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민속춤의 왕’ 모이세예프, 한국에서 제대로 평가받을까
장지영_ 국민일보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지난 2007년 11월 2일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 신문에는 한 러시아 안무가의 부고 기사가 실렸다. 바로 101세로 타계한 이고르 모이세예프(1906~2007)다. 당시 몇몇 영미권 신문은 기사에서 그를 ‘민속춤의 왕(king of folk dance)’이라고 표현했다.
 ‘민속춤의 왕’이란 수식어는 모이세예프를 묘사할 때 가장 적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가 만든 모이세예프발레단이 민속춤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하고 보급한 첫 번째 직업 무용단이기 때문이다. 그는 발레와 현대무용 테크닉을 바탕으로 러시아는 물론 전세계 민속춤을 새롭게 안무한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부채춤 등 한국(북한) 민속춤을 소재로 만든 작품도 있다.




ⓒ모이세예프 발레단 http://www.moiseyev.ru/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 30주년을 맞아 2020~2021년 ‘한·러 상호교류의 해’로 지정된 이후 러시아의 첫 공식행사로 3월 18~19일 ‘이고르 모이세예프발레단’의 내한공연이 열린다. 1937년 창설된 모이세예프발레단은 정식 명칭이 ‘이고르 모이세예프민속춤앙상블’이며, 러시아에선 ‘모이세예프앙상블’이란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해외에서는 그동안 ‘모이세예프무용단(dance company)’으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 ‘모이세예프발레단’이란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발레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이세예프발레단이 〈백조의 호수〉 〈지젤〉 같은 작품을 공연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4~10분 가량의 민속춤들을 선보인다.
 모이세예프발레단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다. 한국과 구 소련이 수교한지 4년째인 1994년 첫 내한공연을 가진지 26년만이다. 첫 내한 땐 ‘모이세예프 무용단’이란 이름이 사용됐다. 그런데, 당시 모이세예프 무용단의 인지도가 한국에서 높지 않았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러 수교 이듬해인 1991년 구 소련 연방이 해체와 함께 러시아 발레는 한국에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안무가와 교사의 내한 및 한국 학생들의 러시아 유학 등 활발한 인적 교류는 한국 발레의 성장에 자양분이 됐다. 그리고 마린스키발레단과 볼쇼이발레단 등 러시아 발레단의 내한 공연은 언제나 한국에서 주목을 받는다.
 그런데, 마린스키발레단이나 볼쇼이발레단 못지 않게 러시아 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단체가 바로 모이세예프발레단이다. 볼쇼이 발레단이 1956년 런던을 시작으로 유럽과 미국을 방문하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모이세예프발레단이 소련을 대표해 방문한 바 있다. 지금도 모이세예프발레단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무용단으로 마린스키발레단이나 볼쇼이발레단보다 더 많은 투어를 돌고 있다.
 게다가 모이세예프는 민속춤만이 아니라 발레의 역사에서도 기억해야 할 이름이기도 하다. 볼쇼이발레단에서 유리 그리고로비치에 앞서 ‘스파르타쿠스’를 안무하는 등 그는 발레 작업을 병행해 왔다. 여기에 모이세예프발레단에서 20년간의 무용수에 이어 40년간 교사로 활약한 한국계 비비안나 박의 존재는 우리가 모이세예프발레단을 좀더 알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고르 모이세예프(Igor Aleksandrovich Moiseyev)




 설립자 모이세예프는 20세기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용수이자 안무가다. 1906년 우크라이나 키에프(당시엔 러시아 영토)에서 변호사인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8살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자랐다. 변호사인 아버지의 수입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재봉사로 일하며 생활비를 보탰는데, 일감을 주로 받아온 곳이 샤틀레극장이었다. 덕분에 그는 연극과 무용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후 모이세예프 가족은 친척이 있던 우크라이나의 디칸카에 돌아왔다. 고골의 소설집 『디칸카 근교의 야화』로 유명한 디칸카는 인근 농업지대의 중심인 곳으로 축제가 종종 열리곤 했다. 모이세예프는 후일 인터뷰에서 삶의 기쁨을 춤으로 표현하던 농민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겨우 1년간의 생활이었지만 그는 ‘무의식적인 끌림’이라며 디칸카에 큰 애착을 드러냈다.
 부모와 함께 모스크바에 정착한 그는 다양한 교육을 받았지만 12살 때 처음 받은 발레 수업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다소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했지만 볼쇼이발레학교에 편입해 졸업한 그는 1924년 18살의 나이에 볼쇼이발레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주역 무용수가 됐다. 특히 민속춤을 발레에 녹여낸 캐릭터 댄스를 잘 춘다는 평가를 받았다.
 모이세예프는 소비에트 시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붉은 양귀비〉를 비롯해 여러 고전 레퍼토리에서 주역을 맡았지만 틈틈이 직접 안무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특히 24살이던 1930년 축구를 소재로 한 〈축구 경기〉를 선보여 호평받았다. 이 작품은 원래 볼쇼이 발레단 정기 공연을 앞두고 펑크난 레퍼토리를 메우기 위해 급하게 만든 것이었지만 그의 재능이 알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또 1932년 고대 카르타고 시대 용병들의 반란을 소재로 한 〈살랑보〉와 1935년 〈3명의 뚱뚱한 남자〉와 같은 작품도 주목을 모았다.
 다만 볼쇼이 발레단 안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호오는 엇갈렸다. 정통 발레를 선호하던 보수파는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 당국은 발레를 바탕으로 체조, 아크로바틱, 민속춤을 자유롭게 오가는 그를 주목했다. 그는 1930년대 들어 모스크바 광장에서 열린 대형 퍼레이드의 안무를 전담했으며, 볼쇼이 발레단 차석 안무가로서 1936년 소련 당국이 주최한 제1회 민속춤 페스티벌에 깊숙이 관여했다. 수많은 민족으로 이뤄진 소련은 당시 민속춤 페스티벌을 국가적 단합의 장으로 활용했고, 모이세예프는 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치러내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모이세예프는 승승장구했지만 1936년 기대했던 볼쇼이발레단의 새로운 수석 발레 마스터가 되지는 못했다. 당시 수석 발레 마스터는 〈신데렐라〉 〈바흐치사라이의 샘〉 등을 안무해 호평받았던 로스티슬라프 자하로프(1907~1984)가 임명됐다. 자하로프는 모이세예프와 달리 정통적인 발레 형식에 충실한 편이어서 발레계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열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의 모이세예프는 낙담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민속춤을 작품으로 만들어 극장예술로 선보이겠다고 결심했다. 민속춤이 독자적인 예술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당시 그의 아이디어는 매우 혁명적이었다. 수완이 좋은 그는 국가행사를 치르며 친분이 생긴 공산당 간부들의 도움을 얻어 민속춤 전문 무용단 설립의 허가를 얻어냈다.




ⓒ모이세예프 발레단


 

 

 1937년 2월 이고르모이세예프민속춤앙상블이 처음 출범했을 때 단원의 상당수가 무용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적 없는 무용수였다. 모이세예프는 단원들을 이끌고 소련 곳곳에서 민속춤 자료를 모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1938년 〈소련의 민속춤〉과 1939년 〈발트의 민속춤〉(발트3국: 당시 소련 영토)이다.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모이세예프발레단은 소련 전역을 투어하는 것은 물론 해외에서도 공연을 가지기 시작했다. 또 1943년 세계 최초의 민속춤 학교까지 세우게 되면서 단원들은 전문적으로 춤을 공부한 학생들 가운데 선발됐다. 모이세예프는 스타 무용수가 아닌 앙상블을 중시했기 때문에 단원들은 어떤 작품에도 출연이 가능하도록 훈련받았다.
 그런데, 모이세예프가 보여주는 민속춤은 사실 전통적인 민속춤과 똑같지는 않다. 민속춤의 중요한 움직임을 토대로 그가 새롭게 안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 대부분이 소련과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인 동구권 등 슬라브 지역의 민속춤을 가지고 만들었다. 이들 춤은 전쟁중 잊고 살았던 예술의 아름다움과 삶의 기쁨을 선사했으며, ‘슬라브 민족’이라는 일체감을 줬다.






ⓒ모이세예프 발레단




 모이세예프는 슬라브 지역 외에도 지구촌의 수많은 민속춤을 레퍼토리로 만들었다. 스페인, 아르헨티나, 중국, 일본, 한국(북한)의 민속춤을 소재로 한 작품도 있다. 심지어 1960년대 냉전시대에 적대국인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미국 민속춤인 〈버지니아 릴〉을 추거나 로큰롤 음악을 가지고 춤추기도 했다. 현재 모이세예프발레단의 레퍼토리는 300여개에 달하는데, 그가 200여개를 만들었다.
 창단 이후 모이세예프발레단은 지금까지 60여개 국가에서 공연을 가졌다. 볼쇼이 발레단이 서방 세계를 흔들기 이전에 먼저 ‘철의 장막’을 넘어 서방 관객을 매료시킨 것도 바로 모이세예프발레단이다. 이 때문에 구 소련의 인기있는 문화 수출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모이세예프발레단은 1967년 권위있는 국립 예술기관에게만 주어지는 ‘아카데미’ 칭호를 획득했다.




ⓒ모이세예프 발레단




 하지만 서방 평론가들은 모이세예프발레단이 사회적 리얼리즘에 입각해 낙관적인 인민의 모습을 보여준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모이세예프는 추상 발레를 비판하는 등 냉전 시대 소비에트 미학의 충실한 옹호자였다.
 반면 모이세예프가 단순히 소련의 어용 예술가라 아니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가 1959년 미국 문화 속에 보이는 열정을 칭찬했을 때, 1967년 소련 발레의 퇴보를 대놓고 지적했을 때 소련 당국의 질책을 받은 사례는 대표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구 소련 당국에서 각종 상을 받았으면서도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민속춤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발레 작업을 완전히 그만둔 것은 아니다. 발레 〈스파르타쿠스〉는 1968년 볼쇼이 발레단에서 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앞서 두 차례 앞선 버전이 있다. 첫 번째는 1956년 레오니드 야콥슨이 키로프발레단에서 선보인 것이고, 두 번째는 모이세예프가 1958년 볼쇼이발레단에서 선보인 것이다. 모이세예프 버전은 1962년 볼쇼이발레단의 미국 투어 공연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모이세예프는 또 소련의 여러 전통적인 발레단들과 작업했으며 1967~1971년 클래식 발레 그룹을 별도로 이끌 정도로 발레를 사랑했다.




ⓒ모이세예프 발레단




 모이세예프발레단의 무용수들은 창단 이후 거의 슬라브계였다. 하지만 1940~60년대 한국계 무용수가 이곳에서 활동한 적 있다. 바로 비비안나 박(1928~2013)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부수석을 지낸 바 있는 박헌영이고, 어머니 역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주세죽이다. 그녀의 부모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 그녀의 삶은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 그녀의 존재는 한·러 수교 이듬해인 1991년 중앙일보 러시아 특파원의 보도로 처음 한국에 알려졌다.
 그녀는 박헌영-주세죽 부부가 일본의 감시를 피해 조선을 탈출해 소련으로 가는 도중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났다. 박헌영-주세죽 부부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운동가 교육기관인 ‘국제레닌학교’에서 공부한 뒤 상하이로 파견됐다. 당시 5살이던 딸 비비안나는 혁명가 자식들을 키우는 보육원에 맡겨졌다.
 보육원에서 자란 비비안나는 보육교사의 눈에 띄어 모이세예프 민속춤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춤에 매진한 그녀는 1947년 학교 졸업과 함께 바로 모이세예프발레단에 입단했다. 이후 모이세예프발레단에서 20년간 무용수로 활동한 그녀는 40년간 교사로서 동양춤을 가르쳤다.
 그녀의 부모 박헌영과 주세죽을 이야기하자면 1933년 조선 공산당 재건을 위해 상하이에 온지 몇 달 만에 파국을 맞았다. 박헌영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주세죽은 또다른 사회주의 운동가로 남편과 절친한 김단야와 함께 상하이를 겨우 빠져나왔다. 그런데, 박헌영이 죽었다고 생각한 주세죽이 모스크바에 돌아와 김단야와 재혼한 것이다. 얼마 뒤 박헌영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이미 김단야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주세죽은 김단야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조선혁명을 이끌 사회주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활동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대숙청 바람이 불면서 1937년 말 일제 밀정이라는 누명을 쓴 김단야가 체포돼 이듬해 총살되고 만다. 김단야의 아내인 주세죽 역시 카자흐스탄 강제 수용소로 유배됐는데, 이 과정에서 갓 태어난 아들도 죽었다. 주세죽은 형기를 마치고도 모스크바로 돌아오지 못한 채 수용소에 머물렀다.
 부모가 모두 죽은 줄 알았던 비비안나는 모이세예프민속춤학교 3학년이던 1946년 서울에서 보내온 아버지 박헌영의 편지를 처음 받았다. 그리고 몇 달 뒤 모스크바에 온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얼마 뒤 월북해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된 박헌영은 1949년 딸 비비안나를 평양에 초대했다. 비비안나는 1991년 한국에 왔을 때 아버지의 초대로 북한에서 한달간 머무를 때 최승희와 함께 지내기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녀의 기구한 인생은 1953년 정점에 달하게 된다. 박헌영이 북한에서 숙청당하고 주세죽이 딸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왔다가 사망한 것이다. 특히 비비안나는 어머니가 모스크바에 오는 것을 모르고 지방 투어를 떠난 상태여서 주세죽은 딸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당시 주세죽은 박헌영이 북한에서 숙청된 소식을 접하고 소련 정부가 비비안나를 북한으로 강제송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딸을 만나러 갔다가 지병이 악화돼 세상을 떴다. 그리고 비비안나는 1956년 우연히 소련 신문을 통해 아버지의 숙청 사실을 알게 됐다.
 참고로 소련은 1989년 김단야와 주세죽을 복권시켰고, 한국 정부는 2005년과 2007년 김단야와 주세죽에게 각각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주세죽의 건국훈장은 딸 비비안나가 대리수령했다. 그리고 주세죽의 파란만장한 삶은 2016년 손석춘의 소설 『코레예바의 눈물』과 2017년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현재 영화화도 진행중이다.




ⓒ모이세예프 발레단




 한편 비비안나가 1991년 한국을 방문하고 3년 뒤엔 1994년 모이세예프발레단의 내한공연이 성사됐다. 다만 러시아를 대표하는 무용단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모이세예프발레단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26년만에 성사된 이번 내한 공연에서 모이세예프발레단이 한국 관객들로부터 어떤 반응을 얻을지 궁금하다. 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아시아를 방문하려던 예술단체가 속속 공연을 취소하고 있어서 2월 말 현재 모이세예프발레단의 공연 여부가 불확실해졌다.
 예정대로 한국에 온다면 모이세예프발레단은 이번에 러시아 민속춤으로 만든 〈여름(Summer)〉을 비롯해 몰도바, 북한, 우즈베키스탄, 그리스, 베네수엘라, 스페인 민속춤을 토대로 만든 작품들을 보여줄 예정이다. 모이세예프가 볼쇼이 발레단 시절 안무한 〈축구 경기〉도 볼 수 있다.

2020. 3.
사진제공_모이세예프 발레단 http://www.moiseyev.ru/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