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고마키 마사히데, 한국 발레사에서 기억해야 할 이름
장지영_국민일보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지난해 9월 4~5일 부평아트센터에서 ‘제1회 동아시아 국제 발레 페스티벌’이 개최됐다. 인천시티발레단이 개최한 이 축제는 최근 한국에서 발레학원 기반으로 발전을 꾀하는 시티 발레단들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각각 시안 발레단과 고마키 발레단이 참가했다.
 고마키 발레단의 경우 지난 1990년 도쿄 고마키 발레단에 이어 2017년 국제 발레 아카데미로 이름을 변경했다. 축제 측에서 국제 발레 아카데미 대신 고마키 발레단이란 옛 이름을 사용한 것은 설립자 고마키, 즉 고마키 마사히데(小牧正英·1911~2006)가 한국 발레사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긴 인물로 옛 이름이 친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마키의 유산을 지켜가고 있는 국제 발레 아카데미아는 현재 고마키의 동생 기쿠치 다다오를 거쳐 조카인 기쿠치 소가 이끌고 있다. 참고로 고마키의 본명은 기쿠치 에이이치(菊池榮一)다.
 고마키 발레단은 이번 페스티벌에서 발레 뤼스의 대표작으로 유명한 〈목신의 오후〉를 선보였다. 1912년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안무하고 주역까지 맡은 〈목신의 오후〉는 고마키가 1949년 일본에서 초연 무대를 올렸다. 이번 〈목신의 오후〉는 고마키가 니진스키 버전을 토대로 안무한 버전을 기쿠치 소가 다시 무대에 올린 것이다.
 상하이 발레 뤼스에서 수석 무용수로 활동했던 고마키는 1946년 〈백조의 호수〉를 비롯해 여러 작품의 일본 초연 안무를 통해 2차대전 이후 일본 발레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그는 1967년 〈백조의 호수〉와 1983년 〈셰헤라자데〉의 한국 초연 안무를 맡는 등 한국 발레사와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일본을 통한 발레 수용 역사가 제대로 연구되지 않다 보니 중견·원로 무용인 일부를 빼면 이제 고마키 마사히데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왼쪽) 고마키 마사히데,   (오른쪽) 1967년 한국 공연〈백조의 호수〉신문기사




 한국에서 고마키와 관련된 자료는 고마키 발레단에서 활동했던 음악·무용 평론가 고 박용구가 ‘예술사 구술총서-박용구 편’에 서술한 내용, 〈백조의 호수〉 등의 공연 프로그램과 한국을 오갈 당시의 신문기사가 전부다. 게다가 ‘예술가 구술총서’에 나온 고마키 관련 내용 가운데는 부정확한 부분들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고마키를 적극 후원했던 인물로 도호그룹 사장 ‘고바야시 가쯔오(小林嘉津男)’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 자료에서는 찾을 수 없다. 도호그룹 창설자의 장남인 ‘고바야시 후사오(小林富佐雄)’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용구는 1955년 고마키 발레단 문예부장 시절 자신이 대본을 쓰고 고마키가 안무한 창작발레 〈니치링〉이 일본 발레사 최초의 창작발레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이후 발레 관련 논문이나 책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고마키만 보더라도 〈니치링〉 이전에 이미 1949년 〈수난〉 〈검무〉, 1950년 〈아메리카〉, 1955년 〈교향곡 4번〉 등의 창작발레를 만든 바 있다. 다른 안무가들까지 포함하면 창작발레의 수는 훨씬 늘어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 사업’과 관련해 해당 예술가들이 노령이다 보니 사실 관계를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과거를 미화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앞으로 고마키에 대해 잘못 알려진 정보를 수정하는 동시에 깊이 있는 연구를 기대하며 일본 자료를 토대로 그동안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고마키, 하얼빈 발레학교를 거쳐 상하이 발레뤼스 수석무용수로

고마키는 1911년 일본 이와테현 에사시에서 된장·간장 제조 및 장사를 하는 유복한 집안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연극과 춤을 좋아했던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연을 보러다니는 것은 물론 전통춤과 악기를 배우게 했다. 고마키는 1922년 11살 때 어머니와 도쿄에서 세계적인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의 공연을 본 것이 무용수가 되고 싶다는 계기가 됐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자유분방하고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부모를 졸라 도쿄에서 상업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 그림 대회에서 상을 받는 등 예술적 성향이 농후했지만 장남으로서 집안의 기대를 버리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쿄에 올라온 그는 학교 생활 외에 검도, 테니스, 그림, 러시아어 등을 공부했다. 특히 그가 몰두한 것은 각종 공연과 쇼의 중심지였던 아사쿠사를 다니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당시 스타 무용수였던 사와 모리노(1890~1933)에게 춤을 배우기도 했다.
 사와는 제국극장 가극부에서 이탈리아 출신 발레 교사 조반니 비토리오 로시에게 훈련받았다. 사와는 1933년 조선 평양 금천대좌 극장에서 〈빈사의 백조〉 공연 중 돌연사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후대 연구에 따르면 공연을 앞두고 인근 여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을 언론이 드라마틱하게 부풀렸다고 한다.
 도쿄 상업학교를 마친 그는 막연히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본 1권의 책이 고마키에게 방향을 알려줬다. 일본 음악평론가의 시조로 알려진 오타구로 모토오가 쓴 책 『러시아 무용』이 그것이다. 발레 뤼스의 작품들을 그림과 사진으로 소개한 이 책은 고마키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고마키는 발레 뤼스의 거점인 파리에 가서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당국의 허가를 받기 어렵다고 생각해 밀항을 결심했다. 22살이던 1933년 만주로 건너간 그는 기차로 소련을 거쳐 프랑스로 가려고 했지만 만주국과 소련의 국경을 앞두고 발각되는 바람에 하얼빈에 내려야 했다.
 하얼빈은 중국 땅이지만 1895년 러시아가 철도부설권을 얻으면서 빠르게 발전한 도시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국제화가 진행돼 ‘동양의 파리’라는 별칭까지 가지게 됐다. 러시아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했지만 러시아 국경과 가까웠던 하얼빈은 여전히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공연문화가 발달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극장이 건설되고 오페라단, 발레단,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졌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과 2년의 내전 과정에서 밀려난 백계 러시아인들(혁명 반대파)도 하얼빈에 많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1932년 일본이 만주국을 건설한 데 이어 1935년 소련으로부터 철도를 매입하면서 하얼빈에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이주도 본격 시작됐다.
 파리로 가는 것을 포기한 고마키는 하얼빈에 머문 지 얼마 안 돼 하얼빈발레음악학교를 알게 됐다. 하루종일 그림 그리는 것에 질렸던 그는 학생들의 발레 클래스를 본 뒤 발레야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라고 직감했다. 당시 하얼빈발레음악학교는 러시아인만 입학할 수 있었지만 고마키는 특별 테스트를 통해 1934년 입학할 수 있었다. 재학 시절 사용한 그의 이름은 레오 도노레였다.
 6년제의 하얼빈발레음악학교에서 그는 발레를 비롯해 발레에 필요한 음악, 음향, 무대미술, 건축 등 극장예술의 전반을 배웠다. 특히 그의 발레 교사는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출신이었는데, 러시아 황실 마린스키 발레단 출신 교사에게 직접 배웠다고 한다. 정통 러시아 발레를 배우면서 그는 하얼빈 모데른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 등 각종 공연을 접할 수 있었다.
 1939년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하얼빈 발레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이듬해 상하이 발레뤼스에 입단했다. 학교 동기인 발레리나 니나 코제브니코바의 소개로 상하이 발레뤼스가 그를 초청했기 때문이다. 상하이에는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하는 조차지인 ‘조계’가 차례차례 생겼다. 그리고 서양화된 상하이 조계에는 발레와 클래식 등의 문화예술도 꽃을 피웠다. 1846년 설립된 라이세움 극장은 그 중심이 됐으며 조계의 외국계 은행이나 회사 등으로부터 운영비를 지원했다.
 1934년 결성된 상하이 발레뤼스는 발레뤼스 및 마린스키 극장의 레퍼토리 계승을 목표로 한 직업 발레단으로 거의 매달 공연을 올렸다. 소속 무용수들 역시 발레뤼스 및 마린스키 극장 출신이 주를 이뤘다. 이들은 주로 러시아 혁명이나 나치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까지 온 백러시아인들이었다. 고마키는 상하이 발레뤼스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그가 ‘고마키 마사히데’라는 예명을 쓴 것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부터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타타르계 러시아인 여권을 가지고 콘스탄틴 마키시모비치 콘드로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조계를 관할하게 된 후 러시아식 이름의 자음을 따서 성을 짓고, 요절한 남동생의 이름을 가져와 ‘고마키 마사히데’라는 예명을 사용하게 됐다.
 1943년엔 상하이 발레뤼스의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그는 〈백조의 호수〉 〈지젤〉 〈페트루슈카〉 〈세헤라자데〉 〈장미의 정〉 〈코펠리아〉 〈돈키호테〉 〈해적〉 〈불새〉 〈호두까기 인형〉 〈레 실피드〉 〈목신의 오후〉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경험을 축적했다.


일본 발레 발전의 주역을 거쳐 한국 발레의 조력자로

고마키는 2차대전이 끝나고 상하이 발레뤼스가 해산하자 일본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1946년 4월 13년만에 일본에 돌아온 그는 다카라즈카 가극단 소속 연출가 시라이 데쓰조의 소개로 니치게키(일본극장의 약칭) 댄싱팀에서 무용수들의 발레 교육을 맡기로 했다.
 이즈음 일본에서는 시마다 히로시(한국명 백성규)의 제안으로 핫토시-시마다 발레단, 아즈마 유사쿠 발레단, 가이타니 야오코 발레단이 힙을 합쳐 〈백조의 호수〉 전막 초연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일본 발레의 어머니’로 불리는 엘리아나 파블로바(1899~1941)의 제자들이었다. 파블로바는 생전에 〈백조의 호수〉를 올리고 싶어 했지만 여건이 안 돼 2막만 공연한 바 있다. 당시 오데트 역을 직접 춘 파블로바는 파트너인 지그프리트 왕자 역으로 발레를 배운지 얼마 안 된 시마다를 낙점했다.
 〈백조의 호수〉 전막을 춰본 경험이 있는 데다 피아노 스코어까지 가지고 돌아온 고마키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도쿄발레단’이란 타이틀 아래 1946년 8월 도쿄 제국극장 무대에 오른 〈백조의 호수〉 일본 초연은 고마키가 안무 및 연출을 맡았다. 그리고 시마다-가이타니 야오코, 아즈마-마쓰오 아케미가 주역을 맡았다. 여왕 역을 맡은 핫토리는 무용수들을 다독이며 연습을 이끌었다.




도쿄발레단 〈백조의 호수〉 일본 초연, 1946년 8월 도쿄 제국극장 ⓒ도쿄 교향악단 공식 트위터




 도호 그룹의 제작비 지원 아래 초연된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초 17일간 예정됐던 공연이 모두 매진을 기록하자 5일간 더 연장되기도 했다. 이 공연은 일본에서 발레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당시 참가했던 인물들은 물론이고 공연을 보고 발레에 입문한 인물들이 일본 발레계 지도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쿄 발레단은 1950년까지 6회 공연을 가졌지만 사실상 〈백조의 호수〉 초연 이후 내분 양상을 띄었다. 엄밀한 의미의 합동공연은 〈백조의 호수〉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분과 해산의 원인은 도호와의 계약과 무용수들의 처우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백조의 호수〉 초연이 끝나자마자 3개 발레단 단원들이 고마키 발레 아카데미로 대거 옮겨간 것이었다. 고마키로서는 일본에 빨리 자리잡아야겠다는 조바심과 함께 무용수들을 확실하게 교육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백조의 호수〉 공연 직후에 스튜디오를 만든 것이다.
 당시 젊은 무용수들이 정통 러시아 발레 교육을 받은 데다 다양한 레퍼토리들을 섭렵한 그에게 배우고 싶어 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마다를 비롯해 다른 동료들의 자존심에 금을 가게 만들었다. 시마다는 나중에 “아침에 일어나보니 우리 연구소에 아무도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도쿄발레단의 2회 공연부터 핫토리-시마다 발레단이, 3회 공연부터는 아즈마 유사쿠 발레단이 불참했다.
 이와 관련해 고마키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회고록에서 “핫토리-시마다 발레단과 아즈마 유사쿠 발레단이 왜 참가하지 않았는지 당시엔 잘 몰랐다. 우리에게 의견 대립이 있다면 예술적 문제일 뿐이며 계약 문제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중략) 일본 발레계는 전쟁 전에 엘리아나 파블로바 선생이 제자들을 키웠다. 그리고 이들 제자들이 각각 발레단으로 독립해서 활동했으며 사제관계로 발레단이 구성되고 운영되어 왔다. 내가 일본에 돌아와 도쿄발레단에 참여했을 때 이런 경향을 전혀 몰랐다. 발레 운동에 마음이 급한 나머지 이런 사정을 무시하고 발레 아카데미를 만들었다. 도쿄발레단의 3회 〈코펠리아〉 공연 즈음에야 일본적 특수성을 이해했다”고 썼다. 안타깝게도 고마키의 자성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게다가 이즈음 고마키의 결혼과 이혼을 둘러싼 소동은 그에 대한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었다. 고마키는 1947년 고마키 발레단의 간판 무용수인 제자 다니 모모코와 결혼했지만 6개월도 안 돼 이혼했다. 그리고 바로 고마키 발레단의 또다른 무용수 다치카와 루리코와 재혼했다. 당시 〈백조의 호수〉 초연의 대성공으로 발레 붐이 불 때라 고마키의 결혼과 이혼은 언론이 앞다퉈 보도하는 등 스캔들로 비화됐다. 당시 보수적인 일본에서 고마키가 비난을 받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일본 발레사 관련 자료들 가운데 ‘고마키의 발레 인생은 조선에서 사와 모리노에게 발레를 배운데서 시작된다’고 적혀 있는 것들이 있다. 사와에게 발레를 배운 것은 맞지만 시기적으로 조선과는 관련이 없다. 이와 관련해 고마키의 평전을 처음으로 쓴 극작가 겸 무용평론가 야마카와 산타는 『〈백조의 호수〉 전설-고마키 마사히데와 발레의 시대』는 이런저런 정보들이 뒤섞이면서 나온 잘못된 이야기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고마키는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는데, 광대뼈가 발달된 (북방계) 얼굴인 것과 함께 고마키의 결혼 및 이혼 스캔들로 인한 비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사생활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고마키 발레단은 일본 발레의 여명기를 견인했다. 고마키는 자신이 상하이 발레 뤼스에서 췄던 명작 레퍼토리들을 일본에 잇따라 소개했다. 이들 레퍼토리는 거의 일본 초연이었다. 발레 애호가들이나 지망생이 고마키 발레단의 공연에 몰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국제적 감각과 네트워크를 가진 고마키는 1952년 〈잠자는 숲속의 호수〉의 일본 전막 초연에 오로라 공주 역으로 영국 페스티벌 발레단 수석무용수 소니아 아로바를 초청했다. 세계적인 스타 발레리나의 초청은 일본 발레 팬들의 눈높이를 올려놓은 것은 일본 무용수들에게도 좀더 분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후에도 고마키는 발레단 공연에 미국 발레리나 노라 케이, 영국 안무가 안토니 튜더, 영국 발레리나 마고 폰테인 등을 잇따라 초청했다. 일본에서 지금까지 국제적인 수준의 해외 발레단 공연이 잇따르는 것은 국제적 감각의 소유자인 고마키가 뿌린 씨앗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고마키 발레단은 1960년대 후반이 되면 점점 활동이 줄어서 1970년대 들어서 사실상 활동을 멈추게 된다. 발레단을 지탱하는 스타 무용수들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동안 발레단이 배출한 스타 무용수들은 대부분 독립해서 자신의 발레단을 세웠다. 고마키가 나이를 먹으면서 예전처럼 고군분투하기 어려웠던 탓도 있다. 고마키의 막내동생으로 뒤늦게 발레를 시작했던 기쿠치 다다오가 형의 발레단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기쿠치는 자신이 이끌던 ‘도쿄 유니버설 발레단’에 고마키를 명예단장으로 맞아들이면서 명칭을 ‘도쿄 고마키 발레단’으로 바꿨다.
 고마키가 평생 정통 발레를 일본에 소개해 온 것은 그의 업적이자 한계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마키 발레단 외에 다른 발레단들도 국제적인 네트워크 등을 통해 무용수들의 기량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해외 유명 발레단과 안무가를 초청하게 됐기 때문이다. 창작 발레와 관련해 고마키도 여러 작품을 발표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구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발레단의 활동을 중단하며 현장에서 한발 물러난 고마키는 ‘근대무대예술연구소’를 세워 한국, 몽골 등과의 교류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고마키는 1967년 10월 〈백조의 호수〉 한국 초연의 안무를 맡았다. 1966~1967년 예그린악단 단장을 지낸 박용구는 당시 공화당 총재 김종필의 도움을 얻어 고마키를 초청했다. 명분은 예그린 악단의 무용수들의 훈련을 위한 것이었지만 한국 발레의 도약을 위해 〈백조의 호수〉 전막 초연을 위해서였다. 박용구는 하얼빈에서 고마키와 처음 알게 됐으며 한국전쟁 중 일본으로 밀항해서는 고마키 발레단에서 일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백조의 호수〉 한국 초연에 고마키만큼 적당한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박용구는 동아일보와 한국무용협회를 설득해 〈백조의 호수〉 전막 초연을 준비했다. 동아일보가 재정적 지원을 맡고 한국무용협회는 대학 무용과 교수들과 평론가 등으로 위원회를 꾸렸다. 그리고 이화여대, 경희대, 한양대, 서라벌예대, 서울예고의 무용과 졸업생 및 재학생 그리고 예그린 악단의 무용수 가운데 60명이 선발돼 6개월 전인 4월부터 연습에 들어갔다. 1966년 박용구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에 온 고마키는 서울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여러 차례 열었다. 특히 1967년 〈백조의 호수〉 공연 연습을 위해 매달 서울에 왔다.




  

(왼쪽) 〈백조의 호수〉 한국 초연, 1967년 10월 서울 시민회관   (오른쪽) 프로그램북 표지




 서울 시민회관에서 10월 12~15일 열린 한국 최초의 〈백조의 호수〉 공연에는 ‘한·중·일 3국 합동공연’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당시 여자 주역급으로 고마키 발레단 무용수 4명과 여왕 역의 대만 무용수 1명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대만 무용수는 당시 서울의 대만 대표부 관리의 부인이었다. 음악은 임원식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이 연주했고, 무대는 화가 변종하가 맡았다.
 〈백조의 호수〉 전막 초연은 당시 대단한 화제를 모았으며 흥행과 비평 모두 좋았다. 하지만 재공연이 이뤄지지는 못했다. 다시 한국에서 〈백조의 호수〉 전막공연이 이뤄진 것은 10년 뒤인 1977년 국립발레단에서다. 고마키는 1967년 〈백조의 호수〉 이외에도 한국과의 교류를 이어나갔다. 동아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오는가 하면 1983년 국립발레단의 〈셰헤라자데〉 안무를 맡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 〈백조의 호수〉 초연과 관련해 박용구는 ‘예술사 구술총서-박용구 편’에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이라며 중국도 못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류다. 중국에서 〈백조의 호수〉 발레 초연은 1959년 베이징무도학교실험발레단(베이징 중앙발레단의 전신)에서 이미 성사됐다. 중국은 공산화를 완수한 이후 소련에서 발레 전문가들을 초청해 발레학교와 발레단의 토대를 만들었다. 상하이나 하얼빈 등에서 백계 러시아인 무용수들로 이뤄진 공연을 자국의 발레사에서 제외하고 있는 중국은 1954년 베이징무도학교실험발레단 설립을 그 시작으로 본다.

2020. 1.
사진제공_도쿄 교향악단 공식 트위터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