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윤푸름프로젝트그룹 〈보다〉
시각 너머의 사유
김인아_<춤웹진> 기자
 우리의 기억이 온전한 걸까?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경험했던 것, 어떠한 인상을 감각을 통해 저장시킨다. 이렇게 의식 속에 간직하게 되는 ‘감각의 기록’은 우리에게 바르거나 옳다고 여겨지는 ‘기억’으로 차곡차곡 쌓여간다. 6월 23-24일,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에 오른 〈보다〉는 감각을 통해 인지하고 축적한 기억이 과연 온전한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안무가 윤푸름의 2년만의 신작이었다.
 리플렛의 시놉시스에서는 『다큐 사이언스』 ‘뇌의 착각’ 편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뇌는 과거의 경험과 시각 청각적 단서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조직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뇌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 뇌의 30%는 시각에 충당되어 신체가 보이는 것을 믿을지 다른 감각이 말해주는 것을 믿을지를 선택할 때 절대적으로 눈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시각에 편중된 표현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예로 ‘먹어보다’, ‘느껴보다’, ‘맡아보다’와 같이 행동을 이끄는 보조동사 ‘-보다’를 제시한다.
 〈보다〉는 시각에 치우쳐진 감각의 불균형을 영민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동일한 상황을 반복시켜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1부, 옵티컬 아트*의 착시를 이용해 ‘공간’을 기억하는 2부를 통해 보는 것에 의존한 나머지 시간과 공간을 왜곡시켜 인지하는 현상을 연출했다. 

 


 우리는 일어난 사건으로 시간을 기억한다. 아무 일이 없었던 시간은 마치 비워진 것처럼 기억하기 쉽지 않다. 1부에서는 동일한 사건을 시각에 의존해 인지할 때, 다시 말해 보이는 정도에 따라 사건에 대한 기억이 얼마만큼 달라지는가를 실험한다.
 블랙박스 극장 바닥에 사각형의 마스킹테이프를 붙여 보이는 곳(안)과 보이지 않는 곳(밖)으로 나눈다. 어릴 적 갖고 놀았던 인형과 장난감이 마스킹테이프로 구획 지어진 조그마한 프레임 안에서 밝게 빛난다.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릴 뿐 주변을 감싼 어둠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점차 사각 프레임의 크기가 넓어지고 조도가 올라간다. 어릴 적 기억을 환기시키는 무용수들의 놀이와 같은 퍼포먼스가 점차 드러나자 그때서야 똑같은 움직임이 이전에도 어둠 속에서 동일하게 일어났었음을 눈치 챈다. 관객은 시야를 한정지었던 프레임의 안과 밖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똑같은 구성의 행위(사건)를 반복시키는 것이 작품의 규칙이었음을 깨닫는다. 시각에 편중된 인지 감각은 동일한 상황이 있었던 지나간 시간을 다르게 기억하게 한다. 

 


 벽면에 붙여진 한 줄의 마스킹테이프. 2부는 1차원의 평면으로부터 출발한다. 노동에 가까워 보이는 테이핑 작업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된다. 하나의 선은 곧 담장을 형상하는 2차원의 입체적 공간으로 바뀌고 어느 샌가 나지막이 바람소리도 들려온다. 낮은 벽 사이를 파란색 테이프로 메우자 파도소리가 가세한다. 마치 담장 너머에 푸른 물결의 바다가 있을 것만 같은 상상으로 3차원 공간이 구현됐다. 퍼포머들은 쉬지 않고 벽면과 동일한 방식으로 바닥의 공간을 만들어 나간다. 벽과 바닥의 입체 공간에 계단 혹은 구름다리처럼 보이게끔 테이핑하고 하얀 색으로 흐르는 물을 형상화하여 비현실적인 4차원 공간을 그럴듯하게 완성했다.
 이쯤 되자 관객은 평면을 입체로 인식하는 착시에 빠져들고 만다. 비워져있는 평면에서 입체, 상상력을 자극하는 3차원과 4차원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작업을 지켜보며 관객은 형상을 기다리고, 공간을 사색하는 경험을 만끽한다. 퍼포머들의 움직임도 눈속임에 가담한다. 물웅덩이에서 천연덕스럽게 머리를 감고, 아슬아슬하게 구름다리를 건너고, 천장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벽면에 기대어 이동하는 행위들은 공간에 대해 다양한 사고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한 시간여 전개된 〈보다〉는 시각에 치우친 감각이 우리의 인식을 한정짓거나 착각하게 만드는 오류의 현상을 마스킹테이프를 이용하여 흥미롭게 제시하면서 인지와 기억의 불완전성을 재고하게끔 한다.
 무용작품에서 흔히 기대하는 움직임 테크닉과 무대구성은 없었지만 작업을 수행하는 퍼포머들의 충실한 무브먼트,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을 통해 장르를 뛰어넘는 확장된 창작 결과물로 나타났다. 이 새로운 창작물에 대해 객석은 여느 때보다 높은 집중력과 열기를 보였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로비에 모여 저마다의 다양한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관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다〉를 관람한 장수혜(문화예술 국제교류 코디네이터)는 “컨셉추얼 아트의 성격이 뚜렷이 보이는 작품이었다. 물론 요즘은 미디어프로젝션으로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마스킹테이프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무용수들이 옵티컬 아트를 직접 만들어 가는 과정이 오히려 더 흥미로웠다. 처음엔 제일 앞줄에 앉아 있었다가 착시효과를 감상하기에 뒤쪽이 좋다는 안내로 이동하여 관람했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해외진출 가능성이 높은, 기억에 오래 남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다〉의 첫 번째 작품 ‘감각의 기억_ 시간’은 오는 11월 뉴욕 92Y 하크니스 댄스 센터**에서 개최하는 'Dig Dance Series: Pan-Asian Program'에 안무가의 대표작 〈길 위의 여자〉와 함께 개막작으로 초청되었다. 보여주는 것으로 관객을 해소시키기보다, 보이는 것 너머 다양한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작업으로서 창작의 실험적 가치가 오롯이 전해지길 기대한다.

 

 
 

* 옵티컬 아트(Optical Art): 팝 아트에 대하여 옵 아트(Op Art)라 약칭되는 수가 많다. 시각적인 예술을 뜻하며 특히 착시(錯視)에 의해 시각적 효과가 나타나는 작품을 가리킨다.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 92Y Harkness Dance Center: 92Y는 뉴욕 소재의 세계 수준의 예술센터로서 지난 140년 동안 전 세계의 문화, 예술, 엔터테인먼트 에 관한 공연, 대담,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온 대표적인 현지 비영리 기관이다. 소속기관인 Harkness Dance Center는 1935년부터 마사 그라함, 엘빈 에일리, 머스커닝햄 등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무용단들을 프리젠트해 온 유서 깊고 중요한 극장이다.
사진제공_김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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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안무가 윤푸름
 
 

 

작품 〈보다〉는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작년에 사회적으로 많은 사건이 있었다. 주변 분들이 같은 시점에 같은 삶을 살며 정치적인 경험을 공유했음에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제각각 다른 면으로 그 시대를 기억하는 것에서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온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것인가? 혹은 환경에 따라 어느 쪽으로 치우쳐 기억되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작품은 기억에 대한 리서치로부터 시작됐다. 특히 신체에는 많은 감각 기관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뇌 기능의 30%가 시각에 의존하고 있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감각되어지는 모든 것에 보조동사 ‘-보다’를 써서 표현하고 있음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시각적으로 감각되어지는 것에 편중되어 말을 하고 행동하고, 몸은 이를 저장한다. 시각에 대한 접근이 다양한 사고를 촉발시키고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화 현상에서도 비춰지는(보여지는) 것에 쏠려있지 않나. 〈보다〉는 시각 중심의 감각 에너지와 언어에 대해 관객들에게 공연물로써 전달하는 방법을 실험한 작품이다.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시각에 치우쳐 감각되어진 것은 완벽하지 않다. 감각으로 인지된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면 자신이 본 것에 대해 확신하거나 고집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다르게 느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를 합치시키려는 소모적 논쟁조차 필요치 않게 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 서로의 다름을 존중한다면 불필요한 논쟁은 없어질지 모른다. 작품에서 감각과 인지의 불완전함, 기억의 오류를 드러내 궁극적으로는 서로가 바라보는 지점이 차이를 인식하고 다름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공연 후 주변에서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보다〉는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과 다른 접근법으로 작업을 했기 때문에 여러 분들께 피드백을 받고 싶었다. 시각을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기억하는 두 개의 파트를 통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서부터, 시간 공간 파트를 더욱 명확히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만 가지고 공연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 파트에 힘을 실어라, 두 번째를 강조해라 등 다양한 반응이 뒤따랐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내어주시는 것을 보면서, 적어도 이 작품이 여러 가지 사고가 가능하게끔 어떤 지점을 건드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미완성의 완벽하지 않은 과정 중의 작품이지만 이제껏 접근하지 않았던 방식을 실험한 것에 대해, 새로운 것에 대한 창작자의 호기심과 욕구에 대해 관심과 공감을 보내준 분들께 고마움을 느꼈다. 여러 분들이 해주신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된다.

안무자의 새로운 창작 시도가 엿보인 작품이었다. 작업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첫 번째 파트가 2주 만에 나온 작품이다. 여유가 있었다면 1부 작업도 더욱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나머지 2달의 시간을 두 번째 파트에 모두 쏟아 부었다. 시각예술인 옵티컬 아트가 2부에 들어간다.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디자인을 전문가에게 맡기지 못한 채 어떻게 테이프를 붙이고 원근법은 어느 정도를 써야하는지 등에 대해 자문만 구하게 됐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시각예술 하는 분들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테이핑 작업은 에너지 소모도 정말 많았고, 계산하고 균형을 맞추는 부분이 생각보다 정말 힘들었다. 좌절을 맛본 것 같다. 굉장히 추상적으로 선 하나의 느낌 안에서도 착시를 보여주고 싶었고, 완벽히 구현된 것보다는 좀 덜 구현된, 보는 이로부터 사고의 지점이 명확하다기보다는 ‘-인 것 같다’는 식으로 사고를 건드리기를 바랐다. 정육면체 도형에서부터 기호의 변형까지 굉장히 많은 경우의 수를 실험하면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매달려 집요하게 작업하고 싶었다.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공연이 1-2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매일매일 다른 착시를 실험하고 있었다. 공연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무대에 오를 연습과 준비과정이 이뤄지지 않다보니 무용수들이 많이 불안해했다. 안무가로서 마침표를 찍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관객이 이해하기 쉬운 착시로 가자. 개인적으로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다. 착시 작업이 오래 걸리더라도 더 많은 실험을 통해 추상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내고 만족스런 결과물을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공연이라는 것이 제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어서 결국 타협의 지점을 찾은 셈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무기로 작품을 만든다면 결과물의 만족도는 클지 몰라도 결코 새롭지는 않다. 창작자로서 새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내가 가진 무기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은 용기도 필요하고 과정 중에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기 일쑤다. 그럼에도 작업을 하면서 정신적으로는 굉장히 행복했다. 타협 후 공연물로 구체화하는 과정 중에서도 흥미로운 지점을 포착할 수 있었다. 1차원의 평면에서부터 2차원의 입체, 3차원의 상상과 4차원의 비현실적인 공간을 구현하면서 관객의 사고를 확장시킬만한 유의미한 결과가 도출됐다. 앞으로 이를 어떻게 보완하고 조금 더 다른 시도로 발전시킬 것인가가 과제로 남았다.

주요한 움직임 방법론은 무엇이었나?
추상적인 옵티걸 아트를 무대화 하는데 있어 움직임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와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착시이지만, 들어가 실연하는 퍼포머들에게는 평면이지 않나. 나와서 보고 들어가 움직이는 작업을 반복해야만 했다. 안무가로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를 고민할 때,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움직임도 그것이 5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제가 봤을 때 흥미롭지 않은 움직임이 나열되기도 했고, 무용수들도 착시를 강조하려다 입체에 갇혀 자칫 연기로 풀어지기도 했다. 두 번째 파트는 움직임보다 착시가 목적인(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다보니 점차 움직임이 없어지고 시각예술만 남게 되었다. 최소한의 방법론으로 현대무용 웜업 때 하는 무게이동 움직임, 나아가 무용수 각각 활성화되어있지 않거나 기능적이지 않았던 신체 부분의 쓰임을 넓히는 방식을 택했다.

무용작품에서 흔히 기대하는 춤 어휘나 구성을 볼 수 없었는데...
창작은 자유로워야 한다. 몸으로 하는 것에, 움직임만으로 구현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곤 했다. 창작에서는 몸에 갇힐 필요도 없고, 다른 장르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무용공연으로 한정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다. 창작 작업으로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시도가 펼쳐질 수만 있다면 굳이 장르를 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무용창작을 논하기보다 새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는 창작 공연물로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춤을 기대하는 관객 분들도 창작에 대해 보다 열린 생각을 갖고 공연장을 찾아와주시길 바래본다.

〈보다〉는 완벽하지 않은 과정 중의 작품이라고 했다. 향후 어떤 모습으로 재공연하게 되는지 궁금하다.
첫 번째 작품은 오는 11월에 뉴욕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지금은 정직하게 사각 프레임이 커졌는데, 각에 대한 예상 코드를 깨서 이리저리 다른 방향으로 틀어보고 만들어지는 공간도 변형시키는 변주를 꾀하고자 한다. 각도가 바뀌면서 사고가 불러일으키는 지점도 달라질 것이다.
두 번째 작품의 경우 테이핑이 진행될 동안 관객이 느긋하게 향유할 수 있고, 여러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갤러리에서도 공연해 보고 싶다. 한편으로 옵티컬 아트를 혼자 완성시키는 데에 역부족을 느꼈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는 시각예술 분야의 전문가와 공동 작업으로 작품을 발전시키길 희망한다. 관객의 사고를 불러일으킬 만한 지점들을 보다 깊이 고민하여 추상적인 테이프 선 하나에도 다층 다면적으로 사고를 확장·변형시킬 수 있도록 보완해 나갈 것이다.
김인아
한국춤비평가협회가 발행하는 월간 〈춤웹진〉에서 무용 전문기자로 활동 중이다.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하여 무용인 인터뷰를 포함해 춤 현장을 취재한 글을 쓴다. 현재 한예종에서 무용이론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2017. 0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