및 자본주의 타도와 청소년의 참여를 내세우며 수시로 권토중래를 노렸는데, 문화대혁명은 기실 마오의 권력 회복 책략의 일환으로 기획된 정치 투쟁이었다.
 홍위병들이 도화선 구실을 한 문화대혁명은 낡은 네 가지, 즉 4구(舊, 옛 사상, 옛 문화, 옛 풍속, 옛 습관) 타파의 기치를 들고 출발하였다. 4구를 바탕으로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 등 공산주의 또는 마오쩌둥에 속하지 않은 온갖 것들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공공 기관, 학교, 일반 직장 내에서 개개인의 성향과 행동거지에 맞춘 비판들은 공개적 비판에서 인민재판으로 직행하였고 자아비판도 강요하였다. 게다가 전문가, 학자, 당 간부들은 반동 학술권위,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타도 대상이었다.
 중국사의 대가 천인커(陳寅恪·진인각)는 교수를 지도하는 교수로 명망이 높았다.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모셔가려 해도 배격하고 대륙에서 연구를 지속하였다. 중국 공산당에 가담한 적도 협조한 바도 없는 그였지만 중산대학 퇴임 후에도 대학 당국이 생활과 연구 여건을 배려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그는 대학의 배려를 박탈당했고 홍위병들에게 밤낮없이 수시로 가택 수색과 모욕을 당하고 엄청난 대자보 공격을 받으며 2년을 견디다 79세로 부인과 떨어져 한을 안고 병사하였다.
 훗날의 영화감독 첸카이거가 소년 홍위병으로서 영화감독 아버지를 맹렬히 공개 비난한 것을 후회했듯이 자식이 부모를 4구 분자로 고발하기가 예사였다. 또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5일의 마중〉에서 발레 하는 딸이 반동분자 지식인 아버지 때문에 영화로 촬영되는 〈홍색낭자군〉 주역에 발탁되지 못하자 뒷날 탈옥한 아버지를 밀고하여 다시 옥살이를 시키는 등 가정파괴는 비일비재하였다. 무고한 사람 덮어씌우기, 온갖 모욕과 인격 훼손, 책임 전가 등 정실(情實)과 주관적 감정에 이끌려 법을 도외시한 판정이 중국 전역에서 판쳤다. 그리하여 상호불신은 물론이고 밀고와 작당이, 증오와 복수심이 극성을 부리는 세상이 들이닥쳤다. 당시 갖은 형태의 블랙리스트가 난무하였고, 서로 밀고하는 경우처럼 서로가 서로의 블랙리스트에 추가되었다.
 비정상과 광기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4구의 판별 기준도 미궁에 빠지고 어느새 문화대혁명이 의도할 중국 개조의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은 한낱 사치에 불과해진다. 문화대혁명이 시작한 지 2년쯤 흐르자 중국 개조를 앞장서 외쳤던 홍위병은 마오쩌둥에게 약효가 다됐는지 오히려 개조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정치적으로 귀찮게 된 홍위병을 거세할 방법으로 청소년과 젊은 남녀 1700만 명이 농촌과 오지로 강제로 보내져 현장을 몇 년간 학습할 것을 강요당했다. 이것을 하방(下放)이라 불렀다. 고등학교 진학, 대학 진학 같은 정상적 진학과 학업은 물론 포기한 채였다. 뿐만 아니라 하방은 마오의 평생 혁명 동지들인 등샤오핑(당시 60대 중반으로 부주석 직책) 등에도 적용되었고 무수한 지식인, 직장인들이 하방 조치되었다. 첸카이거(4년간), 현직 총리 시진핑(7년간), 류샤오보(3년간, 노벨평화상 수상 작가)도 그 시대에 하방당한 사람들이다. 현장 학습이라는 것이 산이나 들을 찾아 무망하게 땅이나 파고 인원수나 채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부주석 등샤오핑이 트랙터 공장에 4년간 하방된 것은 일말의 학습 효과가 있었을지 모른다. 말이 하방이지 중국 전역에서 계층을 막론하고 엄청나게 자행된 숙청이라 해야 할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대재앙을 발생시킨 원인으로 흔히 마오쩌둥 숭배를 든다. 1950년대의 경제 실책은 마오의 권력 기반에 타격을 가했으며, 권력기반을 되찾을 필요성은 마오 자신에게나 추종 숭배자들에게 절실하였다. 경제 실책을 4구 타파 같은 이념투쟁으로 해결하려는 오류가 대재앙의 또 다른 원인으로 들어진다. 1950년대 경제 실책이 중국 대내외의 경제 여건만이 아니라 마오 자신의 판단에서도 기인했다는 사실은 마오의 숭배가 매우 과도하며 편파적이었음을 여실히 나타낸다.
 마오의 판단 오류를 보여주는 한 사례가, 널리 알려진, 참새 섬멸 작전이다. 1958년 마오쩌둥은 참새가 먹는 곡식이 식량 증산을 가로막는다는 판단에서 참새 섬멸을 명하였다. 대대적인 작전으로 농촌에서 참새 2억1천만 마리가 처치되었으나 식량 수확은 오히려 줄었다. 생태계 파괴로 도리어 늘어나는 해충이 곡식을 훨씬 더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마오가 1960년 작전 중지를 명하였을 때에는 이미 전국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련에서 참새 20만 마리를 급히 공수해오는 촌극도 벌어졌다. 당시 가뭄이 작용한 탓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참새로 인한 대기근(大饑饉)이라 지칭되는 재앙으로 놀랍게도 수천만 명(당시 중국 인구 6억 5천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가운데 역사학자 프랭크 디쾨터가 추정한 4500만 명이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인다.
 혹자는 이 기근을 인류사 최악의 기근이라 지적한다. 신화통신 기자였던 양지솅은 그 자신 아버지가 대기근 시기에 아사하였으나 그는 정부 정책과 무관한 개인의 죽음으로 여겼다. 그는 전부터 공산당원이었고 대학 졸업 후 기자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기자로서 전국을 취재하며 대기근의 실상을 파악하게 되고 기자 퇴직 후 2008년 출간한 《중국의 대기근》이라는 대형 저작에서 전체주의가 아사의 근본 원인이라 밝혀냈다.
 문화대혁명에서 문화예술 분야는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강청; 원래 연극배우 출신)이 전담하였다. 남성 발레 무용수 리춘신의 실화를 옮긴 영화 〈마오의 라스트 댄서〉에서 장칭이 관리하는 발레 학교 오디션을 위해 리가 지방 오지에서 선발되는 장면이 있다. 이처럼 장칭은 혁명 기간 내내 문화예술의 세부 업무까지 지도하였다. 장칭은 무엇보다도 문화예술의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만들고선 특히 화이트리스트에 올릴 작품을 정해서 못 박는 행태를 수행하였다.
 장칭의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 작성 기준은 선과 악(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농민과 노동자, 혁명전사를 긍정적으로, 지주와 반혁명분자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면 선한 작품, 그러지 않으면 악한 작품이라는 식이다. 선한 작품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작품 8편을 선정해서 문화대혁명을 뒷받침하는 모범작으로 권장했는데, 이를 양반시(樣板戱·양판희)라 하였다. 오페라 5편, 교향곡 1편, 발레 2편이 양반시에 선정되었고, 〈홍색낭자군〉과 〈백발의 처녀〉가 그 발레 2편이다. 2편의 발레는 그 무대 실황이 영화로도 각색 촬영되어 중국 전역에서 무시로 상영되었다. 이런 사정에서 〈홍색낭자군〉의 1970년 영화에서 주역을 맡은 발레리나 수에징화(薛菁華·설청화)는 대스타가 되었다.
 혁명 기간에 무대 무용은 〈홍색낭자군〉과 〈백발의 처녀〉만 공연될 수 있었다. 2편의 화이트리스트를 제외한 모든 무용이 블랙리스트로 취급되었다는 기록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특히 〈홍색낭자군〉은 그 뒤에 소련에서 창작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발레 〈스파르타쿠스〉(1968년작)를 앞지른 중국 버전이라 비유할 수 있다. 그 작품들이 문화대혁명과 강하게 직결되어 있어서 두 작품을 수용하는 데 문화대혁명이 배경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홍색낭자군〉과 〈백발의 처녀〉는 그런 대로 수준을 인정할 만한 작품들이다.

 

 




2016년은 문화대혁명 50주년이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장칭 등이 법적 처벌을 받음으로써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장칭은 무기징역 복역 중 1991년 자결하였다). 1981년에 가서야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며, 그의 책임이라고 공식화한 바 있다. 이후 여러 영화, 다큐 등이 문화대혁명의 참극을 그려냈지만, 보도에 따르면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은 공교육에서 다뤄지지 않고 여전히 구전으로나 전해지는 모양이다.
 당대인들이 말하고 싶지 않은 역사는 공백으로 남을 것이고, 말하려니 치욕을 무릅써야 한다. 블랙리스트건 블랙리스트의 대체물로서 화이트리스트건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역사의 공백으로 남는 쪽을 원할지 모른다. 공백은 역사의 실종이며, 궁극에는 인간의 실종이자 야만이다. 역사가 부재하는, 역사에 부재하는 그리고 역사를 거부하는 인간 자신의 야만 말이다.


- 주요 참고문헌 -
Red Detachment of Women, Cultural Revolution / https://en.wikipedia.org
Acting the Right Part: Political Theater and Popular Drama in Contemporary China, Xiaomei Chen, Hawaii Univ. Press, 2012
Mao's Great Famine, F. Dikoetter, Bloomsbury, 2010
Tombstone: The Great Chinese Famine, Jisheng Yang, FSG, 2012
문화대혁명사, 진춘밍 외, 나무와숲, 2005
진인각, 육건동, 사계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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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_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매카시즘이라는 악명의 블랙리스트

 


김채현_춤비평가


 “미국 국무부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 명단이 내 손아귀에 있다.” 1950년 2월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1908-57)는 어느 연설에서 이렇게 폭탄선언을 하였다. 1945년 제2차대전이 끝나고 알다시피 당시는 이른바 철의 장막이 동유럽에 내려쳐지면서 미국과 소련의 동서 냉전(冷戰)이 고조되던 초긴장의 시기였다. 미국의 적대국인 소련의 스파이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국무부에 200여 명(일설에는 60명 정도) 암약하고 있다는 그런 주장은 미국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로부터 5년 동안 미국은 매카시즘이라는 파괴적 수렁에 갇히게 된다.


 매카시즘은 20세기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한 대목을 이루며, 블랙리스트의 역사에서도 그렇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엉터리없이 억압하려든 매카시즘은 선동주의의 대명사였다. 수년간 미국민들의 이목을 솔깃하게 집중시킨 매카시의 주장은 결국 근거가 미약한 선동(煽動)으로 인식되었고 그에 염증을 절감하고 넌더리가 난 여론과 동료 정치인들이 등을 돌리자 매카시즘은 패퇴하였다. 매카시가 처음 블랙리스트를 폭로했을 때 자기가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직접 조사해서 작성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 정부 기관 등의 이런저런 조사 문건에 올려진 이름들 중에서 그는 자신의 추정에 따라 공산주의자로 지목한 블랙리스트로 가공해서 공공의 처벌을 공개적으로 선동하였다.
 미국에서 공산당은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 소련 공산 정부가 들어선 후인 1919년에 결성되었다. 1929년 발생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 민주당의 루즈벨트 대통령 행정부가 뉴딜 정책을 통해 방만한 자유주의 경제에 수정을 가하던 1930년대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정부 기관에 있다는 시각이 없지는 않았다. 이 시기 미국 공산당은 노동 운동을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이후 제2차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미국이 소련과 동맹을 맺어야 했던 사정도 있어서 미국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여론은 강하지 않았다.(당시 미국 공산당은 당원수가 사상 최대치인 7만5천이었고, 1950년에는 3만 정도였다. 민주-공화 양당이 주도하는 미국에서 공산당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작았다. 지금 미국 공산당은 2000명 정도다.)
 그러나 제2차대전이 끝나고부터 소련과 적대 관계에 놓이자 미국에서 반공(反共; 공산주의 반대)은 주도적 흐름을 이룬다. 그전에 제2차대전 시기에 미국판 나치스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 하원은 반미(反美)활동조사위원회를 운영하였다. 제2차대전이 끝나자 이 위원회는 그 대상을 공산주의자로 바꾸어 조사 작업을 지속하였다. 북한에 이어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고 동유럽의 공산화가 굳어지던 그 시기에 미국 정부도 공산주의 침투를 바짝 경계하며 공무원들에게 정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 터에 매카시가 던진 문제의 공개 발언으로 미국 정부의 노력은 깡그리 무시될 위기에 처한다.
 그 진위를 떠나 매카시의 발언은 국기(國基)를 흔드는 중대 발언이었고, 미국 상원은 즉각 청문회를 실시하였다. 자료에 따르면, 그가 애초 폭로한 블랙리스트 명단의 대부분은 3년 전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미국 하원에 제출한 기밀 취급자 명단 자료를 재가공(소문을 사실인 듯이 제시하고 공산주의 경향의 소유자를 공산주의자로 바꿔치는 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원 청문회에서 매카시는 현란한 수사를 구사하면서도 실체적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였다. 상원 청문회는 그가 제시한 명단의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도 용공(容共) 인물도 아니며 미국 국무부는 효율적인 기밀 보안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매카시의 폭로 내용은 사기이자 거짓이라 결론지었다.
 그래도 매카시는 물러서지 않은 채 공산주의자 조사 작업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덩달아 자신에 대한 대중의 호응이 계속 상승하자 국무부 장관과 심지어 대통령까지 용공 인물로 지목하게 되는데, 1954년 1월에는 여론의 절반이 그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미국 정부가 그에게 적극 맞대응하지 않자 그는 마침내 육군성 장관을 상대로 군 인사 문제를 트집잡았다. 이에 발끈한 미국 육군은 대통령과 행정부가 전전긍긍하던 기존의 입장을 벗어나서 매카시를 오히려 청탁 혐의로 고발하기에 이른다.

 



 그 고발에 상응하여 상원은 청문회를 개최하였다. 36일 동안 전국에 생중계된 청문회에서 그는 증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미국인들은 그가 약자를 괴롭히고 난폭하며 정직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판단을 현장에서 갖게 되었다. 그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으로 급변하는 것과 아울러 그해 말 미국 상원은 매카시가 상원을 치욕과 오명으로 실추시켰다는 이유를 들어 규탄하는 결의를 민주당, 공화당을 막론하고 절대 다수의 찬성투표로 통과시켰다.
 매카시가 스스로 그리고 보좌진을 통해 수집한 블랙리스트는 미국 연방 정부 기관을 비롯하여 가히 사회 각 부문의 전방위에 걸쳐 있었다. 노동계와 문화계, 영화계, 학계, 그리고 행정부의 주요 인사 가운데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 동조자, 국가에 불충한 인물이라 의심되는 사람은 그의 블랙리스트에 포함되었다. 블랙리스트의 수집 대상이 표면적으로는 공산주의자 또는 반미 인물이었지만, 실은 자유주의자, 노동조합원, 흑인 민권운동가, 페미니스트, 그리고 동성애자까지 겨냥해 수집 범위는 아주 광범위하였다. 쉽게 말해, 매카시적 신념이나 매우 특정하며 편협한 보수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블랙리스트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정치적 비판이나 반대 의견을 통제할 목적으로 매카시처럼 합당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국가 전복이나 반역 혐의로 몰아가는 일련의 부당한 행위는 일반적으로 매카시즘으로 정의된다. 당시 1950년대에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 찰리 채플린, 아인슈타인, 시인 알렌 긴스버그,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 소설가 토마스 만, 영화인 오손 웰스도 매카시즘에 시달렸다. 매카시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통계에 의하면, 수백 명이 투옥되었고, 1만~1만2천 명이 실직하였으며, 동성애 혐의자도 수천 명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실직하였다.
 그리고 영화계에서는 300명 이상의 배우, 시나리오작가, 감독이 비공식적인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탓에 취업을 거부당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선박에 승선하는 승무원과 부두노동자 3000명이 타인의 고소나 혐의 제기(고소나 혐의 제기 당사자는 신원 비밀이 보장되었음)에 따라 심리(審理)를 받은 끝에 일자리를 잃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탐정소설작가 겸 방송작가 더실 해밋은 제1차, 제2차 대전에 모두 참전했던 인물이다. 그는 체포된 미국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보석금을 모금하였는데, 보석금 기부자 명단 공개를 거부해 22주를 복역하였고 그 후 매카시의 상원위원회에서도 그는 그 명단 공개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매카시의 측근들이 국무부 도서관에서부터 해밋의 책을 치울 것을 요청했고, 그의 방송 시리즈는 중단되어 주요 수입원이 없어졌다. 이 작가는 1961년 가난 속에서 생을 마쳤다.
 비록 5년으로 그치긴 했어도 위의 통계와 정황들로 미루어 매카시즘 5년을 악몽 아니면 단두대로 겪어야 했던 사람들도 흔했을 것 같다. 매카시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 미중앙정보국(CIA)의 어느 감찰관은 회고하기를, “당시 분위기는 맹렬한 비난과 공판이 단두대로 이어지던 프랑스 혁명 때와 유사하였다. 워싱턴에 실제 단두대는 없었지만, 개인 경력이나 삶 전체가 파괴된다는 점에서 단두대보다 훨씬 심한 상황이었다”고 하였다.
 매카시의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서 고문이었던 20대 청년 두 사람은 그래도 명문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었다. 매카시즘이 한창이던 1953년 봄 그들은 유럽 7개국에 소재한 미국 공보원(USIS) 도서관을 방문하고선 200만권의 도서 중 30만권이 ‘친공산주의’ 작가 작품이라 규정하고 모두 싹 치울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당시 전쟁의 폐허에서 회생하던 유럽에서 미국 출판물이 몹시 아쉬웠던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 미국 국무부도 마지못해 그들의 요청에 순응하였다. 그해에 USIS가 해외로 보낸 도서 수는 이전의 매년 평균치 11만 9913권에서 고작 314권으로 급전직하했다고 한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여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진흙탕에서 맞대응하기를 자제하며 미국민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다. “분서(焚書)하는 무리들에 가담하지 마시고... 도서관에 가서 아무 책이나 읽어도 염려하지 마세요.”

 



 매카시가 1950년에 폭탄선언을 하게 된 동기는 자신의 정치적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그는 경력위조, 명예훼손, 로비스트의 금품 수수, 음주추태 등으로 정치적 사면초가에 몰려 정치 생명이 끝난 것으로 여겨졌다 한다. 충격 요법을 통해 4년 동안 미국을 비극과 공포의 수렁으로 빠뜨려 넣은 것과는 극히 대조적으로 자신은 일시적으로 정치 생명을 회복하였다. 1954년 말 상원에서 불신임 결의를 받은 후에도 그는 공산주의 비난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더 이상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그 여파로 알코올 중독에 빠진 그는 2년 후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매카시의 주장에 대해 부분적으로 진실을 인정하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당시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보면 매카시 블랙리스트 가운데 공산주의자가 소수나마 없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매카시즘의 폐해는 막심하였고, 그로 인한 개인들의 희생은 누가 보상해줄 수 있단 말인가. 국가 안보를 위해 블랙리스트가 얼마간 용인될 수 있을지 몰라도, 매카시 경우처럼 비정상의 혼이 마녀사냥 하듯 자행하는 블랙리스트로는 국기마저 위태로울 것이다.
 미국 국내외에서 공산주의와 맞서서 공산주의로부터 안전한 자유 국가를 만든다는 매카시의 블랙리스트는 역사 연구가 프랜시스 손더스의 지적대로 냉전시대에 표현의 자유를 선도한다는 미국의 위상을 일거에 무너뜨린 엄청난 우를 범하였다. 더욱이, 그의 블랙리스트는 증거와 사실은 아랑곳없이 제 편리할 대로의 추정과 편견을 절대시함으로써 반공을 선도하기는커녕 당대 미국을 공포로 몰아넣고 상당수 개인들에게 비극을 초래하고 국가를 심각하게 분열시켰다. (김채현)


- 참고문헌 -
McCarthy, McCarthyism / www.wikipedia.org
Dance for Export, N. Prevots, Wesleyan Univ. Press, 1998
문화적 냉전, 프랜시스 손더스, 그린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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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_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악마와의 거래, 블랙리스트 그 책임을 묻는다

 


김채현_춤비평가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에 몰두하고 법에 어긋난 검열을 자행하는 자들은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 건가? 그런 혐의를 받는 자들은 언필칭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 자기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기 일쑤다. 이런 태도는 그들도 블랙리스트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한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런 일을 서슴지 않는 것은 그 무엇에 홀린 탓이다. 여기서 그 무엇이 악마 같은 권력의 명령, 권력에의 협력, 권력에의 아부, 권력으로부터의 반대급부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름: 000, 거주지: 베를린, 직업: 무용가, 신분: 1/2유태인. 이름: △△△, 거주지: 비엔나, 직업: 합창단 가수, 신분: 1/4유태인. 이름: □□□, 거주지: 베를린, 직업: 미술가, 신분: 순수유태인과 결혼. ...” 독일 아리안족이 아니면서 유태인과 결혼한 예술인으로서 독일 나치 정권의 공연예술위원회에서 배제된 명단의 일부이다. 나치 정권의 제국문화원(RKK)이 1940년 8월 작성한 이 명단은 모두 62명의 신원을 담고 있다. 해당 문건은 베를린의 기록물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블랙리스트 역사에서 나치스 역시 악명이 높다. 히틀러의 독일 순혈주의(純血主義)라는 기괴한 망상은, 주지하듯이, 아리안족을 유일하게 가치 있는 민족으로 맹신함으로써 그 이외의 민족을 노예화하거나 멸종시키고 궁극에는 세계 정복의 명분으로 내세워졌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최우선 멸종 대상으로 유태인을 지목하였고, 나치스가 자행한 유태인 학살로 600만의 생명이 희생당했다.
 나치스의 블랙리스트는 물론 히틀러의 집권으로 시작되었다. 독재자, 악마, 전쟁광 등 온갖 악명만이 어울리는 그는 그래도 한 나라의 정치인이었다. 그 같은 지독한 정치인의 집권 과정은 전광석화(電光石火)의 작전과 다름없었고, 당대 독일의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나치스의 블랙리스트 작업은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마음대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33년 1월 독일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당시 국내 경제와 정치의 극심한 혼란상을 수습하는 타협책으로 나치 정당 대표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하였다. 수상에 임명되자 곧장 히틀러는 나이든 대통령을 압박하여 시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는 긴급명령을 내리게 하고 선거를 실시하여 나치당이 독일 의회 다수당이 된다. 몇 달 동안 여러 정당들을 겁박해서 해산시켜버리고 그해 7월 그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스)이 독일의 유일 합법 정당이 된다. 다음해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노환으로 죽자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고선 곧장 총통(Fuehrer)으로 군림한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제3제국(Drittes Reich)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나치스가 의회 다수당이 된 1933년 3월 제국선전부가 설치되고 장관에 요제프 괴벨스가 임명되었다. 괴벨스는 일찍이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로 선동정치에 뛰어났고, 제3제국에서 문화 분야를 주무르며 히틀러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제국선전부는 방송, 언론, 영화, 연극, 무용, 문학, 미술, 음악 등을 관할하는 정부 부서로서 쉽게 말해 오늘날 여러 나라에 있는 문화부 같은 곳이다. 그해 11월에는 선전부 안에 제국문화평의회를 설치해서 괴벨스가 의장을 맡았고, 그 2년 후 제국문화평의회를 제국문화원(Reichskulturkammer, RKK)으로 변경해서 방송, 언론, 영화, 공연예술, 문학, 미술, 음악을 제각각 장르별로 위원회가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 장르 위원회 가운데 공연예술위원회는 무용, 연극, 뮤지컬 등의 공연 활동과 단체 관리를 전담하였다.

 



 베를린의 독일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어느 문건에서는 검열의 사례가 목격된다. 1942년 11월 나치스 제국선전부의 공연예술 부문 담당자가 책임자에게 올린 보고서이다. 두 무용가의 독무 소품들로 구성된 공연을 관람한 바로 다음날 작성되었다.(무용가 인명은 모두 A, B로 익명 처리해서 인용함)
 “... A는 5년 전에 입신한 매우 인상적인 무용가이고 히틀러 총통을 위해 춤추어 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목매달린 자를 위한 자장가〉란 제목의 작품에서 제가 이해한 바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유산(流産)을 위한 자장가〉라고 제목을 붙이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이후 공연에서는 그렇게 제시될지도 모릅니다... A는 심각한 무용가이기에 무용에서 제시된 이미지는 전적으로 비틀어진 이미지였습니다... B는 처음에 3편을 추었습니다... 간편한 일상복 차림의 그녀는 무대에 서서 젊은 여자 혹은 아내가 하는 작별 인사를 묘사하였습니다. 상상 속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 여성은 지금은 없는 연인이 천신만고의 위험에 처하는 것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무대에서 완전히 쓰러짐. 저는 이런 스타일의 춤이 우리들(나치스)의 생각과 어긋난다고 믿습니다... 우리라면 그런 식의 드라마를 금지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재능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도 피아니스트가 볼셰비키(러시아 공산당 경향)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우리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그런 식의 무용 공연도 불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장래에는 무용 발표회가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제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일 히틀러! 보고자 서명.”
 1933년 3월 제국선전부가 설치된 것을 필두로 독일의 학교와 대학에서 유태인 재학생 비율을 1.5%미만으로 제한하고 나치즘 반대 성향의 서적을 소각하는 것을 시작으로 7월에는 모든 무용 교사들을 나치스 교사 연맹의 산하 협회로 조직하는 것과 같이 독일에서는 모든 예술을 국가 기구 속으로 편입해서 통제하는 체제가 시작되었다. 1937년에는 ‘퇴폐 미술 전시회’를 독일 대도시에서 장기간 순회하며 열고 현대미술 600백 점과 그 작가들을 조롱하고 모독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당대 독일 춤계를 이끌던 루돌프 라반과 마리 뷔그만은, 나치스 독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아랑곳 않는다는 듯이, 나치스 체제 내에서 각자 우월을 인정받으려고 경쟁에 몰두하는 모습도 보였다.(결국 라반은 1937년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뷔그만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끝내 나치스 우두머리들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였다.)
 나치스의 전체주의적 관리 체제는 문화예술을 철저히 통제하는 법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법규에 의한 제재, 예술인 스스로의 자기 검열도 모자라 나치스는 유태인 혈통, 동성애자, 반(反)나치 성향의 예술, 현대 예술을 나치스 기준으로 도처에서 색출하고 추방하는 작업을 집요하게 진행하였다. 나치스 시대는 독일뿐만 아니라 인류의 천인공노할 수치이다. 지금도 그 시대를 독일인들은 말하기 꺼려하며 회피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암흑시대는 당대 예술인들 스스로 회상하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은 그래서 기록에 남기고 싶지도 않은 ‘공백기’로 비워져 있다. 당대 독일 무용인 몇 사람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봐도 그 시기 활동상에 대한 서술은 매우 허술하거나 간략하다. 이 공백기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지금, 독일에서도 과거 청산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악마와의 거래 산물인 블랙리스트와 검열은 이처럼 일국의 문화예술을 공백기로 몰아넣는다. 문화예술을 보호하고 지원하며 진흥에 앞장서야 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놀랍게도 블랙리스트에 순응하고 이를 적극 집행했다는 증언들 앞에서 우리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누구를 위한, 어느 나라의 문화체육관광부이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인지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2016. 1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