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몸을 통제하라,
북한의 집체무용 아리랑 공연 읽기
임수진

 수 만 명의 몸들이 움직인다. 작고 마른 아이들이 시종일관 웃으며 아슬아슬한 기교를 부리고 거대한 군무는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훈련되어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하는 이 몸들은 사람의 것이라기보다 로봇이나 꼭두각시 인형들의 집합이라 여겨진다. 이 몸들의 뒤쪽에 자리한 카드섹션의 또 다른 만여 명의 아이들은 공연 내내 손에 쥔 카드를 뒤집으며 북한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나라인지를 관객들에게 쉴새 없이 알려준다. 무용수들이 거대한 꽃과 강, 산 등 아름다운 형상들을 만들어낼 때 마다 박수 갈채를 보내는 관객석에는 북한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그리고 그 중앙에는 아버지가 그랬듯 흐뭇하게 공연을 관람하는 김정은이 자리하고 있다. 바깥 세상에는 수 백만명의 관객들이 인터넷을 통해 그들을 바라본다. 왜 이 수많은 몸들은 이토록 압도적이고 기괴한 작품의 일부분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의 몸을 제한하고 조종함으로써 독재자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2002년 4월, 故김일성 주석의 9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처음 시작된 북한의 아리랑 공연은 무용수, 학생, 노동자, 군인 등을 포함해 약 10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이루어진다. 약 두 시간동안 진행되는 공연 내내 이 셀 수 없이 많은 몸들은 故김일성 주석의 탄생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간의 북한의 역사를 보여주며 나아가 북한이 얼마나 발전된 나라인지, 그들의 군인들이 얼마나 용감한지, 그 곳의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쉴새 없이 제시한다. 북한과 독재자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한, 믿기 힘든 거대한 스펙타클에 동원되는 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전문무용수가 아닌 노동자, 군인, 학생들이며 이들은 수 개월의 준비기간을 갖고, 공연 시작 2주전 부터 리허설을 한다. 수 만명의 몸들이 혹독한 연습과 희생을 통해 꼭두각시 인형이나 로봇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타클은 이 사회의 대표 관광상품으로 자리잡았다.1)



안무가와 무용수의 정치적 관계 확장하기


 아리랑 공연에 참여하는 수만명의 몸들은 정치적이다. 이는 단순히 독재자의 지배아래 살고 있는 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안무가와 무용수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정치적 특성이 이 거대한 집체 무용에도 고스란히 반영이 되며, 독재 국가의 특성으로 인해 그것은 더욱 두드러진다. 먼저 이러한 무용의 정치성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안무가와 무용수가 분리된 역할을 수행하며 한 작품에 참여하는 일반적인 무용 공연의 경우를 살펴보자.
 안무가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안무에 무용수들을 가둔다. 그는 무용수의 몸을 통제할 수 있는 지배적인 위치에 놓인다. 관객들이 바라보는 무대위의 자유로운 무용수들의 몸과 움직임은 안무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만 자유롭다. 이러한 안무가와 무용수 사이에 발생하는 힘의 관계에 대해 여러 접근들이 시도되고 있는데 먼저 안드레아 레페키(Andre Lepecki)2)는 그의 글 ‘아파라투스로써의 안무(Choreography as Apparatus of Capture)’를 통해 안무란 그저 몸의 테크닉이나 법칙, 동작의 엮음이 아니라 몸을 통제하고 캡쳐하는 ‘아파라투스(Apparatus)’라 주장한다.3) 또한 안무가 갖고 있는 이상한 힘, 안무가가 현장에 없을때에도 무용수로 하여금 절대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안무의 힘이 과연 무엇인지 질문한다는 제롬 벨(Jerome Bel)은 그러한 이유로 직접 안무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무용수들에게 그것을 하게 했다. <베로니크 두아노(Veronique Doisneau, 2004)>, <이자벨 토레스(Isabel Torres, 2005)>, <세드리크 앙드리외(Cedric Andrieux, 2009)> 공연 무대위의 베로니크와 이자벨, 세드리크는 안무가에 의해 제한, 통제된 몸이 아니라 주체 그대로 존재한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고, 스스로 선택한 위치에 서서 원하는 춤을 춘다.
 한편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는 무대위의 무용수의 몸과 움직임, 동선 등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감까지도 안무가에 의해 조종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4) 마크 프랭코에 따르면, 2003년 10월 2일 뉴욕 브룩클린 아카데미 오브 뮤직(BAM, Brooklin Academy of Music)에서 개최된 공개 포럼에서 포사이드는 안무가가 무용수를 큐레이팅 할 수 있는 힘, 안무가와 무용수의 관계가 바로 무용과 정치가 만나는 지점이라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아리랑 공연에 동원되는 엄청난 수의 몸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찰해보자. 무용수를 조종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안무가는 수만명의 몸을 통제하고 제한한다. 게다가 이 공연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고립되어있는 독재세습국가의 대표 공연이라는 것을 전제해본다면 그 안무가는 바로 독재자를 대리하는 역할을 할 것이며 나아가 이는 곧 단 한사람, 독재자를 위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 공연에 동원되는 몸들이 강제성을 띄었다는 것인데, 이는 실제로 이 공연에 참여하는 수 만명의 공연수들이(특히 어린 아이들)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탈북자 김철웅 피아니스트는 평양국립교향악단 시절의 경험과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 공연에 동원되는 청소년들과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가혹적인 인권유린의 실태에 대해 보도했다.

“아리랑 공연을 위해 동원된 청소년과 어린이들은 통상 새벽4시부터 다음날 아침1-2시까지 하루 20여시간의 맹훈련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적으로 받는다…공연동작을 잘 하지 못한 아이들은 주먹이나 몽둥이로 구타당하기 일쑤이며 연습도중에 화장실도 못 가게 하여 소변을 참다가 방광염이나 배뇨장애에 걸리기도 한다. 또한 생리를 하거나 과체중인 여학생을 공연 중 남학생이 들어 올리는 동작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피임약을 강제로 복용시키거나 식사량을 제한하는 등 반인륜적 행위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하기도 한다.”5)

 또한 평양 출신 탈북자로, 2002년 아리랑 공연의 첫 시작부터 2010년 탈북전까지 매번 이 공연을 관람해왔을 뿐만 아니라 공연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왔다는 익명의 필자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짓밟는 이 가혹한 공연을 강도높게 비판하였다.6)

“공연 일에 가까워지면 공부를 중단하고 하루종일 훈련을 진행하는데 추위와 더위, 장마에 관계없이 훈련에 내몰리게 된다. 이들 중 그 누구도 훈련에 대한 거부권은 있을 수 없으며, 훈련에 빠지거나 성실히 하지못한 대상에 대해서는 정치문제와 연결시켜 강한 비판을 받는게 보통이다. 정치문제라는 것은 이 공연준비에 임하는 태도가 집권자에 대한 견해와 관점문제(충성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훈련은 물론이고 실지 행사에서의 실수는 반당적, 반혁명적 행위 정도로까지 평가된다. 어린 아이들인 경우 훈련에 빠진다든가 잘 참가하지 않으면 담당 선생과 부모들에게 까지 비판받는다.
학생들의 공연 연습에서 교원들은 학생들에 대해 예의를 따로 두지 않으며, 욕설과 매는 보통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심각한 수준의 위생상태를 지적하는데, 십 만명의 공연수들과 카드 섹션에 참가하는 만 여명의 학생들은 자유로운 이동은 고사하고 화장실 조차 갈 수 없어 그대로 옷에 변을 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수용인원을 훨씬 초과한 공간을 빽빽히 채우고 있어야하는 턱에 오물냄새와 땀냄새가 뒤 섞이는 최악의 환경이며, 특히 카드섹션의 학생들은 관객의 입장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몇 시간동안 카드를 들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외에도 북한 아리랑 공연의 심각한 인권유린을 지적하는 보도들이 셀 수 없이 나오고 있지만, 이제 이 공연은 북한의 대표적인 문화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그 시작이 고 김일성 주석을 향한 충성심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해외 관광객 유치라는 목적 또한 포함된 것인데, 수 만명의 몸을 통제하고 고통속에 빠진 그들을 상품화 하는 것이 독재자에게는 매우 쉽고 간단한 일이라 비춰진다. 안무가가 무용수들의 몸을 통제하고 제한할 수 있다는 것, 안무가가 만들어놓은 안무를 통해 무용수의 몸과 움직임, 그리고 존재감과 정체성까지도 통제된다는 무용이 지닌 정치성은 북한의 독재자로 인해 극대화되어 공연예술, 문화 콘텐츠라는 명목하에 수 만명을 통제하는 또다른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몸의 통제는 나아가 이데올로기의 통제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몸의 통제에서 이데올로기 통제로


 아리랑 공연은 북한 사람들의 몸을 거대한 규모의 집체 무용7)으로 선보임으로써 국가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엄청난 고통과 희생이 수반되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십 만여명의 공연수들은 공연의 준비기간부터 리허설, 그리고 본 공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통해 한명의 안무가, 즉 독재자로부터 극단적인 몸의 통제를 당하며 그의 절대적인 힘과 그 안에서 저항불가능한 무기력한 자신들의 위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동시에 공연 내내 개개인이 모여 큰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반복하면서 전체 속에서 비로소 개인의 존재가치를 찾는다는 전체주의를 경험한다. 이는 즉 그것에 참여하는 수 만명의 몸을 통제함으로써 독재자가 얻고자 하는 가치이자 동시에 그것을 당당히 바깥세상에 공개함으로써 자신이 지배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지배자로써 자신의 절대적인 힘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이라 해석할 수 있다.

“무대 위의 무용공연과 일상 생활의 연장선을 부정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인간 활동이 그렇듯, 무용 역시 정치적인 힘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8)

 아리랑 공연으로 인해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보도하고, 인권유린을 이유로 이 공연의 폐지를 주장들은 매우 많다. 반면 이 글은 아리랑 공연에 동원되는 십 만여명의 몸들과 단 한명의 독재자의 관계를 무용수와 안무가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반영해 살펴보고, 나아가 공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수 만명의 몸들의 통제와 제한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통제로 이어진다는 시각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꼭두각시 인형으로 전락해버린 십 만명의 몸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타클을 관람함으로써 관객들은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다시 한번 경험하게되며 그것은 곧 독재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결과라고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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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연구를 위한 아리랑 공연에 대한 정보는 여러 공연 영상과 이를 다루는 기사와 논문, 북한에서 직접 관람한 이들의 리뷰, 탈북자들의 인터뷰 등의 자료 조사를 토대로 얻었다.
2) 뉴욕대학교(NYU) 퍼포먼스 연구(Performance Studies) 교수
3) Andre Lepecki, Choreography as Apparatus of Capture, TDR: The Drama Review, vol51, pp119-123
4) Mark Franko, Dance and the Political in Dance Discourses: Keywords in Dance Research. London: Routledge, 2007
5) 김철웅, 북한 ‘아리랑 축전’은 노예공연, 미주 중앙일보, 2010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078515
6) 북한 아리랑 공연의 실체, 아시아프레스, 2013 http://www.asiapress.org/korean/2013/07/-2-4.php
7) 집체무용은 북한 뿐만 아니라 1930년대 미국이나 나치 독일 등 사회주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자주 관찰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8) Isabelle Ginot, Identity, the Contemporary, and the Dancers in Dance Discourses: Keywords in Dance Research. London: Routledge, 2007, p251


** 이 글은 필자의 석사논문 Whose Bodies are these? Toward a mass performance, Arirang Festival, in North Korea의 일부를 발췌, 정리한 것이다. 

임수진
한양대학교 무용학과 학사, 뉴욕대학교(NYU) 퍼포먼스 연구(Performance Studiese)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과대학교 예술학 협동과정 박사과정 중이며 월간 몸 기자로 활동중이다. 퍼포먼스 연구 및 문화연구의 방법론적 접근을 토대로 무용을 비롯해 다양한 공연예술, 융복합 장르 예술 등을 연구중이다.
2013. 0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