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플리세츠키-메세레르 왕조를 아시나요?
장지영_국민일보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올해는 ‘세기의 발레리나’ 마야 플리세츠카야(1925~2015)의 탄생 95주년 및 타계 5주기가 되는 해다. 지난해 12월부터 1월까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전시가 열렸다. 1994년 출판된 자서전 『나, 마야 플리세츠카야』를 토대로 그녀의 위대한 발자취를 보여주는 콘셉트다.
 모스크바 도심의 솔랸카 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플리스체카야의 각종 사진과 공연 및 인터뷰 영상 및 다큐멘터리 등을 볼 수 있다. 6개로 이뤄진 전시 공간 가운데 발레 스튜디오로 꾸며진 방에서는 젊은 무용수들로 이뤄진 소규모 공연이 이뤄지거나 플리세츠카야의 남편 로디온 셰드린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유명 작곡가인 셰드린은 플리세츠카야의 대표작인 〈카르멘 조곡〉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이반과 망아지〉 〈갈매기〉 등의 발레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특히 눈길을 모은 전시 공간은 1940~50년대 플리세츠카야가 살았던 허름한 아파트 내부였다. 그녀는 입단 2년 만에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무용수가 될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출신성분 때문에 오랫동안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발레 스타들이 여러 특권을 누린 것과 달리 반란죄로 처형된 아버지를 둔 그는 여러 가족이 목욕탕과 주방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립 아파트에 살았다.
 이번 전시를 비롯해 여러 극장에서 이반 바실리예프, 바딤 문타기로프, 데니스 로드킨 등 스타 무용수들이 참여하는 갈라 공연 등을 기획한 인물은 안드리스 리에파. 구 소련 시절 볼쇼이 발레단 스타였던 마리스 리에파의 아들로 자신도 발레 스타였던 리에파는 무용수 은퇴 이후엔 안무가, 프로듀서, 기획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는 지난 2004년 플리세츠카야의 특별공연을 연출한 것을 계기로 플리세츠카야 생전에 기획된 각종 갈라 공연을 연출해 왔다. 특히 플리세츠카야 타계 이후에도 지금까지 여러 차례 추모 공연을 기획 및 연출한 그는 올해 연간 프로젝트 ‘기록과 이미지’(Autographs and Images)를 진행한다.




마야 플리세츠카야




 비록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세계 문화예술계가 크게 위축되면서 이번 프로젝트가 예상대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리세츠카야가 타계한지 5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발레 팬의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기간 플리세츠카야의 남동생 아자리 플리세츠키(1937~ )가 누나 못지않게 해외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국내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러시아에서 이름은 남녀 구별이 있어서 플리세츠카야는 플리세츠키의 여성형이다).
 그런데, 아자리 플리세츠키를 설명하는 글에서 빠지지 않는 표현이 러시아 예술계의 ‘메세레르-플리세츠키(Messerer-Plisetsky) 왕조’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발레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예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뜻에서 ‘왕조’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국에는 아자리 플리세츠키나 메세레르-플리세츠키 왕조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만 러시아를 포함해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 쿠바 등 전 세계 발레계가 수십년간 메세레르-플리세츠키 가문의 영향력을 깊이 받았다는 점에서 소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성이 같은 가족들을 다루는 만큼 이 글에서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다).




 

마야 가족 ⓒazarymesserer.com(좌), 라힐 메세레르가 출연한 영화 포스터(우)




 마야는 갈리나 울라노바(1910~1998)와 함께 구 소련 발레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두 발레리나 모두 볼쇼이 발레단의 간판스타였지만 울라노바가 당국의 사랑을 받으며 영예를 누린 것과 달리 마야는 제대로 대접받는 것은 고사하고 출신성분 때문에 늘 정보기관 KGB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는 탄광 사업장 감독으로 일하던 미하일 플리세츠키와 무성영화 배우 라힐 메세레르(1902~1993)의 3남매 가운데 맏이였다. 리투아니아계 유태인인 부부는 큰딸 마야 외에 아들 알렉산드르(1931~1985), 아들 아자리를 낳았다.
 그런데, 마야가 11살때인 1937년 아버지가 반란죄로 체포됐다가 몇 달 만에 처형됐다. 스탈린은 권력을 잡은 후 반대파들을 반란죄로 무지막지하게 처형했는데, 미하일이 유태인인데다 사상적으로 트로츠키에 가까웠던 점 등이 숙청당한 배경으로 보인다. 라힐은 남편이 끌려갈 때 아자리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후 아자리를 낳은 지 몇 달도 채 안 돼 라힐은 숙청된 남자들의 아내가 겪는 수순에 따라 반란죄로 감옥을 갔다가 다시 카자흐스탄의 ‘굴라크’(Gulag·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굴라크는 스탈린 통치 시절 정치범과 그 가족들, 전쟁포로, 외국인 등의 교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수용자들은 최악의 생활환경 속에서 가혹한 육체적 노동을 강요받았다.
 라힐이 아자리를 데리고 굴라크로 끌려간 뒤 볼쇼이 발레학교에 다니던 마야와 6살 아래의 알렉산드르는 각각 이모와 외삼촌 집으로 가게 됐다. 이모와 외삼촌은 볼쇼이 발레단의 간판 무용수 출신으로 발레교사였던 술라미스 메세레르(1908~2004)와 아사프 메세레르(1903~1992) 남매다. 메세레르 남매는 라힐이 2년 뒤 굴라크에서 풀려날 때까지 조카들을 돌봤다.




 

술라미스 메세레르(좌), 아사프 메세레르(우)




 마야는 18살 때인 1943년 볼쇼이 발레단에 입단했는데, 압도적인 기량 덕분에 몇 달만에 군무에서 솔리스트가 됐다. 그리고 2년 뒤 수석 무용수로 승급한 그는 발레단에서 울라노바와 함께 팬들의 사랑을 양분하는 존재가 됐다.
 울라노바는 신체조건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걸맞는 서정적이고 친근한 이미지로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지젤〉 〈신데렐라〉 〈로미오와 줄리엣〉 등은 울라노바의 대표 레퍼토리였다. 반면 마야는 뛰어난 신체조건과 화려한 테크닉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백조의 호수〉 〈빈사의 백조〉는 마야의 매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울라노바가 당국에 순종적인데 비해 마야는 성품이 자유분방하고 도전적이었다. 당국의 미움을 받은 그는 1954년부터 시작된 볼쇼이 발레단의 서방 투어에서 계속 제외됐다. 당시 주역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울라노바였다. 1958년 작곡가 셰드린과 결혼하면서 망명 가능성이 줄어든 마야가 이듬해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에게 탄원서를 보내면서 당국은 마침내 서방 공연을 허락해줬다. 참고로 마야는 셰드린에 앞서 1954년 발레리노 마리스 리에파와 3개월간의 짧은 결혼생활을 가졌는데, 자서전 등에서도 첫 결혼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야가 라트비아 출신의 재능있는 발레리노 리에파가 모스크바에 남을 수 있도록 도우려고 위장 결혼을 했다는 견해도 나온다. 실제로 마야와 리에파는 이혼 후에도 친밀하게 지냈으며, 여러 작품에서 파트너로 춤췄다.




 

마야 플리세츠카야의 1966년, 1974년 모습




 어쨌든 1959년 볼쇼이 발레단의 첫 미국 투어에 나선 마야는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으로 미국 정계의 거물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그에게 매료된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는 또다시 당국과 관계가 불편해졌다. 당시 KGB가 그에게 케네디 의원 상대로 첩보활동을 시키려고 했지만 그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와 당국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967년 쿠바 안무가 알베르토 알론소가 그를 위해 안무한 〈카르멘〉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취소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카르멘〉을 못하게 하면 죽겠다며 당국에 엄포를 놓아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당시 그가 워낙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타이다보니 당국은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국은 1970년대 들어 그가 해외에 나가 모리스 베자르, 롤랑 프티 등 서방 안무가들과 작업할 수 있게 허락해줬다. 무용수로서 전성기가 지났지만 서방 관객들이 여전히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가 1961년 루돌프 누레예프를 시작으로 소련 무용수들이 잇따라 망명할 때도 끝까지 조국을 등지지 않았던 것도 고려됐을 듯하다.
 비록 그가 어릴 때부터 혁명과 정치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힘든 삶을 살아야 했지만 남편 셰드린과 함께 행복한 노년을 보냈다. 1989년 64살에 볼쇼이 발레단을 은퇴한 이후에도 그는 종종 무대에 섰다. 볼쇼이 발레단 주최의 1995년 고희 기념 무대에서 〈빈사의 백조〉를 직접 췄다. 그리고 2000년 발레 인생 50주년 기념 갈라를 비롯해 자신을 위한 여러 헌정무대에선 베자르가 그를 위해 안무한 〈아베 마야〉를 선보였다. 타계할 때까지 한 번도 현역 은퇴라는 말을 꺼낸 적 없는 그는 ‘불멸의 발레리나’로 자리매김했다.




플리세츠카야와 남편 로디온 셰드린




 오랜 시간 누나의 그늘에 가려져 왔지만 아자리도 발레계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아자리는 마야와 마찬가지로 볼쇼이 발레학교를 거쳐 무용수로 활약했다. 볼쇼이 발레단과 쿠바국립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는 한편 안무가로서 작품도 만들었지만 그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발레 교사로서다. 그는 키로프 발레단(지금의 마린스키 발레단)과 모스크바 스테이트 발레단 등 구 소련 발레단들은 물론이고 쿠바 국립발레단, 모리스 베자르 20세기 발레단, 롤랑 프티의 마르세이유 발레단, 스페인 국립발레단 등 여러 발레단의 초청을 받아 발레 교사로 활약했다.




 

아자리 플리세츠키




 그런데, 일반 대중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아자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동생 아자리〉(Brother Azari)가 지난 2017년 러시아에서 만들어졌다(https://www.youtube.com/watch?v=nRzidiM65Ag). 누나 마야가 타계한지 얼마 안돼 개봉된 이 다큐멘터리는 2018~2019년 사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와 각종 발레 전시의 부대행사로 상영돼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쿠바 발레리나 알리시아 알론소가 타계하면서 아자리가 오랫동아 알론소의 파트너로 활동했던 한편 1963~1971년 쿠바 국립발레단과 부속학교의 발레 교사로서 러시아 발레 교육법이 쿠바에 뿌리내리도록 한 것이 새삼 부각되기도 했다.
 특히 2010년대 이후 러시아 현대사의 최대 치부인 굴라크에 대한 연구, 보도, 다큐멘터리가 이어지면서 아자리를 언급하는 사례가 많아 주목된다. 나치 유태인 학살 못지않지만 굴라크의 참상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는데, 학자들은 1936~1953년 600만~1500만 명이 굴라크에 수용됐으며 매년 10%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스탈린이 죽은 1953년만 보더라도 굴라크에 550만명이 남아 있었다.
 스탈린 사후 3년이 지난 뒤에야 굴라크 수용자들이 석방됐으며 복권은 더더욱 늦어져서 1954~1964년 흐루쇼프 통치 시절 불과 70~80만명 정도만 복권됐다. 나머지는 1985년 당서기장이 되어 글라스노스트(개방) 등을 시작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시절이 되어야 가능했다. 그동안 굴라크 생존자는 물론이고 그 자녀들까지 취업과 여행 제한 등 각종 사회적 불이익을 겪었다.
 마야와 아자리의 가족 및 외가인 메세레르-플리세츠키 가문은 스탈린 통치 시절 가혹한 고난을 겪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아자리는 ‘굴라크 세대’, 즉 굴라크에서 성장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아버지가 처형된 직후 태어난 그는 어머니와 함께 굴라크로 보내졌다. 그의 누나와 형은 이모와 외삼촌이 데려가서 굴라크 행을 겨우 면했지만 갓난아기였던 그는 어머니와 떼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와 어머니는 1939년 가족이 있는 모스크바로 돌아오게 됐지만 오랫동안 KGB의 감시 속에 빈곤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최근 영미권 온라인 저널리즘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코다 스토리’(Coda Story)가 굴라크 세대에 대한 기획 시리즈를 내면서 첫 회로 그를 다룬 바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2f79vWEhYQ)
 소위 메세레르-플리세츠키 왕조는 마야와 아자리의 외할아버지인 미하일 메세레르(1866~1942)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리투아니아 빌뉴스 출신으로 1907년 모스크바에 이주한 미하일은 문화예술에 대한 소양을 갖춘 치과의사였다. 8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그는 공연 애호가여서 가족과 자주 극장에 갔다. 유태인인 그는 아내 시마와의 사이에서 10남매를 낳았는데, 아이들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에서 연극놀이를 하며 놀았다.
 10남매 가운데 어릴 때 사망한 2명을 빼고 자식들은 훌륭하게 성장했다. 3명은 배우, 2명은 무용수, 2명은 엔지니어, 1명은 교수가 됐다. 3명의 배우와 2명의 무용수는 이른바 ‘메세레르 파이브’로 불리며 예술계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아자리, 라힐, 엘리세바는 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아사프와 술라미스는 볼쇼이 발레단의 스타가 됐다.




메세레르 파이브 ⓒazarymesserer.com




 라힐(1902~1993)은 소련 국립영화학교에 다니던 중 동기의 형인 미하일 플리세츠키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딸 마야, 아들 알렉산드르, 아들 아자리가 태어나게 된다.
 아버지는 처형되고 어머니는 굴라크에 보내지는 참담한 환경 속에서도 세 아이는 모두 소련 발레계의 중요 인물로 성장했다. 마야와 아자리에 대해서는 전술했지만 둘째 알렉산드르 역시 볼쇼이 발레단 무용수를 거쳐 발레학교 교사로 일했다. 알렉산드르는 구 소련의 여러 도시 및 페루, 아르헨티나, 핀란드 등의 발레단과 발레학교에서 발레 교사로 인정받았다. 아이를 낳지 않은 누나나 동생과 달리 그는 동료 발레리나와 결혼해 딸을 낳았다. 그의 딸 안나 플리세츠카야는 볼쇼이 발레단과 모리스 베자르 20세기 발레단 솔리스트를 거쳐 배우로 활약했다.
 라힐의 형제들도 스탈린의 철권 통치 시절 고난을 겪었다. 유명 배우였던 아자리 메레세르(1897~1937)는 여동생 라힐 가족의 비극에 이어 극장 폐관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리고 또 다른 오빠로 교수였던 맛타니 메레세르(1898~1957)와 배우였던 여동생 엘리세바 메레세르는 주변의 밀고로 학교와 극장에서 각각 쫓겨났다. 경제학 교수이자 잡지 편집장이었던 맛타니는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을 나온 이후에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다만 맛타니의 아들인 나움 아자린 메세레르(1934~1989)는 성장해서 발레 마스터로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게 된다.
 다행히 라힐의 동생으로 이미 볼쇼이 발레단 스타였던 아사프와 술라미스는 큰 화를 입지 않았다. 아사프는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결합시킨 발레 테크닉으로 큰 인기를 모은 무용수였다. 볼쇼이 발레단에서 활동하면서 일찌감치 볼쇼이 발레학교 교사 겸 안무가를 겸임한 그는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기본기는 같더라도 마린스키 발레단의 우아한 스타일과 구별되는 볼쇼이 발레단의 호방한 스타일은 그에게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사프가 1942년 발레 교사들을 위해 집필한 책 『클래식 발레의 클래스』(Classes in Classical Ballet)는 지금도 발레 교육의 중요 교재로 인정받고 있다. 아사프의 교수법이 널리 알려지면서 영국 로열발레단의 마고 폰테인과 마이클 솜즈, 쿠바의 알리시아 알론소 등이 소련으로 찾아와 배우기도 했다. 또한 모리스 베자르의 20세기 발레단에도 교사로 초청받았다.
 발레 교사로 주로 활동하다보니 안무가로는 저평가되지만 그는 〈발레학교〉 〈스프링 워터〉 등 생전에 호평받은 작품을 여러 편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스승이었던 알렉산드르 고르스키가 안무한 버전을 토대로 1937년 재안무한 〈백조의 호수〉는 1975년까지 볼쇼이 발레단의 레퍼토리였다. 1964년부터 31년간 볼쇼이 발레단을 이끈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1969년 자신만의 〈백조의 호수〉 버전을 내놓았지만 당국의 불만을 사서 여러 차례 수정해야 했기 때문에 고르스키-메세레르 버전이 오랫동안 공연됐다. 아사프와 영화배우 아내 아넬 수다케비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보리스 메세레르(1933~)는 러시아에서 영화, 무대, TV 부문을 오가며 활약하는 유명 세트 디자이너가 됐다.




    

아사프-술라미스 1933 독일 엽서(좌), 아사프-술라미스 프랑스 포스터(우)




 술라미스 역시 볼쇼이 발레단 수석 무용수를 거쳐 볼쇼이 발레학교 교사로 활약했다. 정력적이고 강건한 성격의 술라미스는 수용소로 끌려간 언니가 고생을 덜하고 빨리 나올 수 있도록 백방으로 애썼다. 그리고 조카인 마야를 아예 입양해 키우면서 발레 트레이닝을 시켰다. 다만 술라미스의 혹독한 교육법이나 직설적인 화법은 사춘기의 마야와 충돌을 빚었다. 마야는 자서전에서 이모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술라미스는 1961년부터 일본 도쿄발레단으로 파견돼 일본에서 러시아 발레 메소드를 확립시키는데도 기여했다. 메세레르-플리세츠키 집안의 무용수들이 1960년대 이후 유난히 해외 발레단이나 발레학교 교사로 활약했는데, 당시 예술감독이던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메세레르-플리세츠키 집안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술라미스는 그리고로비치와 갈등을 자주 겪었다. 그리고로비치는 해외 발레단 및 발레학교의 교사 파견 요청에 메세레르-플리세츠키 집안 출신을 주로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메세레르-플리세츠키 집안이 전 세계 발레계에서 제자를 길러내는 등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1980년 72세의 술라미스는 볼쇼이 발레단의 캐릭터 무용수로서 일본에 온 아들 미하일 메세레르와 함께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했다. 아들이 자유를 원하기도 했지만 자신도 볼쇼이 발레단에서 푸대접 받는 것에 화났기 때문이다. 술라미스는 영국에 정착한 뒤 로열발레단과 로열발레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아들 미하일 역시 로열 발레단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발레 교사로 활동했다. 구 소련 붕괴 후 러시아 발레계와 다시 관계를 맺은 미하일은 2009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하일롭스키 극장의 발레 마스터로 임명돼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09년 미하일롭스키 발레단을 위해 고르스키-메세레르 버전의 〈백조의 호수〉를 복원하는 등 외삼촌 아사프가 안무했던 작품을 차례차례 복원하고 있다.





미하일 메세레르




 이외에도 ‘메세레르 파이브’는 아니더라도 메세레르와 플리세츠키 집안의 다른 형제들의 배우자와 그 자손 중에는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라힐의 형제인 에마뉘엘 메세레르는 2차대전 중 사망했지만 저명한 음악학자 라이자 글레저와의 사이에서 음악학자 겸 저널리스트가 된 아자리 메세레르를 낳았다. 또 마야의 사촌으로 시인 겸 번역가인 게르만 플리세츠키 등 메세레르-플리세츠키 왕조는 여전히 예술계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마야는 자서전에서 친척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알기 어려울 정도라고 불평했다. 하지만 그 친척들이야말로 메세레르-플리세츠키 왕조의 근간이 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러시아와 미국에서 음악학자 겸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아자리 메세레르는 특히 메세레르-플리세츠키 왕조의 역사와 여러 인물들의 삶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글을 다수 남겼다.

2020. 4.
사진제공_azarymesserer.com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