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SPAF 해외초청공연 〈추억에 살다〉 & 〈위대한 조련사〉
과거ㆍ인류의 역사를 터치하는 독특한 시각
장혜선_전 월간 <객석> 기자
 대학로 가로수에 울긋불긋 단풍이 물드는 계절이다. 은행나무 냄새가 짙게 풍기는 이때가 되면, 무용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열일곱 번째 해를 맞이한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이하 스파프)가 이번 가을에도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아왔다.
 올해의 주제는 ‘과거에서 묻다’이다. 이번 스파프는 역사에 대한 반추를 통해 인간성 회복을 탐구하는 작품들로 구성했다. 현대인의 오류와 착오의 해결점을 지나간 시간에서 찾아보자는 의도로 펼쳐졌다. 인간의 역사는 사실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추억에 살다〉와 〈위대한 조련사〉는 이러한 진리를 여실히 반영한 작품들이었다.



 과거의 나를 꺼내보는 시간, 카롤린 로랭 보카주 〈추억에 살다〉

 아르코예술극장 앞마당, 정육면체의 투명한 박스가 설치됐다. 한 변의 길이가 12피트(feet)인 철제 프레임은 카롤린 로랭 보카주가 춤을 추는 공간이다.
 9월 22~24일에 열린 〈추억에 살다〉는 카롤린 로랭 보카주가 홀로 네 시간을 끌고 가는 공연이다. 야외에서 열리는 공연이니 시간과 환경의 변화가 거듭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에 상량한 가을바람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혜화역을 거니는 사람들은 모두 평온해보였다. 아르코예술극장 맞은편 마로니에 공원에는 다양한 행사 부스가 펼쳐졌다. 꽤 많은 인파가 광장을 메웠고, 활기를 띠며 각자의 주말을 즐겼다.




 다홍빛 원피스를 입은 보카주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 철제 프레임의 양 옆에는 헤드폰이 두 개씩 놓였다. 뒤쪽의 LED 모니터에는 이번 공연의 ‘남은 시간’과 여태껏 이어온 ‘총 공연 시간’이 새겨지고 있었다.
 춤이 시작됐다. 그녀가 움직이자 시간의 추가 흔들리는 듯 했다. 보카주는 몸이 기억하고 있는 모든 춤을 표면으로 드러내기 위해 쉬지 않고 고군분투했다. 지금의 시·공간과 과거의 추억이 중첩되며 춤은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음악은 없었다. 지나가는 소음이 음악일 뿐이다. 공연을 보고 있으면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듣는’ 것처럼 일상을 둘러싸는 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게 된다. 네 시간동안의 움직임은 바람과 소음, 지나가는 이와 바라보는 이와 함께하는 즉흥적인 소통이다.
 때로는 그녀를 생경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느껴졌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다채로운 버스킹이 펼쳐지고 있으니 그럴 만하다. 누구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누구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선보이고, 청춘들은 낭독 공연을 하고 있었다. 틀 안에서 내면의 움직임을 끌어 모으는 보카주의 작업을 바라보다가 설치된 헤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들리는 건 녹음된 그녀의 목소리. 보카주가 실제로 공연하다가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들을 담은 것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 날씨와 온도에 대한 감상, 가족들에 대한 추억 등 맥락 없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있고, 금방 헤드폰을 빼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보카주는 틀 밖으로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틀 안에 있을 때 더욱 유연해 보였다. 한 번은 누군가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왜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가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냥… 이 안에 있으면 아주 많은 자유를 느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공연을 보다보면 사람의 기억은 감각적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예컨대 촉각. 손에는 매우 많은 기억이 있다. 한평생 얼마나 많은 물건과 여러 사람을 만지는가. 그리고 후각이나 청각도 기억과 감정을 관장하는 변연계에 연결돼 있는 걸 느끼곤 한다. 종종 냄새나 소리로 옛 순간을 기억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공연이 끝나기 십초 전, 관중은 한 마음으로 10부터 1까지 숫자를 셌다. 네 시간의 긴 여정이 끝나자 보카주는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창작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관중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삶의 이야기가 끝나고 남는 여운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인류의 역사를 꺼내보는 시간,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 〈위대한 조련사〉

 그리스 출신의 연출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 명 이상의 출연진이 동원된 아테네올림픽의 23개 작품은 그의 예술적 역량을 오롯이 증명했다.
 9월 28~30일, 그가 연출한 〈위대한 조련사〉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2017년 아테네에서 초연했고,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였다.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는 지난해 이 작품의 제작을 위해 스파프를 비롯한 총 일곱 개의 세계적인 페스티벌과 극장에 공동제작을 제안했다고 한다. 작품을 관통하는 역사관은 이번 스파프의 주제인 ‘과거에서 묻다’와 맞닿아 있었다.

 

 

 공연 시작 전, 검은 판자로 뒤덮인 무대에 한 남자가 누워있다. 공연시작 3분 전, 누워있던 남자는 다짜고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신발 끈을 매다가 객석을 응시, 관객을 조용히 관찰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한 무대는 어느 행성 같다. 공연이 시작되자 관객을 바라보던 남자는 허물을 벗듯 옷을 벗었다. 암흑으로 뒤덮인 공간, 남자의 알몸에서만 빛이 나는 듯했다. 삽시간에 객석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긴장된 느낌은 공연 내내 지속됐다. 극은 느린 속도로 진행되다가 점점 속도가 붙었다.
 배우가 신발을 신고 한 걸음 내딛으려 하지만, 신발 바닥에는 깊은 뿌리가 박혀있다. 인류의 역사가 그렇지 아니한가. 새로이 걸어 나가려고 해도 밑을 옭아매는 역사의 뿌리를 외면할 수 없다. 배우는 결국 물구나무를 선 채 밖으로 나갔다.
 열 명의 배우는 본격적으로 ‘인간 탐색’을 시작했다. 몸은 서로 융합돼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다른 행성에서 온 자는 새로운 인간을 발굴하기 위해 땅을 파헤쳤다. 그 과정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전쟁이 발생했다. 누군가는 대지 위에 씨를 뿌리고, 누군가는 붕대 같은 석고 갑옷을 입었다. 인간은 참으로 복잡한 세상을 만든다. 모든 것에는 정해진 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객은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이야기를 완성하게 된다. 장소도 시간도 불분명한 무대에서 우리의 뿌리 깊은 역사를 발견했다. 공연의 끝에서는 한 자루의 뼈밖에 남지 않은 인간의 씁쓸한 최후를 담아냈다.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는 공연예술에 몸담기 전에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순수미술에 토대를 둔 그의 연출은 시각적인 부분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흑백의 명확한 대조는 촌스럽지 않았고, 미니멀한 오브제들은 각각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번 공연을 통해 새롭게 주목해야할 것은 그의 음악적인 감각이다. 공연 내내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춤추듯 흘러나오지만, 잘못된 생산물이 등장할 때마다 날카로운 음향적 효과가 어우러졌다. 클래식 음악에 녹아든 현대의 음향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여전히 밀접하다는 것을 담아낸 것이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자 무대 앞쪽에는 해골과 책이 함께 놓였다. 인간은 끝내 소멸되어 버리지만, 인간을 기록한 활자는 역사의 생생한 증거임을 나타낸다. 조명이 상반된 두 개의 오브제를 비추며 극은 끝났다. 관객은 짙은 여운을 뒤로한 채 기립하여 박수를 보냈다.

 

 

 춤비평가 장광열은 “경사 무대를 이용해 출연자들의 등퇴장 공간을 입체화 하고, 전체적으로 퍼포머들의 움직임의 진폭을 작고 느리게 가져가면서도 시종 긴장감을 유지시킨 점, 퍼포머의 움직임과 동선, 오브제, 조명과 음악과의 세밀한 밀착을 통해 인상적인 비주얼과 상징성을 극대화 하는 연출가의 감각이 돋보였다. 사람의 몸 속 장기를 끌어내는 장면, 서로 다른 퍼포머들의 상체와 하체를 매칭시킨 시도는 샤샤 발츠의 〈The Body〉에서 이미 보여주었던 것이어서 아쉬웠다”고 촌평했다.
 10월의 스파프에선 아크람 칸 컴퍼니 〈언틸 더 라이언즈〉(10월 12~13일)와 떼아트르 드 랑트루베르 〈애니웨어〉(10월 13~14일)를 만날 수 있다. 〈언틸 더 라이언즈〉는 정교하고 현란한 인도 전통춤 카탁과 현대무용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작품이다. 원형무대와 라이브 섹션을 활용해 몰입감을 주며, 아크람 칸 특유의 생동감 있는 움직임을 선사한다. 얼음인형극 〈애니웨어〉는 앙리 보쇼의 소설 〈길 위의 오이디푸스〉를 원작으로 한다. 얼음인형 오이디푸스(고체)는 천천히 물(액체)로 변해가고, 마침내 안개(기체) 속으로 사라진다.
 국내 단체들의 공연도 이어진다. LDP의 〈Look Look v2〉(10월 10~11일)는 오늘날 가식에 익숙해진 개개인의 개성을 찾아야 한다는 본질적 정체성에 질문을 던진다. 또한 스파프 초연작으로 아베 코보의 원작 소설을 몸짓으로 풀어낸 마홀라 컴퍼니의 〈모래의 여자〉(10월 14~15일), 무용과 미술의 융복합 무대라고 할 수 있는 컴퍼니 J의 〈언더스탠드〉(10월 14~15일) 등이 관객을 기다린다.
 
 
출처_서울국제공연예술제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SPAFinSeoul)
ardentmithra 블로그(http://blog.naver.com/ardentmithra/221105257568
장혜선
공연예술전문지 월간 〈객석〉에서 클래식 음악과 무용담당기자로 일했다. 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발간하는 〈문화공간〉의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바른 시선으로 무대를 영원히 기록하는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글을 쓴다.
2017. 10.
사진제공_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2017) *춤웹진