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계소식

최승희와 동양무용, 그리고 국제교류 기억들
무용학자 고 이애순 교수를 추모하며
2011.11.1

 연변대학교 예술연구소장을 역임한 이애순 교수가 지난 9월 말 연길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녀는 암투병 중이면서도 영면하기 며칠 전까지도 국제 학술행사에서 사회를 보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 주변인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이애순 교수를 처음 만난 건 1990년대 중반 월간 <객석>의 기자로 근무할 때였다. 사전 연락도 없이 <객석> 사무실로 불쑥 나를 찾아온 그녀는 1989년 <객석> 9월호에 실린 “월북 무용가 최승희를 말한다”란 제목의 특집 기사 얘기부터 꺼냈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상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이 특집물이 국내외 최승희를 연구하거니 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40페이지 분량에 해당하는 당시 특집 기사는 모스크바 현지 취재, 그동안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최승희 제자들의 인터뷰, 러시아에서 입수한 최승희의 저서 <조선민족무용기본>을 토대로 국내에서 잘못 기술된 <부채춤> 군무의 안무자에 대한 지적, 그리고 월북 후 행적과 미국, 유럽 및 중남미 순회공연 등과 관련된 내용 등 다양한 시각에서 최승희를 조명했었다.
 자신을 중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 학자로 소개한 이애순 교수는 온화한 미소와 함께 학자로서의 진솔함이 얼굴 가득 배어 있었다. 중국에 거주하는, 최승희를 제대로 연구하는 학자를 발견한 기쁨은 춤 현장에 있는 저널리스트에게는 아주 컸다. 당시 최승희와 관련된 기록들은 정병호 선생님의 저술 외에는 대부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주로 이야기로 전해지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에게 몇 개의 최승희 관련 자료를 요청했고, 나는 그녀의 최승희 관련 연구물에 대한 성과를 믿고 기꺼이 자료를 건네주며 인터뷰에 응했었다.
 조선족인 그녀가 최승희를 연구한다는 사실은 중국을 배경으로 활동한 최승희의 행적이 만만치 않다는 점과 중국 제자들과의 연계를 연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존재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중국 국적의 교수로 북한에서의 최승희에 대한 자료 수집이 가능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곧 그녀는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 그리고 중국 등 최승희가 활동했던 주요 지역인 3개 국가를 아우르는 연구가 가능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애순 교수에 대한 이 같은 나의 기대는 기우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후 두 차례의 북한 방문과 중국 및 한국을 오가면서 최승희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속속 연구 성과물에 담아냈다.
 나는 그녀로부터 장추화를 비롯한 북쪽에 살아있는 최승희의 제자들과 그녀의 인척들을 만난 이야기도 들었고, 최승희가 복권되어 무덤이 애국열사지묘로 이장된 것도 언론에 보도되기 전에 들었었다. 그는 북한에서 입수한 최승희가 직접 안무한 무사춤의 동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특히 교육자로서 최승희를 조명한 것과 월북 후의 최승희 활동, 중국과 한국 등 동양무용과 연계해 현장조사와 함께 최승희를 연구한 성과물은 이애순 교수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 들이었다.

 이애순 교수는 최승희를 연구하는 한국의 교수들과 소장파 연구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무용과 국악을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과의 인적인 교류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본격적인 암투병을 하기 전인 3,4년 전부터는 한국과 중국에서 전방위적으로 두 나라의 교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종족무용연구소의 중국 교류, 한국정재연구회와 중국예술연구원 무용연구소와의 교류, 한중 고위급 문화예술 포럼, 부산국제무용제 등을 통한 중국 무용계와의 교류에도 참여했다. 국내에서 열린 최승희 관련 국제 포럼이나 심포지움에도 그녀는 꾸준히 참여해 연구한 새로운 내용들을 발표했다.
 이애순 교수는 1999년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20세기 조선민족무용 및 최승희 무용예술”을 주제로 개최한 국제심포지움(국제고려학회와 연변대학교 예술연구소 주최)에 한국의 무용학자와 비평가, 무용가들을 초청했었다. 당시 작고한 정병호 교수를 비롯해 허영일,성기숙, 신명숙, 손인영, 그리고 필자 등이 참가했었다. 그녀는 방대한 학술 행사를 빈틈없이 진행해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다.
 당시 참가자들 모두가 참여해 가진 저녁 식사 후 여흥에서 그녀가 보여준 노래 실력은 가수를 뺨칠 정도로 뛰어나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었다. 학자의 치밀함과 꼼꼼함 뒤에 숨은 넘치는 끼와 흥은 그가 예인의 기질을 타고 났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애순 교수는 2002년에 필자가 기획한 “탄생 90년, 최승희 국제무용축제”(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 주최)의 국제 심포지움에서 발표했고, 이어 필자가 코디네이터로 참여한 2009년 최승희춤축제 국제포럼(주최 홍천군)에서도 새로운 논문을 발표했었다.
 2002년 “동양 무용에 미친 최승희의 무용예술”을 주제로한 국제 심포지움(2002년, 9월 30일 프레스센터)에서는 “북한 및 중국 무용에 미친 최승희의 무용예술”을, 그리고 “다시 최승희를 말한다”를 주제로 열린 최승희춤축제 국제포럼(2009년 11월 4일,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는 “최승희와 동양무용- 동양 4국 무용에 준 최승희의 영향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또한 2부 공개 및 시연에서는 “북한에서의 최승희무용 회복실태”를 내용으로 발표했다. 2009년 발표에서는 그녀가 직접 북한에서 입수한 최승희 안무의 <무사춤>의 영상을 공개하고 해설을 하기도 했다.

 이애순 교수는 최승희와 관련된 가장 많은 논문과 저술을 남겼다. 한국국학자료원에서 2002년에 발간한 두 권의 저서 <최승희무용예술연구>와 <최승희무용예술문집>은 최승희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2010년 한국춤비평가협회가 단체 명칭을 새로 바꾸어 출범할 때 공동대표들은 학자로서의 품성과 연구 성과를 높이 사 이애순 교수를 새 회원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내가 본 이애순 교수는 전형적인 학자였다. 성실하고 언제나 진지했다.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의 젊은 이론 교수가 자신의 논문을 심할 정도로 표절, 발표한 것에 대해 분노하며 그를 불러 따끔하게 야단치기도 했다. 그녀는 그 같은 사실을 나에게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한국에서 이론을 연구하는 젊은 연구자들, 교육자들의 비양심적인 작태에 대해 개탄 했었다.
 그녀는 작고하기 몇 년 전부터 자신의 아들이 한국에서 공부하게 된 것을 계기로 또 암 치료를 위해 한국에 머무는 시간을 더욱 늘려 갔다. 우리 부부를 동생이 운영하는 중곡동의 양꼬치 식당으로 초대하고 중국에서 올 때면 차 등 작은 선물들을 챙겨주기도 하는 등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남기거나 행했던 최승희와 동양무용에 관련된 연구물과 한국과 중국과의 문화예술 교류에 대한 기여도는 결코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얼마전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3년 전부터 함께 논의하던- 제3국에서 남북한 인사들이 참여하는 최승희무용축제가 시행을 위한 노력조차 해보지 못한 채 올해 결국 무산될 것 같다는데 대해 함께 아쉬워 했던 이애순 교수는 자신이 그토록 많은 시간을 연구에 매진했던 무용가 최승희가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영면했다.
 이애순 교수는 암 투병을 하면서 반복되는 검사 때마다 수치가 좋아지지 않는다며 걱정스런 소식을 전해왔었다. 몇 달전 결국 의사로부터 연변에서의 치료를 권유받았다며 그곳으로 돌아가겠노라고 전화를 했었다.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이야….
 한국의 몇명 인사들과 핀란드에서 컨텍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던 중 그녀의 제자로부터 부음 소식을 휴대폰 문자로 전해 받았다. 직접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마음을 짓눌렀다. 한국의 춤계에서 한국과 북한 중국을 오가며 동양 무용과 한국 무용사를 제대로 조명할 사람을 잃었다는 아쉬움도 컸다.
 이애순 교수는 영면 전 자신의 연구자료를 연변대학교에 기증했으며, 연구 중인 7박스 분량의 자료를 자신의 애제자에게 전하며 이후의 연구 활동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남겼다고 한다.
 이애순 교수는 빛나는 연구 성과물 외에도 현장을 누비면서 자료를 찾고 연구하는 학자의 성실함과 진솔함도 함께 후학들에게 남겨주었다.

2011.1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