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세컨 내이처 댄스 컴퍼니의 〈보이체크〉
증류수(水)와 증류주(酒)의 사이에서
이지현_춤비평가

 보이체크가 나타났다.
 수많은 무대와 영화로 심심치 않게 다뤄지던 뷔히너의 문제작이 우리의 춤공연으로 나타났다. 작년부터 주로 실존적인 희곡을 바탕으로 춤작품을 만들어 온 김성한의 2번째 시도인 보이체크는 그가 이제 작품세계의 주춧돌을 놓을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애정어린 기대를 하게 되는 무대였다. 연극과의 접점을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연극의 틀과 춤의 틀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해온 우리의 춤극들이 언제부터인가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측면을 넘어서는 깊이에 대한 결여감을 주고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어떤 신선한 기대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원작을 갖는 다는 것, 그것도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는 철학적인 함축을 갖고 있는 작품을 선택해가고 있다는 것은 검증된 작품으로 철학적, 실존적으로 되돌아 볼 수 있는 안전한 참고서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신뢰를 주는 것이면서 다져진 습작으로 이후에 좀 더 깊이 있는 접근을 해보겠다는 것을 살짝 암시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뷔히너는 19세기 초 독일의 3대째 의사집안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조건에서 자랐다. 24살에 요절하기 직전에 쓰여졌던 <보이체크>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정신병력자의 살인사건에 기초한 작품으로 뷔히너의 독일사회의 과학 맹신주의와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젊은이다운 예리한 비판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미완성 원고의 형태로 있다가 뷔히너 사망 후 40여년이 지나서야 출간되고 무대에 올려졌던 <보이체크>는 사회, 지식, 과학, 귀족 등에 의해 모멸되어지고 파괴되어가는 ‘인간’ 보이체크를 사실적으로 다룸으로서 환경에 무력하기만 한 인간의 절망상태를 살인이라는 사건을 통해 강렬하게 보여준다.
 독일 현대극의 시초로 추앙받는 이 작품은 현대인의 존재적 나약함을 일찌감치 예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리얼리즘극에서 과도한 의도와 교훈을 제거하고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본질에 천착하면서 과도한 생략으로 주제의식을 더욱 부각시키는 자연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낸 작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주제의 선명함(의사-과학이 환자를 파괴시키는 현실고발), 성서 이야기를 은유한 것 같은 인간 본질의 문제(보이체크를 예수로, 마리를 마리아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를 다루면서도 변용과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여백이라는 요소를 갖고 있기에 작품의 생명력을 연장시키고 있는 특이한 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컨 네이쳐(김성한 안무, 오선명 연출, 홍석환 대본)의 <보이체크>는 이 작품을 새롭게 해석한다. 해석의 필터는 관계와 사랑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보이체크, 마리와도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그래서 급기야 사랑이 살인이 되는 극단적인 사건을 다루면서도 특별히 인물 형성에 뜻을 두지 않는다. 다만 보이체크를 주인공으로 부각시켜 그를 둘러싼 인물들은 그저 환경 덩어리로 다루면서 보이체크의 입장에서 관계의 무채색이 갖는 공허함을 보여준다.
 무대 밖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하게 마리와 보이체크를 부르는 소리들로부터 시작된 무대는 보이체크에게 불행을 예고한다. 마리의 부정과 보이체크의 환청은 이미 살인을 향한 예고였으나 세컨 네이처의 <보이체크>에서 살인은 사건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사실 뷔히너는 보이체크가 가난과 계급적 굴욕, 과학의 권위주의에 의해 정신병에 다다르게 되고, 그 결과 살인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이 작품에서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가 느꼈을 관계속에서의 차거움과 허무, 한 무대에서 벌어짐에도 어떤 관계나 충돌로부터 빚어지는 열기란 찾을 수 없는 그런 굳어있음과 무관함이 주를 이룬다.
 때론 무용수의 몸들이 연결되어 한몸처럼 동작이 이어져 서로의 몸을 터치하며 놀이처럼 이어지기도 하고 남녀가 벽에 붙어 농염한 사랑의 몸짓을 교환하지만 그것도 욕망의 헛돎만이 있을 뿐이다. 김성한은 작품의 무게와는 반대로 아주 편안한 음악-주로 샹송과 같은 노래 혹은 대중음악 pop-을 사용해 원작이 있다는 사실, 관계라는 추상적 주제를 다룬다는 긴장을 낮추려한다. 간결한 무대장치, 깔끔한 영상, 상쾌한 색감의 여성의상과 조명으로 전반적으로 밝고 깔끔한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원작과의 거리감에서 오는 긴장과 막막함은 쉽게 해결되어지지 못하였다.
 보이체크(이정훈)과 마리의 또다른 남자(이준철)이 잠시 연적으로서 소통되지 않고, 경쟁하는 것을 한방향으로 돌고 따라 돌고를 반복하는 졸이를 통해 보이체크의 바보같은 면을 노출시키거나 춤동작으로 경쟁함을 통해 보이체크의 모자란 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웃음을 주지만 갑작스런 돌출적인 희화화가 몸개그식의 장면으로 삽입되어 다른 장면과 단층을 형성한 채 전체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에 머물고 말았다.
 보이체크의 강렬한 주제인 가난, 고통, 광기, 살인, 동물적 본성 등은 이 작품에서는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근대화라는 강력한 파고앞에서 한편으로 발전을 향해 치달아가는 과학과 의학, 그것을 신봉하는 귀족과 학자와 그와는 반대측에서 발전에 존재를 희생해야 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비주류의 계층들은 정신이 파괴되고, 고립되어 빠져나올 수 없는 사회적 죄의 세계로 몰락한다는 원작과는 달리 세컨 네이처의 <보이체크>는 원작의 주제와 사건들을 증발시켰다. 그래서 원작은 관객에게 안전한 참고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춤작품울 이해하는데 많은 걸림돌이 되어 버렸다. 춤과 춤장면의 지극한 추상성은 그래서 더욱아련하고 모호하다.
 관계, 그리고 관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을 다루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접촉, 사건, 과정, 진행, 변화 등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톤의 동작, 무용수 위치와 배열에서의 균질의 연속에서 관계라는 주제는 잘 부각되기는 어려웠다. 원작이 담고 있는 사랑의 미묘한 심리인 질투와 광기, 살인이라는 강력한 이야기들의 과도한 탈각은 오히려 작품의 맛까지도 과도하게 증류시켜 무색무취의 것을 삼킨 기분을 준다. 순수한 증류의 힘을 느끼는 것도 엄청난 발효 후의 일이다. 파국으로 몰려가는 인간의 내면이 다뤄지고, 그것이 무대에서 발효되는 카오스 후에 김성한 식의 세련된 증류액이 한방울 한방울씩 떨어졌다면 얼마나 달콤하였을 것인가? 진정한 증류주(燒酒)가 필요하다. (전재: 한팩 리뷰, 2011. 8.)

2011. 08.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